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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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려는지 끄느름하다. 서둘러 공원을 오른다. 누가 신호를 보낸 걸까,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떼 지어 날아 앉는다. 동물애호가가 먹이를 쏟아놓고 간 모양이다.
‘배가 하나같이 땡땡하네. 잘 먹여서 그런가.’
혼자 응얼거리는데 뒤 오던 아저씨가 엿들었나 보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깃털을 켜켜이 쌓아 두어야겠지요. 봄이 되면 하나둘 빠질 거에요. 동물이 다 그렇듯이 자연 생존법이죠.”
아, 그렇구나! 댕댕이의 몸에 털이 나지 않는 이유가 오로지 내게 있었다. 답은 간단명료했다.
30도를 훨씬 웃도는 찜통더위에도 뭔가를 입히고 나간다. 못마땅해 하는 행인들의 눈길보다 사랑스럽지 않은 댕댕이의 모습을 훑어보는 뭇 시선이 더 무섭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몇 해 전 일이다. 댕댕이의 털을 이발기로 완전히 밀었는데 그 후 볼품없이 지내고 있다. 여기저기의 모임에서 들었는데, 포메라니안의 미용 방법으로는 가장 좋지 않다. 그렇게 민 부분은 한동안 털이 나지 않을 거라 했다. 옷으로 가릴 수 없는 머리와 다리 쪽에는 원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 더 기괴하다.
영화 <퍼팩트 데이즈>에 나오는 주인공(제76회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수상)의 인터뷰 기사에 꽂혔다.
“완벽한 날은 없다. 몸부림치며 살아갈 뿐, 인간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려 한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배설하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하는 노동은 아름다운 행위라는 걸 새삼 느꼈다.”감동이다.
이 영화를 꼭 관람하겠다는 마음에 무조건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운 좋게도 개봉 첫날 첫회 상영 1분 전이었다. 그의 첫 새벽은 지난밤 바닥에 누워서 읽던 책을 낮은 선반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이어 화초에 물이 직접 닿지 않게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번 걸러주는 일로 시작한다. 그의 따스함이 자연스럽게 내게도 스며든다. 촉촉한 화분 사이로 사시 사철 옷을 입고 나다니는 우리 집 댕댕이가 느닷없이 화면 안으로 들어 와 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살을 베일 듯한 날에도 산책은 한다. 집으로 돌아와 몇 겹의 옷을 벗기면 맨살이 마치 난로같이 후끈하다. 이불 속으로 잘 파고드는 댕댕이에게 집 안에서도 내의 같은 옷 하나는 늘 입혀둔다. 댕댕이가 구태여 자기 털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서 생존 본능까지 잃었나. 털갈이할 틈조차 주지 않는 주인에게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그 순종에 가슴이 미어진다. 영화는 자꾸 이어지는데 그 가엾은 개를 제대로 사랑이나 했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주책없이 눈물 이 쏟아진다.
이어서‘도쿄 공공화장실 청소부’라는 글씨가 등판 전체에 적힌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입고 출근하는 모습이 나온다. 한 번 더 움찔했다. 저 당당함과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은 나중의 문제였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과 자기 일에 솔직하고 정직했으며, 자연과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일간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극빈 가정, 16세 임신, 자퇴생, 영국 내각 이인자 됐다.’그녀는 속기사들에게 연설문을 매끄럽게 수 정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잘못된 문법조차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고 했다 한다.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하기는 치부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 살아온 자신의 잣대일 터인데 나는 아직도 나의 민낯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남을 너무 의식하며 살아서인지 근래 들어 피곤한 날이 부쩍 늘었다.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다. 자신에 좀 더 솔직해지자. 먼저 몸뚱어리에 털 하나 없는 댕댕이의 살굿빛 민살부터 보여주어야겠다. 물어보면 사실대로 답하고 말하기 싫으면 그냥 지나치자. 따가운 시선과 멸시, 비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자연 바람을 받게 하고, 자연 빛을 쪼여가며 맨살 위에 털이 나오도록 노력하자. 아마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요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댕댕이는 신이 났다. 마음을 비웠더니 거짓말같이 털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태백산맥같이 등줄기를 타고 일렬로 또렷하게 보인다. 등줄기의 흰털은 제법 뭉쳐져서 붉은 살을 감추고 있다. 차령산맥, 노령산맥을 이루면서 빗살무늬처럼 등과 양 옆구리를 지나 아래로 점차 흘러내릴 것이다. 새하얀 털은 불빛에 반사되면서 제법 윤기를 머금고 있다. 대견하다. 빗질을 거꾸로도 해보고 손으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성급한 나머지 실험용 돋보기로도 관찰한다.
하나둘 날 때는 표가 나지 않는다. 조동화 시인의 시구가 저절로 떠오른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올겨울엔 본래의 민낯을 되찾은, 털북숭이 댕댕이를 데리고 동네방네 휘저으며 본태를 자랑할 것이다.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낮에도 산책 한다.
동물은 자연치유법으로 잘도 사는데 인간은 온갖 병을 달고 산다. 노인들이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써놓았다고 자랑은 하는데 때 맞춰 병원 가고 끊임없이 약국을 드나든다. 나는 아직 작성하지는 않았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충분히 익힌 후에 써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잦아지고 있다. 그 행동이 실수 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덜컥한다. 민낯 보이기를 굳이 배울 필요가 뭐 있느냐고 세월이 경종을 울리나 보다. 더 머무를 시간이 없다. 서둘러 의향서를 써 두어야겠다. 그래 저래 나의 완벽한 날은 아마 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