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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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숲속 정자에 엎드려 펑펑 울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얼마나 여 기저기 헤매었는지 발 한 짝 움직일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자식도 낳지 말았어야 한다. 꼬물이만 없어도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고것들 꼬물거리는 걸 보면 내 빈창자라도 털어 먹여주고 싶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먹이를 구해야 한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일어나야지, 그런데 눈앞이 아슴아슴하며 잠이 들려고 한다. 안 된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건 너무 힘들어서 그냥 해본 말이다.
꼬물이가 있는데 고것들 아물거려서 어떻게 죽나. 가끔 자식 내팽개치고, 또는 이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함께 죽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죽어도 그런 짓은 못한다. 아니, 안한다. 그 건 개같은 짓이라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하지만 개도 그런 짓은 안 한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개보다 못한 자식, 개새끼라고 욕하곤 하는데 사람보다 나은 개들도 많다.
어쨌든 뭐라도 먹고 힘을 내야겠지만 점점 의식이 가물가물해진다.
이대로 조금만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남녀 등산객 예닐곱 명이 정자 위로 올라왔다. 축 늘어져 엎드려 있는데 그들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다 빈자리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중 한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뾰족한 등산지팡이로 내 눈을 찌를 듯이 겨냥했다. 피하지 않았다면 날카로운 지팡이 끝이 내 푸른 눈동자를 명중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고, 이 체구와 지금 내 행색으로는 물거나 달려들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머리는 나빠도 눈치라도 좀 챙길 줄 알아야 하거늘, 그는 다시 내 코앞 에서 지팡이로 허공을 크게 휘저으며 위협했다.
“이놈의 개새끼가 왜 여기 앉아 있어? 요즘은 어딜 가나 개새끼, 고양이 새끼들이 상전이라니까.”
“김 사장님, 왜 그러세요, 그건 동물 학대예요.”
“동물 학대 좋아하네, 이게 동물 학대야? 짐승을 짐승 대접하는 거지.”
“사장님, 요즘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시는구나. 그러다가 정말 큰 봉변 당하셔요.”
김 사장은 여자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둘러댔다. 사장 뒤에 ‘님’자 붙이기도, 존댓말 하기도 싫은 무례한 놈이다. 봉변은 김 사장이 아니라 내가 당할 판이다.
“저놈의 개새끼가 눈깔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것 좀 봐.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고 한다니까.”
나는 내가 언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았어? 내가 김 사장한테 피해 준 거 있어? 그리고 점잖지 못하게 눈깔이라뇨? 하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김 사장은 “이놈의 개새끼가 어디다 대고 함부로 짖고 지랄이야? ”하며 다시 나를 찌르려고 했다. 나는 ‘짖은 게 아니라 말한 거야. 그리고 이놈 저놈, 개새끼라고 함부로 욕하지 말아! 나도 이름이 있어, 루나라고 해’했더니 김 사장은 기어코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물론 잽싸게 피해 꼬리만 살짝 스치기는 했다. 내가 지금 몹시 지치긴 했지만, 아직 이정도 순발력은 남아 있다.
사람들은 작고 귀여운 애완견이라고 알고 있지만, 내가 이래 봬도 조상이 북극에서 썰매를 끌던 혈통의 후손이다. 긴 털 휘날리며 북극에서 썰매를 끄는 야생의 개를 상상하면, 얼마나 멋진지! 나는‘김 사장 너, 날 우습게 봤다 이거지? 개 보는 안목 좀 키워라! ’하고 말해 주었다. 개가 말하는 걸 사람들은 짖는다고 오해하지만 말이다.
