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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추억

한국문인협회 로고 사공정숙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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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비와 함께 온다. 초여름에 내리는 비는 대지의 모든 식물에게 내리는 축복과도 같다. 나무와 풀들은 비의 세례로 왕성하게 하나의 노선인 녹색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그려간다. 하지만 여름 장마가 길어 지면 일상이 불편하고 힘들어진다. 비가 무서워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석 달 장마에도 해들 날이 있듯이 안전이 확보된 상황이면 사정이 다르다. 잠시 걱정은 접어두고 밖을 내다보며 퍼붓는 폭우를 감상하며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도 있다.
며칠간 이어진 장마에 잠깐 날이 들어 이불빨래를 널고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캄캄해 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마치 열대지방에서 내리는 스콜처럼 사정 없이 차창을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이 건물 바로 앞에 주차를 했으나 문까지 불과 10미터의 거리도 우산 없이 나가기에는 무리였다. 차안에서 한참을 기다려서 쇼핑백을 뒤집어쓰고 찻집으로 뛰어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밖과 달리 찻집 안은 시원하고 쾌적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위협하고 불편하게 했던 비는 순간 매력적인 자연의 일부로 바뀌어 버렸다. 편안하게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여름의 녹음 위로 뿌연 물안개를 날리며 퍼붓는 비의 운치를 즐기고 있었다. 2층 높이의 건물에서 유리창을 경계로 자연의 횡포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 비는 소강상태였지만 바람이 제법 불었다. 대충 청소를 마치고 책을 읽다가 소파 등받이에 턱을 괴고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실 요량이었다. 그때 유리창 너머, 사각형의 앵글 속에 거미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은 29층인데다가 앞은 건물이 없어 툭 트여 있다. 그런데 저 거미는 어디에서 왔을까. 아직 제대로 된 거미줄은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바람에 흔들리면서 스텝을 밟는 초보 춤꾼처럼 움직였다. 거미는 왼쪽으로 위로 오른쪽으로 아래로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며 위태로운 행보를 진행 중이었다. 묵묵히 매끄러운 유리창에 희미한 흔적을 그리면서 바람과 비에 맞서고 있었다. 거미줄을 쳐도 바람 에 날려 오는 작은 날벌레가 얼마나 될까 싶지만 그 희박한 확률에 제 목숨을 걸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배가 제법 통통하게 살집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 지구상에도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있지만 숲이나 풀, 낮은 층고의 집을 두고 하필이면 29층 유리벽에 매달려 살아야 하나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관찰자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고 거미는 잠시 자리를 떠나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곤 하였다. 날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는 나를 거미 역시 유리창 밖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키고 기다리는 거미의 삶이 여름 더위 와 장마에도 꿋꿋하게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얼마 전 태국에 보름 정도 체류하는 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스콜처럼 짧은 시간 동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노천온천에서 만나면 오히려 행운이었다. 편안하게 숙소에서 야자수가 도열한 골프장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일도 즐거웠다. 마치 지상의 모든 악기를 두드리는 비의 연주를 보는 것 같았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쉬는데 갑자기 남편이 베란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놀라 쳐다보니 방충망 위로 수천, 수만 마리는 될 것 같은 아니 그냥 많다는 생각만이 들 정도의 벌레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희고 긴 날개를 단 벌레가 바닥에서 위를 향해 몇 겹으로 줄 지어 오르고 방 안을 향해 들어오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날갯짓으로 펄럭였다. 작은 날벌레지만 저들의 쪽수에 우린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겁이 났다. 방 안에는 이미 허술한 방충망을 비집고 수십 마리가 들어와 날고 있었다. 우선 불을 끄고 커튼을 치고, 에어컨의 온도 표시등의 불빛도 차단하려고 에어컨까지 껐다.
날벌레의 정체는 태국어로 말랭마우, 흰개미였다. 우기의 시작을 알 리는 벌레라고 한다. 비가 내린 후 한꺼번에 땅속 개미집에서 날아올라 결혼비행을 한 것이다. 비를 맞아 촉촉해진 흙이 산란하기 좋아 흰개미 군단이 극성을 부린 것을 마침 우리가 목격한 것이다. 아침에 보니 필요 없게 된 날개만 한가득 떼놓고 개미는 사라졌다. 누구를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게 아닌 자신들의 대를 잇는 거대한 퍼포먼스에 지레 놀란 셈 이었다.
우리 집 거미와 태국의 흰개미는 모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만 났다. 장마를 매개로 인연이 닿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안전하다고 여긴 집 안은 저들에게는 위험한 공간이다. 창을 넘어 거미와 흰개미가 들어온다면 내가 그대로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다. 창밖의 비바람 이 몰아치는 곳이 저들에게는 더 나은 생존을 위한 삶의 터전이다. 내 가 지구라는 별, 이곳에 던져졌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공간에서 안간힘을 다해 날아오르고 살아간다. 창은 보기에 따라 안이 밖이고 밖이 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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