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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강미란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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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길이다. 타지에서 맞는 아침이라 떠오르는 상념이 사뭇 다르다.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단아하게 굽이진 안흥지 둘레를 사붓사붓 걷는다. 쌍둥이 분수대가 서로 화음을 맞추니 발걸음도 따라 리듬을 맞춘다. 건너 정자가 한 송이 연꽃처럼 고고하게 떠 있다. 그 옆에 휘늘어진 수양버들이 운치를 더한다. 내 마음을 따라 발길은 무심결에 그곳으로 향한다.
오작교를 건너 정자에 올라섰다. 세조 12년 이천 부사 이세보는 남쪽 정자 옆 습지에 방지(네모진 연못)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안흥지를 만들었다. 안흥지 곳곳엔 연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고요하고 그윽하다. 자태가 빼어나다. 더구나 무리 지어 피어나 향이 짙다. 영의정 신숙주가 정자에서 바라본 연꽃의 자태는 애련하고 초연했었던가. 이곳을‘애련정(哀憐定)’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안흥 방죽의 둘레는 온통 빌딩 숲이다. 예전에 이곳은 구만리 들판이 었으리라. 넓디넓은 논에 방죽의 물을 대어 지은 쌀을 임금님께 진상했으니 안흥지는 이천 역사의 한 줄기나 마찬가지리라. 방죽은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물의 범람을 막아주며 농업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세운 둑이다. 고려나 조선시대 조정 대신들이 방죽 앞에 논을 갖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하니, 우리 조상들이 방죽의 쓰임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짐작이 된다.
둑길에 세워진 시화를 읽으니, 예전의 이곳이 소환된다. 문득 둑은 영양분이 가득한 어머니의 젖가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젖줄이 아기의 생명으로 이어지듯 방죽의 물이 하늘의 뜻만 기다리다 지친 논밭의 생명줄을 타고 흘렀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 필요한 농업용수를 대어 천하제일의 미질 쌀 주산지를 만들었을 터이다.
방죽의 물은 수위가 차오르면 스스로 둑을 넘어간다. 오래 가둬 놓은 물은 내보내지 않으면 썩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고향 샘골에도 둑이 있었다. 들판을 한참 지나 동네 초입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시작점으로 둥근 방죽이 이어진다. 샘골 방죽의 물이 아무리 넉넉히 담겨 있어도 아버지의 속은 언제나 타들어 갔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아버지는 못 둑에 앉아 서당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보며 배움의 갈증이 점점 더해졌다.
그런 아버지에게 고모님은 든든한 둑이었다. 아버지는 보리쌀로 때를 이었던 가난한 집 8남매의 막내였다. 고모님은 끼마다 보리쌀을 조금씩 모아 동생을 서당에 보내셨다. 아버지가 평생 고모님을 잊지 않고 살았던 것은 당신 삶의 길에 배움의 물꼬를 터 주신 때문이리라. 고모님은 아버지의 갈증을 풀어 준 원천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삶의 굴레를 벗기 위해 배움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갈증은 그것으로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특함을 알았던 이웃집 아저씨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나는 길에 아버지를 데려갔다. 그 후 아버지는 독학으로 검 정고시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섬유학과를 졸업하셨다. 아버지가 샘 골의 둑을 넘은 것은 당신 삶의 한계를 넘은 것이고, 세상의 편견을 넘 은 것이다. 훗날 샘골 친척들 삶의 물꼬까지도 터주었으니 아버지가 둑을 넘은 것은 나를 넘어 타인의 삶에 물꼬를 트신 것이리라.
안흥지는 관광명소만이 아니라 이천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안흥 방죽은 이제 더 주변에 물을 대어줄 논이 없다. 안흥지는 수원 고갈과 생활폐수로 오염되어 용도 폐지선고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이천시와 시민들의 정성 어린 헌수운동으로 옛 모습을 되찾는다. 이젠 안흥 방죽은 시민들의 치유 공간이 되고 있다. 시가 있고, 물이 있고, 연꽃 향기가 있는 이곳이 시민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안흥지는 배려의 터전이다.
둑은 삶의 버팀목이다. 삶은 우리를 향해 계속 도전하고 있다. 우리 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둑 위에 서 있는 나약한 존재인지 모른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막아내야 할 일들이 적지 않다. 절망, 고난, 분 노, 건강, 인간관계…. 그것이 우리 마음에 미리 둑 하나쯤 쌓아야 할 이유이다.
내 마음에도 둑이 있다. 우리는 마음의 둑을 겹겹이 쌓아 두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버틴다. 소통과 공감은 마음의 둑을 허물어 버린다. 방죽 안에 물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선물임을 안다. 때를 알고 물꼬를 터 주어 생명을 이어주지 않는가. 받기만 하고 베풀지 못하는 욕심은 내 안의 둑이리라. 서로의 삶에 풍요로움을 더하면 그것이 서로를 지탱해 주는 둑이 아니겠는가.
문학작품을 매개체로 심리적인 치료와 치유를 돕는 문학 테라피스트 일을 시작했다. 내면 탐구와 자아 발견으로 치유와 성장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단단히 묶어 둔 마음의 밧줄을 풀고 세상으로 나와 소통과 공감, 용서와 화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단단히 쌓은 마음의 둑을 허물고 마음의 물꼬를 트는 일, 누군가의 든든한 둑이 되는 일이다. 삶이 메말라지면 삶의 갈증을 풀어주는 그런 존재로 사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존재 이유가 되리라. 나 또한 그로 인해 내 삶의 든든한 둑이 쌓이리라. 그것이 충만한 삶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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