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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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내가 일본인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날 때 외할머니는 두 손을 비비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우셨다고 한다. 며칠 후, 수표교회 목사님이신 하얀 두루마기의 친할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고추 대신 숯을 바꾸어서 대문에 금줄을 걸으셨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부처님의 은혜와 자비를 고루고루 받고 태어났다.
우리 아버님은 내가 사각모를 쓰고 유치원을 졸업하던 단기 4283년 음력 8월 추석을 앞두고 문안에 사시는 친할아버지댁에 떡쌀을 갖고 가시다가 비행기 사격으로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가족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아버님을 묻고 피난을 떠났다. 한강 철교가 끊어져 인천까지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눈길을 걷고 걸어 나주역에 도착하니 머슴이 지게를 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부둥켜안고 큰 소리로 통곡을 오랜 시간 하셨고 어린 나는 엄마가 소리 내어 운다는 것이 서럽고 무서워서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나주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고 부처님이 태어나셨다는 초파일, 처 음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시망사 절에 갔었는데 사천왕을 보고 무서워서 울었다. 그때 스님이 안고 절 마당에 들어서자 울긋불긋 예쁜 등이 하늘 위에 둥둥 떠 있어 울음을 뚝 그쳤다. 할머니는 그중에 우리 가족 이름이 있는 꽃등을 검지손가락을 들어 가리켜 알려주셨지만 너무 높아서 나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엄마는 우리들의 교육을 위해서 더 큰 도시 광주로 이사를 하셨고 그곳에서는 절에도 교회도 다니지 않았다. 초등 4학년 우리는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고 집 뒷산에 있는 돈암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찬양대와 성탄절에는 성탄극 마리아 역을 했고 새벽송을 돌기도 했었다. 전차를 타고 원남동에 있는 정신여중에 입학하고 성경 시간에 기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우들과 궁금해서 기도실에 가본 적이 있었다. 십자가가 하나 걸려 있는 작은 기도실은 창문도 없고 답답하고 두려웠다. 나는 한 번도 기도실에 들어가서 참회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절도 교회도 멀어지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 안암동에 있는 교회 학생부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탄절에는 교회에서 밤을 새우고 학생회 여름 수련회에도 가고 싶었지만,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 따라가지 못했는데, 다음날 수련회 남학생 익사 사건이 생겨서 모든 일정이 취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절도 교회도 나하고는 멀어졌다.
결혼 후, 딸 셋을 데리고 의정부에서 월세를 살았다. 그 동네 주부들은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쌀과 과일을 갖고 산 위에 있는 절에 다녔다. 이웃들이 젊은 엄마도 같이 가지고 하도 졸라서 따라갔는데 젊은 스님이 “미련한 것들, 이 무거운 것을 이곳까지 들고 오지 말고 불쌍한 다리 밑 나병 환자들 주고 오지”하고 쯧쯧 혀를 차는 스님 모습에 나는 그곳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불암사 신도가 되었고 한때는 불교 신자였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동네 이웃들과 소풍 가듯 산 위 절에 다녔었다. 그러다가 서 울로 이사를 했고 나는 절에도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무신론자였는데 막내딸이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목사님 아들과 결혼을 했다.
나는 지금 다시 교회에 다닌다. 막내딸 가족들과 일주일에 한 번 만나 함께 점심을 나누는 것도 좋고, 목사님의 좋은 말씀도 듣고 성도님들도 친절하고, 사후에 천당에 간다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고, 하나님이 반겨 맞이 하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