여 듣지도 않는데 말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나도 나름 이런 자부심으로 산다. 숲속을 떠도는 개가 요런 깨알만 한 자존심이라도 없으면 이 험한 산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포메라니안은 보통 폼폼이라는 귀여운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작을수록 인기가 있다. 나 역시 작은 체구에 털은 연한 카페라테 색이고 눈동자는 하늘을 닮은 파란 색이다. 개에게 털은 피부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피부를 위하여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마사지하고 피부과를 다니는 것처럼, 애완견들도 펫샵에서 관리받기도 한다. 나는 엄마에게 서 부드럽고 윤기 있는 털을 물려받아 펫 관리사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관리사, 지금 생각해도 다시 열받는다. 나의 착하고 고운 언니가 학원에 다녀온다며 나를 맡기고 나가자, 관리사는 투덜대며 불 평했다. ‘얘는 털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길고 거칠어서 컷하기 정말 까다로워’하며 내 머리를 툭툭 쳤다.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또 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로 더 유명해 진 타이타닉호, 그 배가 침몰한 당시 세 마리의 개가 구조되었다고 한 다. 그런데 그중에서 두 마리가 포메라니안이었다니, 잘난 척 좀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사람도 그렇지만 개도 나 잘난 맛에 산다. 사실 포 메라니안의 인기는 미국에서도 대단하다고 한다. 미국 애견협회가 해 마다 인기 투표를 하는데 10위 안에는 항상 들어가고 3위까지 오른 적 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에서도 인기가 많다. 우리 개들도 이런 정도의 정보는 다 듣고 서로 교류하며 지낸다.
내가 나이 먹고, 기운 떨어지고, 꼬물이 출산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죽음까지 생각하다 보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나고 말도 많아진 것 같다. 사람들도 그러지 않는가. 늙으면 한 이야기하고 또 하며 잔소리하고 꼰대가 되어 간다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참,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나이 먹을수록 이렇다니까, 얘기하다가도 깜빡깜빡한다. 방금 하려던 이야기를 고개 돌리면서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루도 안 지나서 나는 엄마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동물병원 아래층으로 옮겨졌다. 내 생애에서 그때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기억 못하는 것 같은데 개들은 기억한다. 내 얼굴이 엄마의 배와 맞닿아 있고, 발은 형제의 꼬리에 올리고, 손은 자매의 등을 쓰다 듬던 순간,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워서 온몸이 간질간질 할 지경이다. 뒤엉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지 사흘쯤 지났을 때, 누군 가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끄응끙, 소리를 내고 몸을 비틀며 불쾌한 티를 냈다.
“와, 얘가 제일 이쁘네! 이 부드러운 털 좀 만져 봐. 요 코는 또 뭐야, 촉촉하고 포근포근한 게 어쩜 요렇게 앙증맞냐! ”
그러자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고객님, 그렇게 함부로 드시고 만지시면 안 되셔요. 그냥 눈으로만 보셔야지요. 이제 막 태어나신 아기시잖아요.”
나는 여자가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그렇지만 개도 함부로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물리기라도 하면 원인 제공자는 사람인 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여자는 고객님에게서 나를 조심스럽게 받아 살며시 내려놓았다. 참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수의사님 부인이 대표님이라 동물을 참 소중하게 다루시네요.” “네, 그래서 아무리 돈을 많이 주신다고 하셔도 아무분에게나 강아
지를 드리시지 않으십니다. 정말 강아지를 사랑하시고 소중하시게 여기시며 잘 케어하실 분에게만 드리셔요. 우선 여기 좀 앉으셔요. 지금 직원이 준비하시고 있으시니 곧 커피가 나오실 거예요.”
교양있는 것도 좋지만 존댓말을 너무 헤프게 남발하여 듣기에 불편했다. 본인 스스로 존대하고, 존댓말을 겹쳐서 사용하고, 심지어 커피 가 나오신다니, 커피가 혼자서 걸어 나오시려나. 정말 지나가시던 개님이 웃으실 일이시다.
“제가 정말 잘 키울 수 있어요. 저에게 파세요.”
“고객님, 강아지는 파시는 게 아니시고 입양하시는 겁니다.”
“100만 원이라고 들었는데, 맞지요? ”
“어머 어머, 그건 보통 그러신다는 것이시고 이 아기들은 좀 다르셔요. 얘들은 포메라니안 순종이셔요. 얼마나 건강하신지 털 반지르르하신 것 좀 보세요. 그리고 태어나신 지 사흘도 안 지나셨어요. 물론 종합 건강검진도 다 마치셨고요.”
“그러니까 얼마를 더 내야 해요? ”
고객님은 살짝 짜증이 난 것 같았고 대표님은 손가락 세 개를 우아하게 쫙 펴서 보여주었다.
