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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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부산에서 6·25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돌아와서 처음 들었다. 여중에 입학한 후, 창덕궁 근처 일가집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 집 할머니께서 어린 나를 할머님이라고 부르며 무척 반기셨다. 나를 앞에 앉혀 놓고는 당신이 알고 있는 우리 집의 내력을, 손녀딸에게 옛날이야기를 하듯 말해 주셨다. 육이오가 일어나기 3년 전, 함경남도 북 청에서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어깨에 멘 짐 위에 앉아 안내원을 앞세워 한밤중에 삼팔선을 몰래 넘어온 나에게는, 우리 집안 이야기를 들려 줄 친척이 없었다. 할머님이라는 칭호에 어리둥절한 나는, 우리가 대종가의 종손이라 서열이 높다는 이야기를 집에 와서 들었다. 내 할머님의 성대한 혼례 이야기부터 북청군 하천리에 있는 큰대문집 이야기까지 모두, 그 친척 할머니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맨손으로 집안을 일으키느라 어린 딸을 앞에 앉혀 놓고 옛날에 잘살았다는 집안 내력 같은 것을, 한가하게 얘기할 겨를이 없었다.
일제치하 때, 부유한 양반집에서는 극비리에 독립자금을 후원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일본 유학이나 만주를 오가며 양반집 자제들의 씀씀이로 가산을 축냈다. 친척 할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조금 뜸을 들이시더니, 쓴웃음인지 한탄인지 야릇한 미소를 띠며 하신 이야기는 너무 황당했다.
큰서방님은 대부분의 세월을 만주에서 보내며 집에 계신 적이 거의 없었다.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는 언급이 없었다. 늘 홀로 지내던 젊은 아씨는 친정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멀리 있는 친정집으로 가느라 첫새벽에 집을 나섰다. 평소 안채에서 바깥나들이도 별로 없던 병약한 아씨는 장마 때여서 강폭보다 서너 배 더 넓은 하천에 여름철에만 단단한 지반을 찾아 휘돌아 놓는 엉성한 섭다리를 힘겹게 건너 친정으로 갔다. 아씨를 따라가는 여종의 머리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얹혀 있고, 저만치 앞에는 늙은 할아범이 사돈집에 보내는 짐을 지게에 가득 지고 갔다. 그 길이 마지막이 되었다. 아씨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뵙고 쓰러졌다가 그 길로 세상을 떠나서, 할아범과 여종이 슬픈 얼굴로 죄인처럼 돌아왔다. 그 소문은 온 동네를 휘젓고 돌아 인근 동네로 퍼지면서 야릇한 소문까지 곁들여, 다시 할아버님 동네로 돌아왔을 때는 소설 한 편이 완성되었더란다. 아씨는 자살한 것이며, 이유는 늘 혼자라서 생긴 여러 가지 입에 담지 못할 소문 때문에 수치심에 못 견뎌 저지른 일이란 것이다. 그런 헛소문은 시간의 흐름에 맡겨 두면 차차 잊어지는 법인데, 할아버지는 이 괴이한 소문에 살아오던 고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실이 아니라도 양반가문에 그런 상서롭지 못한 사연이 곁들여지면 체통이 말이 아닌 집안이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문전옥답부터 인근의 야산, 근거리에 걸쳐 있는 모든 전답을 헐값에 정리했다. 엄청난 거금이었다. 대대로 집안일을 거들던 마름에게도 약간의 논밭이 건네지고, 소문이 닿지 않은 먼 고장에 살림집을 마련했다.
이사한 곳은 외진 골짜기인데 밭뙈기가 좀 있고, 개울가 근처에 식구들이 먹고 살만한 논이 있었다고 한다. 딸린 하인들도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내보낸 후라, 부엌어멈 부부와 두어 명의 하인뿐이었다. 집은 여전히 컸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집은 북적대던 옛 집 과는 달리 몇 명 안 되는 식솔로 빈집 같았다. 밤에는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쩡 울리고, 괴기스러워 너무 무서웠다고, 막내고모가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그 후에 퍼진 소문에 의하면 꽤 넓은 논을 구입했는데 현지에 도착해 보니 너른 논은 방죽이고 흐르는 하천으로 탈바꿈해서 유장히 흐르더란다. 하천이 얼어 있을 때 지푸라기를 뿌려 놓아 그럴듯하게 논으로 위장하여 마름이 속아 구입했다고 한다. 그 소문은 떠난 마을까지 닿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며, 온 문중이 탄식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애석해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 겨우 여덟 살쯤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끝낸 친척할머니는 삼십 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난 일을, 아직도 속이 아린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당한 것처럼 애석해 했다. 종가 는 그 일족의 기둥이며 자랑인 것이다. 그런 종가가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진다는 것은 크나큰 아픔이다. 상서롭지 못한 거짓 소문이 났다고, 대를 이어오던 터전을 그리 떠나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었다고, 친척 할머니는 탄식했다.
중학생인 나는 토지문서가 있었을 텐데, 마름이 세상물정에 어두운 주인을 얕보아 거짓문서로 사기행각을 벌였나? 미심쩍고 석연치 않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분노가 일었다. 심지어 일처리를 그렇게 한 할아버지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 잃어버린 재산은 삼팔선으로 막혀 있어서, 든든한 아버지와 서울에 살고 있는 나와는 무관했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납득되지 않는 안타까운 무엇이 맴돌았다. 참으로 황당한 그 이야기 속에는, 오래 내려온 부로 인해 나태해 져서 가산을 귀한 줄 모르고 제대로 간수할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양반 에 대한 비웃음도 들어 있었다.
육이오의 참상을 겪은 우리나라는 실로 모든 것이 어설프고 초라해서, 나 같은 어린애들은 우리나라가 자랑거리도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나라인 줄 잘못 알았다. 전쟁의 후유증이 가라앉고 나서 조금씩 철이 들며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기 시작한 후에, 차차 알게 된 선조들의 업적은 왜곡되게 알고 있었던 나를 크게 부끄럽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생 명을 바쳐 저항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려고 전 재산을 바친 수많은 일화에 접하며, 여중 때 할아버님의 일처리에 크게 실망했던 나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야 머릿속을 때리며 은은하게 퍼지는 깨우침의 종소리를 들었다.
아! 아! 독립자금. 할아버지는 어리석은 선비가 아니라, 기막힌 연출가이며 천재적인 극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