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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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작고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긴 하지만 손수건에는 다양한 삶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으니, 고백과 다짐과 애정과 이별과 눈물 등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시구 속의 손수건에는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보내온 하얀 손 수건.’이 노랫말 속의 손수건에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중세 서양의 기사들이 전장에 나갈 때면, 귀부인들은 그들에게 손수건을 선물하였으니, 거기에는 사랑의 의미와 함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겠다. 임진란과 동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시 전 장에 나가는 남정네들에게 우리의 아낙들은 삼베 수건을 선물하였으니, 그 속에는 임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었겠다. 그리고 그 남정네들은 전장에 임하여 삼베 수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 전투에 임하였으니, 이 수건에는 동지애와 함께 조국을 위해 분골쇄신하고자 하는 다짐이 담겨 있었겠다. 격투기 운동 경기에서는 경기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경우에 수건을 던지는데, 그 속에는 땀을 닦으며 쉰다는 안식과 함께 항복의 의미도 담겨 있겠다. 어려운 처지에 처한 장애인이 노란손수건을 흔들면 사람들이 달려가 도움을 주는 바, 이 경우의 손수건에는 희생, 봉사, 애정, 협동 등등의 의미가 담겨 있겠다.
지난날의 우리에게 손수건은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젠 손수건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탈바꿈되었다. 일회용 화장지 덕분이다. 그것은 질과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손수건을 능가한다. 이젠 어디를 가나 화장지가 예비되어 있어서 손수건 대용으로 사용함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손수건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땀이 많이 난다는 데에도 이유가 있지만, 소소한 비염이 있는데 이놈이 나를 항상 괴롭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 어디에 서나 손수건을 벗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간다.
내가 현직에 몸담고 있던 오래 전 어느 해의 개학날이었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첫 출근을 하는 날의 아침이다. 약간은 상기된 기분으로 교무실에 들어섰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교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내 책상 위에 손수건 한 장이 캔커피에 눌린 채 곱게 놓여 있다. 커피가 아직도 따끈따끈하다. 다시 손수건을 들여다본다. 낯익은 손수건,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내 손수건이다. 깨끗하게 빨아서 나비의 날개처럼 예쁘게 접었다. 손수건과 캔커피에서 여고생인 소녀의 미소가 방긋거린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책상 위, 거기에서 방긋거리는 소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온갖 상념에 빠져든다.
지난 방학 중에 보충 수업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나는 손수건을 사 용했을 터이다. 수업이 끝나면 그것을 챙겨야 하는데, 아마도 그냥 두고 나왔던가 보다. 어떤 아이인가 그것을 챙겼고, 그리고 깨끗하게 빨아서 이 아침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 긴긴 방학 동안 어떻게 이것을 챙기고 간수했을까? 녀석을 향한 고마움이 잔잔한 감동으로 탈바꿈되어 봄날의 아침 안개처럼 나를 감싸고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녀석이 준 커피를 마신다. 커피가 아직도 따뜻하다. 나는 갸륵하고 따사로운 녀석의 마음도 함께 마신다. 목구멍을 타고 넘는 액체가 나의 온 몸과 마음을 따사롭게 감싼다. 도대체 어떤 녀석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한 장의 조그만 쪽지 정도는 있어야 옳다. 그런데 그것도 없다. 세태가 저러하건만 자기를 드러내고자 않는 아이이다. 신통하게 생각은 하지만 답을 할 수 없는 아쉬움이 마음의 강물 위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울타리 바깥세상에는 거친 물결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겠다. 그러나 누가 세상을 각박하기만 하다고 하던가? 내가 뛰놀고 있는 내 마당 안에서 이 세상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수 십 년 전의 아이들이 오늘의 아이들이고 오늘의 아이들 또한 그때의 아이들과 다름이 없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믿는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정지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변함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개학날 이 아침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자근거리며 다짐을 해 본다. 비록 남은 날은 적을지라도, 또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열정은 뜨거움을 잃어가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사위어지는 열정의 잔 가지들을 모아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모닥불을 지펴 보자고, 그리하여 현실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입시의 한파 앞에서 두려움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녀석들의 추위를 조금이라도 녹여 보자고. 나는 녀석의 정성 과 사랑이 담긴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그 아침에 그런 다짐을 했었다.
어느새 교무실의 유리창을 통해 환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늘도 그날따라 더욱 파랬었고. 나와 함께 깔깔거리며 부대꼈던 그 아이들의 마음을 닮은 하늘이요 햇살이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