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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는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사람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규석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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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면 1983년 6월 30∼11월 14일까지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뇌리에 박혀 떠오른다. 78%라는 높은 시청률이 말해주듯 매일 이어지는 생방송을 틈만 나면 쳐다보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산가족 상봉 당사자야 말할 것도 없고 시청자 모두 감격으로 눈물바다를 이뤘다. 이때의 방송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수많은 이산가족과 사상자가 발생한 한국전쟁은 아직도 많은 남북 이산가족을 남겨 놓고 있으니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몹시 쑥스럽다. 생이별하고 평생을 보낸 분들에게 하루빨리 상봉의 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도 늘 송구한 심정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 중에 잊힌 사람이 많다. 마리 로랑생 말에 따르면 소중한 사람에게 잊히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정지용의 시「향수」에서“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이든 고향이든 그렇게 잊으면 안 되는데도 나이가 드니까 까맣게 잊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잊은 대로 한세상 끝나면 그만이기는 하다. 그런데 잊힐 리가 없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승을 떠난 사람이야 당연히 만날 수 없지만 아직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으면서 만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오늘 잊힐 리가 없으나 만날 기약도 없었던 그러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1970년대 초에 한 직장에서 만나 약 20년간을 1년에 2회 이상 3박 4일로 전국에 험하고 높은 산만 텐트와 먹거리를 지고 함께 올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최연소자로 막내, 한 살 위는 소형, 4살 위는 중형, 6살 위는 대형이라 서로 부르며 형제처럼 지냈다. 그중 중형 이 뜻밖에 전화를 줘서 반갑게 만나 식사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소형과 대형의 소식을 심지어 생사여부도 모르며 지낸 지 30년 이상 흐른 것을 알고 놀랐다.
더위에 두타·청옥산을 넘다가 계곡물에 들어갔을 때의 시원함, 추운 겨울 백설이 쌓인 통고산과 일월산을 넘다가 어느 골짜기에서 민박 중 간첩으로 몰려 영양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일,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 지리산 벽소령을 지나 가슴까지 차는 눈 속을 죽음의 공포 속에 걸어 세석대피소에 도착한 일, 소백산 남측 기슭 5부능선에 텐트를 치고 자려는데 빗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와 보니 바람 소리였고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밤을 새운 일, 골짜기에서 취사하고 마시던 커피 맛과 텐트 속에서 자던 꿀잠 등등. 왕성한 체력이 있을 때 맺어진 잊힐 리가 없는 사람과 그 당시의 산이 내 마음속에 있다.
살다 보니 30여 년의 세월 잊고 지낸 소형과 대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기는 이웃의 형제자매, 늘 친절했던 동네 형과 아저씨, 선생님, 친구, 좋아하던 여인 등 잊을 수 없으나 만날 수 없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마음이 황진이와 문장가 백호,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을 소환한 다. 스님을 파계시키고 서화담을 연모한 황진이가“산은 옛 산이로되 인걸은 간데 없다”고 한 시조가 있다. 황진이 시대와는 달리 요즘은 산도 옛 산이 아니기는 해도 흘러가는 물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동시대에 살았던 대문장가 백호 임제는 공무로 송도에 갔을 때 황진이를 만나고 싶어 소식을 물었더니 이미 흙 속에 묻힌 지 오래여서 황진이 무덤을 찾아갔다. 제사를 지내고 잔을 기울이며 시조 한 수 읊었는데 백호는 이 소문 때문에 파면되었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관계는‘세기의 연인’으로 부른다. 시인인 아폴리네르는 입체파에 영향을 주었고 로랑생은 입체파 화가들 과 어울린 화가이다. 이들은 피카소가 소개하고 이어준 커플로 공개적으로 사귀면서 몽마르뜨언덕과 몽파르나스에서 활동하던 예술가 그룹에 속해 지냈다.
5년의 열애 생활 중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 도난으로 아폴리네르가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결혼 약속까지 한 두 사람은 이 사건으로 다퉜고 결국 헤어졌다. 이때 아폴리네르는 이별의 아픔을 「미라보다리」란 시로 남겼는데, 이 시는 샹송으로 불렸고 우리나라에 서 1960년대에도 유행하였다.

미라보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중략)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다리 아래 센 강만 흐른다.

이런 연시에도 불구하고 그 후 로랑생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로랑생과 헤어진 6년 후 아폴리네르는 악명 높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생을 마감하고, 로랑생은 아래와 같은「외로운 여자」라는 시를 남겼다.

오! 당신은 알기를 원하십니까?
(중략)
외톨이가 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을…
그것은 바로 유랑 생활입니다.
하지만 유랑 생활보다도 불행한 것은
죽음이랍니다.
그렇지만 죽음보다도 더 불행한 것은
바로 잊히는 것입니다.

위의 시를 남긴 지 3년 후인 1920년 로랑생은 이혼했고 1956년 사망했다. 로랑생의 유언대로 그녀의 한 손에는 장미를 쥐고 가슴에는 아폴리네르의 편지와 시집을 올려놓은 채 묘지에 묻혔다. 죽는 순간까지 만 날 수 없는 그래서 사무치게 그리운 아폴리네르를 잊지 못한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사별해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더 애틋할지, 살아 있음에도 잊고 지내는 것이 더 무정한 것인지는 사람이나 사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잊히고 잊지 못하는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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