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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모르면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애자(충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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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이었다. 팩에 얼린 마늘을 잘라 쓰려고 과도로 윗부분을 내려치는 순간 칼날이 튕겨지면서 왼손 장지와 검지 사이로 깊이 파고 들었다.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콜택시를 불러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 가는 동안 수건 하나가 피로 젖었어도 멎지 않았다. 간호사가 살균제 두 병을 거푸 상처 부위에 들어붓고서야 피가 멎었다.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손가락 끝에 마취제를 투입시켰다. 손으로 연결된 신경을 나무토막처럼 마비시키고서야 세 바늘을 꿰맸다. 의사는 상처가 깊어 완전히 아물기까지는 2주 정도 걸려야 할 것이라며 항생제와 소염 진통제 4일치를 처방해 주었다.
집으로 들어왔으나 불과 물을 사용하지 앉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듯 칼도 마찬가지다. 손에 상처를 낸 과도로 남편이 키위 하나를 까 주었다. 키위와 치즈 두 장으로 저녁식사를 때웠으나 피부의 끈적거림을 씻을 수 없었다. 남편이 짜준 물수건으로 대충 닦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사람은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르고 산다. 서울 시청역 역주행가속페달 사건으로 죽은 아홉 명의 젊은이들도 마른하늘에서 내려친 날벼락이었다. 아침에 가족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출근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다. 퇴근길에 그들이 미친 듯 달려오는 차에 치이고 부딪쳐 목숨을 잃었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참변에 가족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고, TV 화면으로 끔찍한 참사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란 도처에 깔려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나도 눈 깜짝 할 사이에 손을 다쳐 붕대로 칭칭 감았으나 그들의 슬픔에 비하면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했다. 하지만 마취가 풀려 밤새 욱신 거리는 통증에 시달렸다. 그래도 살아서 다시 아침을 맞는 건 행운이고 축복이었다.
2주 동안 왼손 도움 없이 지내는 불편함을 겪으면서 수묵크로키화가 석창우 선생을 떠올렸다. 그는 명지대학 전기공업과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전기기사로 취업했다. 결혼도 하고 자녀들도 둔 성실한 가장이 어느 날 기계점검을 하던 중에 2만 2천 9백 볼트에 감전되었다.
그는 1년 동안 열두 번 수술을 받았으나 두 팔을 절단했다. 두 팔을 잃은 그는 목이 말라도 물컵 하나도 들 수 없었고, 화장실을 가고 싶어 도 화장실 문은 물론 옷조차 내릴 수도 없었다. 오로지 아내가 곁에서 최소한의 기본은 맡아주어야만 연명이 가능했다.
사람은 불구가 되었어도 산목숨은 살아야 하는 게 상정이다. 석창우란 남자도 살아남기 위해 의수(義手) 사용을 익혀 나갔다. 금속으로 만든 갈고리 모양의 손가락 놀림이 익숙해지자 그는 아이들 숙제로 낸 그림을 그려주었다. 보고 그렸지만 미술책 그림과 똑같아 잘 그렸다는 아 내의 칭찬에 용기를 내어 화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팔레트에 물감을 짜 서 사용하는 일이 갈고리 손으론 번거로워 서예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여명태 교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하루 열 시간씩 붓을 잡고 연습했다.
한 가지 일에 10년 동안 전념하면 프로가 된다. 프로라인으로 들어서 자 글씨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붓으로 인체 크로키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그는 붓글씨를 쓰면서 붓 다루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때문에 대상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싶으면 일필휘지로 그려냈다. 피가 도는 손이 아닌 쇠로된 갈고리로 근육질의 젊은이들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바람처럼 내달리는 사이클 경기와, 빙판 위에서 펼치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들 몸놀림에서 일어나는 생동감을 붓끝으로 살려냈던 것이 다. 크로키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자 2011 평창 동계올림픽 실사단 앞 에서도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2014년에는 소치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서도 시연했다. 그리고 2024년 초 서울패션워크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그가 그린 올림픽마크 오성기를 걸치고 워킹하는 장면을 인터넷에 올려 수많은 네티즌들을 감동시켰다. 현재 그는 세계적인 화가로 초청강의가 줄을 잇는다.
내 몸에도 칼자국이 여러 곳에 나 있다. 살아오는 동안 병고에 시달린 흔적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척추수술을 받았을 때였다. 척추는 집으로 치면 집 전체의 무계를 떠받치는 기둥에 속한 다. 이 기둥 중간이 무너져 세 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 회복실로 돌아와 닷새 동안 침대에서 똑바로 누워서 지내야야만 했다. 퇴원 후에도 한 달 동안 척추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하고 지내면서 평생을 강철과 석고로 만든 틀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생각했다. 멕시코 태생인 그녀는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척추와 골반과 다리뼈까지 으스러졌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 그리기였다. 아버지가 천장에 달아준 거울을 보고 자화상을 그리면서 세상과의 소통을 꿈꾸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으나 그녀는 한순간 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척추수술을 받고서야 칼로 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가 아파보지 않으면 남의 아픔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일 따름이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일을 겪는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 해 두 팔을 잃은 석창우 화백이나 프리다 칼로는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어제 붕대를 풀고 실밥을 뽑았다. 그리고 오늘 더운 물로 목욕하고 원고 마감에 쫓겨 책상 앞으로 돌아와 두 손으로 키보드자판을 친다. 한 치 앞도 볼 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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