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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영자(윤선)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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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은 나는 창가에 기대어 추억을 떠올 리고 있다. 그리운 사람과 지나간 시절은 이젠 추억일 뿐이지만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그리움이란 허무한 감정을 극복 해 보려는 심리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그리움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공기처럼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을, 김소월 시인은 이처럼 아름답게 그려냈을까.
누구나 아름답고 순수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내게는 그리움에 앞서 원망과 아픔과 후회만이 가득해 차라리 외면하고 싶다.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슬픔을 지니고 살아왔던 시간이 아픔으로 다가오곤 한다.
가슴속 회한을 펼쳐놓으니 남편과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누구에게나 즐겁고 맵고 짠 세월이 있겠지만, 나는 잊고 싶은 기억만 떠오른다. 이젠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었으련만 황혼을 바라 보는 이 나이에 아픔과 그리움을 곱씹으며 되뇌고 있다.
그리움은 내 몸 어딘가에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그의 기억들이 떠오르면 숨도 고르지 않고 튀어나와 나를 아프게 한다. 때로 불평을 하며 시시비비를 따지고 살았다면, 지금쯤 애틋한 그리움으로 그를 생각하 며 지내고 있지 않았을까? 세상이 변했으니 그가 곁에 있다면 마음에 품었던 억울함을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따지고 원망해도 답해줄 리도 없기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기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현실도 망상도 아닌 기억이 혼재되어 나를 아프게 한다. 

당시 소련 비행기가 청진 상공에서 포탄을 투하했다. 방공호에서 나왔을 땐 이미 청진은 불바다가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머니는 남편을 찾기 위해 고향인 김천을 버리고 청진에서 10년 동안 살았다.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는 모아 두었던 재산을 포기하고 우리 남매를 데리고 남하할 것인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양손에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고목나무 아래에서 고심하다가 결국 입은 채로 고향을 향해 떠났다. 어머니의 결단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결단이 없었다면 해방 일주일 전에 남하했던 우리 세 식구는 지금 이북 어느 하늘 아래에서 고향을 그리며 비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맑게 개인 일요일 아침, 서대문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대로에 사람들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전쟁이 났으니 젊은이들은 속히 군에 입대 하라. 대통령이 나라를 지킬 것이니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만 흘러나왔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숙이 엄마 가 피난을 가자며 몇 마디 말을 남기고 달려갔다. 동네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피난을 떠났다.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부가 어린 자식을 키 우며 사는데 무슨 죄가 되겠느냐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소풍 가듯이 짐 보따리를 이고 부모를 따라가는 친구가 부러웠다.
6·25전쟁은 일본의 패망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청진에서 살았던, 같은 말을 하는 북한 군인들이 남한으로 쳐들어왔다고 했다. 다른 말을 쓰는 민족도 아닌, 같은 언어를 쓰는 군인들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식량 걱정을 하며 안절부절하셨다. 나는 양재기에 담아 놓은 쌀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는 어리석은 아이였다.
버클공장을 하던 어머니는 일요일이 지나면 공장 직원들 월급을 주고 한 달 먹일 음식 재료를 사들일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를 못 넘 기고 전쟁이 났다며 하늘을 원망했다. 독립문 앞, 서대문구치소에서 죄 수들이 나와 세상이 바뀌었다며 북을 치고 꽹과리를 치며 춤을 추는 이 유도 알지 못하는 나였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 덕에 무사히 성장한 나는 결혼을 하였다. 세상에 뛰어들기보다 남편에게 순종하며 그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내의 미덕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만은 엄격했다. 내가 살아갈 방도는 가정을 위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종은 하되 복종은 할 수 없다는 나름대로 자존감을 가졌다. 그는 점점 완고해졌고 매사에 단호했다. 현실은 각박하지만 아이들이 장성하면 내 고달픔을 알아주리라 믿었다. 젊은 부부가 동등하고 공평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내가 후회스러웠다.
그가 떠나던 날 새벽, 눈을 뜬 그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침대 밑에 누워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그가 매일 밤참으로 먹는 술 떡과 우유를 들고 그의 곁에 앉았다.
“아! 새벽에 먹는 이 맛을 누가 알겠나. 난 참 행복한 남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여보, 나는 매일 이리도 힘이 드는데 혼자만 행복하면 돼요?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가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60년의 세월을 순종하며 살아왔는데 그날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가 떠난 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죄스러움과 원망, 아픔이 후회로 남아 그리움이 되어, 잊고 싶지 않은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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