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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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이 장착된 차를 타면 안심이 된다. 주소만 넣어주면 어디든 가는 길을 알려주니 뭐가 걱정인가. 사람 눈으로는 확인이 어려운 위치 정보는 물론, 벌금 단속 구간까지 알려주는 배려에는 웃음이 난다.
오십년차 운전사인 나는 처음 그것을 봤을 때 마치 공상과학영화 속에 들어온 듯 신기했다. 요즘엔 보행자용 길도우미도 서비스 중이라니, 뭔가 불편한게 있으면 몰라서 그런 것이라는 이 세상이 요지경 속이 다. 내 생전에 이런 날이 오다니…. 내비없이 운전했던 지난 일들이 떠 오른다.
1972년에 미국에 갔을 때다. 거기서는 자가용이 신발이라고 했다. 신발없이는 외출이 어렵다는 세상에서 버티려니 운전을 배울 수밖에 없다. 선물이라며 지도를 쥐어주었고, 산책 후에는 길을 익히기 위해 다녀온 곳을 매번 지도에서 다시 짚어보게 했다. 유학생 남편은 공부에 전념해야 하니 내가 먼저 운전면허를 따기로 했다.
나는 지역사회학교의 무료 운전교육 야간과정을 등록하였다. 운전교습을 시작한지 한 달만에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입덧이 시작되면서 일자리까지 생겨 매일 출근하게 되니 초비상시 국이라 남편이 서둘러 면허를 땄다. 내 일자리 덕분에 중고 폭스바겐 자동차를 장만할 수 있었다.
아기가 생후 두 달이 되자 나는 그 차로 운전연수를 시작했다. 직장에도 복직했고 면허시험에도 합격하자, 아기를 맡기고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를 아침마다 데려다 주던 그이가 얼싸 좋다며 다음날부터 운전 대를 놓아버렸다. 첫 사흘은 조수석에 앉아 길도우미 역할을 했지만, 다음 사흘은 자기를 투명인간으로 생각하라며 뒷자리에 조용히 앉더니 말도 못하게 했다. 이후 남편은 집에서 1마일도 안 되는 학교 앞에서 아예 내려버렸다.
대신에 내가 매일 왕복 16마일을 운전했다. 남편의 학업 외 일과를 줄여주기 위해서는 내가 운전을 안 할 수 없다. 돌도 안된 아기와 둘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목숨을 걸고 운전대를 잡았다. 길을 잘 알면 운 전 울렁증이 괜찮아질까. 자세하게 지도를 그리며 길 공부를 하며 좌회전 우회전을 위해 차선 변경 지점까지 써넣고 그 지도를 무릎 위에 놓고 다녔다. 그런데 다른 차들은 어찌나 쌩쌩 달리는지 혼자서 남보다 속력이 떨어지면 흐름을 타지 못해 위험했다. 잠깐이라도 딴생각 할 새 도 없이 벌벌 떨면서 다녔다. 그 당시에 지금 같은 훌륭한 길도우미 내 비가 있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2년 후, 남편의 취업으로 700마일 떨어진 프린스턴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사람은 비행기로, 폭스바겐과 짐은 이삿짐 트럭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장거리이다. 남편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자기가 이삿짐 트럭을 운전할 테니 나더러 돌잡이와 세 살, 남매를 데리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따라오라는 것이다. 초행길 운전이 겁나서 못하겠다는 내 말에 그는 난색을 했다. 그 많은 이삿짐을 일일이 부치고 사람은 비행 기 타고 가서 호텔에서 짐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10톤 유홀트럭을 빌려 이삿짐을 실었고 24세 엄마는 아기들을 태우고 폭스바겐을 운전했다. 길도 모르면서 초행길, 그의 유홀트럭만 따라 가야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통장을 전액 현찰로 바꿔 둘로 나누어 가졌고 아이들 간식을 내 무릎에 놓았다. 그리고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깜빡이를 두 번이면 휴게실에 들른다는 신호라는 등, 의사소통 방법을 주고 받았다.
유홀트럭과 폭스바겐 사이에 다른 차가 끼어들면 트럭이 안 보이니 자가용과 최소한의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데, 고속도로에서는 70마일이 최저 속도라 무조건 가까이만 갈 수도 없는 지경이다. 밤 운전 때는 고속도로가 온통 트럭이고 100마일 이상으로 달리는데 툭하면 내 앞으로 차가 끼어드니 같이 속도를 줄였다가 높이며 곡예사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가는 자가용도 그렇지만 앞서가는 트럭이 더 애를 썼다.
워싱턴을 지나갈 때였다. 8차선의 고속도로가 제각각 방향이 다른데 폭스바겐과 유홀트럭이 갈라섰다. 낯선 20톤 트럭이 끼어드는 바람에 폭스바겐은 유홀트럭이 출구 쪽으로 차선을 바꾸는 걸못본채직진을 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생긴 일에 넋이 나가다시피 된 두 차가 얼마 못 가서 갓길에 정차했고 양쪽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다. 어찌어찌해서 위기를 넘겼으나 큰일날 뻔했다. 덕분에 이사 비용은 십분지 일로 줄었지만, 내가 지리를 전혀 모르고 길도우미 내비가 없던 시절의 안타까운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오십 년 세월이 쏘아 놓은 화살같이 지나갔다. 반백년의 앨범을 새롭게 넘겨보니 하루하루는 길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저 영화 한 편에 불과 하다. 지난날 나는 코앞만 바라보면서 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잘 되려니 기도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고, 일이 닥치면 그제야 발등의 불을 끄다 보니 그 세월이 어느새 지나갔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쥔 분은 누구였을까, 그분은 내비를 보며 운전을 한 걸까.
나의 인생길 내비는 어릴 적에는 부모님이었고 결혼해서는 남편이었을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어른이 되는 줄 알았더니 나는 그냥 옆자리를 지키면서 도우미로 따라다닌 것 같다. 전자장치인 길도우미는 위성 과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확실한 안내를 한다는데 인생길 도우미는 위 성 대신에 어디와 교신을 할까. 인간적인 체험일까 종교일까. 인간적인 체험은 책을 많이 읽으면 될 것인데, 종교는 기도와 명상으로 말씀을 구하는 것인가. 어떤 이들은 큰일이 생길 때마다 용하다는 역술인을 찾아가기도 하니, 같은 세상에 살아도 마음 세상은 각자 다르다.
이제와 돌아보니 젊은 날에 이사하며 엉뚱한 생각을 현실에 적용했어도 별일 없었던 일이 기적 같고 감사하다. 공상과학 세상에 사는 현 실이 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올 세상을 상상해본다.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인생길도우미 내비도 나올까. 오늘도 길도우미 내비를 켜놓고 믿거라 운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