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37
0
오월이 막 시작된 즈음 나는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죽음이 예고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뜬금없는 소식에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6개월 전엔 요양원에 면회를 갔었고 두어 달 전엔 통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미심쩍은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내일 장례식장에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절은 오월이라 천지에 생기가 넘쳐흐르고 가는 곳마다 만화방창한 데 지구의 한켠에선 고귀한 한 인간의 생명이 맥없이 사라져 가버렸다. 그녀의 여든여덟 해의 지나온 세월을 눈을 감고 되새겨 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녀의 굴곡진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도 없거니와 설령 들여다본들 지금와서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 서 섣불리 한 사람의 일생을 제단한다면 그것은 망자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착하게 순진하게 때로는 바보처럼 살았다. 지아비의 불호령에도 순종하고 자식 셋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평범한 대한민국의 엄마였다. 내 몸 망가지는 것은 알지 못한 채 병원 한번 갈 줄 모르고 살다보니 말년엔 이미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맨먼저 무릎이 탈 났고 뒤이어 허리가 아팠고 감정을 꾹꾹 누르고 견디어 왔으니 가슴에 는 화병이요 머리는 터질듯이 아프고 불면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진제와 수면제가 없으면 밤에 잠들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여려서 찾아오는 친인척들에게도 후히 대접했고 불같은 성질의 남편 비위를 맞추며 대꾸 한번 안하고 살아온 세월이 40년 이 넘는 동안, 삼남매는 다들 사회에서 큰몫을 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말년엔 모두 떠난 빈 둥지에서 혼자 남아 외로운 삶을 살아왔다. 가슴에 응어리진 서러움을 어느 누구에게도 풀어놓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외골수가 되어 갔다. 젊을 때 세례를 받았지만 끝내 종교에도 귀의하지 못했다. 아들은 너무 크고 벅차서 말 못하고 딸은 저 살기 바빠서 엄마의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 다 나와 통화하는 날은 그렇게도 서럽게 서럽게 울었었다. 나 역시 그녀를 위로해 줄 적당한 말이 생각이 안나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었다.
지나온 세월을 끝없이 되새기면서 자신의 과거를 잊지 못하던 그녀였다. 3년 전쯤 느닷없이 요양원에 입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의 며느리 말로는 약먹는 시간을 깜빡깜빡하고 먹고도 또 먹고 자주 넘어져서 그렇게 조치했다고 한다. 대부분 늙으면 약시간도 까먹기 일쑤 요 다리에 힘이 없으니 잘 넘어지는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요양원에 보내버리다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인지기능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녀였는데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순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곳은 명색이 실버타운이라는데 자유도 없고 안식도 없고 하루 세 끼 식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했고, 입소자들 70프로가 치매환자라 했고 대소변을 받아내니 역겨운 냄새가 구토를 일으키고 화장실에도 가면 앞사람이 앉아서 나오지를 않는다고 했다. 어쩌다 조금 마음이 통하는 환자와 마주 앉아 대화라도 할라치면 간병인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막아버리고 핸드폰 사용도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어느땐 정신이상인 환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목을 누를 때면 고함치고 원장을 부르고 난리가 난다고 했다. 한바탕 소동 후에는 전신에 힘이 쑥 빠진다고 했다. 내가 간만에 전화할 때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니 온몸에 땀범벅이 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기 집을 멀쩡히 놔두고 열 악한 환경에서 지내야 하는 그녀가 너무나 가여웠다. 자녀들은 좋은 곳에 모신다고 실버타운을 선택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젊은이들은 부모님을 요양원에 입소시켜 놓고 월납부금만 잘 내고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요양원에서의 생활이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딱 한 가지 그녀를 위로 해주는 시간이 있었으니 노래 부르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노래를 잘했기에 강당에 다 모여 흘러간 노래를 부를 때면 강사가 항상 그녀에게 마이크를 갖다대주고 독창을 시켰다고 한다. 다들 노래 잘한다고 찬사를 보내주던 그 시간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어느날 그 강사가 퇴직을 해버려서 크게 실망하고 노래교실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딸이 엄마를 집에 모시고 오면 하룻밤을 자고 아침이면 아들이 엄마를 입소시킨다고 했다. 2년 넘게 그런 생활을 하다보니 다시는 요양원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있자니 아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아예 말도 못 꺼내고 혼자 속으로만 곱씹고 또 곱씹어 다짐을 했다. 자식도 돈도 다 버리고 더 이상 이런 지옥같은 삶 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미련을 버렸지만 육신의 고통과 가슴속 깊은 한은 부둥켜안은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 너고 말았다. 저승에서는 어떤 삶이 펼쳐지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래도 이승에 남은 우리는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빌어본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어 이승에서의 모든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안식과 복락을 누리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그 언젠가 어느 날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그 낭낭하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이젠 그 어디서도 그녀의 애창 곡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녀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