“30만 원이요? 그럼 130? 아이 대표님, 너무 비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나를 입양한다면서 서로 흥정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130만 원을 불렀고 고객님은 100만 원에 사려고 에누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물병원 아래층은 펫 사료와 용품을 팔고, 미용 도 하고, 어린이집처럼 반려동물을 맡아 돌봐주고, 훈련도 시키고, 게 다가 동물을 은밀하게 사고파는 장소였다. 그리고 펫샵의 대표가 수의 사의 아내였다. 비로소 수의사가 왜 그렇게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는지 깨달았다. 시세가 100만 원이 훌쩍 넘고, 이런 강아지가 일곱 마리나 생겼는데 어찌 부드러운 손길로 다루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공평하시게 반반씩 나누셔서, 115에 하시어요.”
고객님이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어 대표님에게 내밀었다.
“고객님, 이쪽 거래를 잘 모르시는구나. 저기요, 현금, 현금만, 현금 거래만 되시어요.”
“내가 입양은 처음이라, 현금이 없는데 어쩌죠? ”
“계좌이체도 되시어요. 요기, 요기로 이체해주시면 되시어요. 현금 영수증 발행은 아니 되시어요. 이체하시면 우리 직원이 오셔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실 거예요. 예쁘시고 귀하신 강아지 어머님이 되심을 온 마음 다하시어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나는 고객님에게 입양되었다. 고객님에서 나의 소유자, 그러니까 새엄마가 된 여자는 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마셨다. 나는 새엄마가 나에게 커피를 흘릴까 조마조마했다. 게다가 새엄마가 쓰다듬을 때마다 길고 뾰족한 손톱이 내 피부를 스쳤다. 나는 많이 아프진 않았으나 예민해졌다.
잠시 기다리니 직원이 왔다.
“고객님, 아직 아기니까 아주 소중하게 다루셔야 해요. 우선 필요한 것들을 챙겨 드릴게요. 이동할 때 필요한 케이지, 개모차, 방석, 이불, 기저귀, 배변판, 목줄, 영양제, 사료, 간식, 장난감, 모자, 양말, 우비, 기 본 옷들, 식기, 물병, 강아지 계단, 등등 다 하면… 여기 보세요, 계산서 예요.”
“이렇게나 비싸요? ”
“어머나, 포메라니안 입양하면서 이 정도도 생각 안 하셨어요? 아주 기본만 말씀드린 건데. 용품은 카드 할부도 되니까 이왕이면 한꺼번에 들여놓으세요. 그리고 입양 백일 기념, 돌 기념, 이런 이벤트 상품도 있으니까 많이, 많이 애용해주세요.”
나는 새엄마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새엄마는 포장하는 걸 기다리면서 계속 나를 쓰다듬었고 그때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고객님, 여기 포메라니안 보증서와 함께 용품 포장돼 나오셨습니다.” 나를 증명해주는 보증서와 포장되어 나오신 내 물건과 함께 나는 케이지에 담겨 자동차를 탔다. 가는 동안 차가 흔들리고 꿀렁일 때마다 속이 메슥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 다. 엄마의 체온이 그리웠다. 형제, 자매도 보고 싶었다. 어떻게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 지난 신생견을 가족으로부터 떼어 낸단 말인가. 나는 엄마, 엄마, 라고 불러보았다. 그러자 눈물이 찔끔 삐져나왔다. 이어서 목구멍을 통하여 뭔가 울컥, 올라왔다. 결국 나는 토하고 말았다. 턱언 저리가 미지근하고 축축하게 젖어 기분이 몹시 나빴다.
*
“이게 뭐야, 너 토했니? 아까부터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가 나더니만, 자동차 시트에 냄새 배면 어떡해! ”
새엄마는 집에 와서 케이지를 열어 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토한 것보다도 자동차에 냄새 배는 게 더 걱정스러워 보였다. 나는 기운이 없고 낯도 가려서 케이지에서 나오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새엄마는 나를 꺼내어 물티슈로 입을 닦아주고 방석 위에 앉혔다. 멀겋게 보이는 물을 먹으라고 주었으나 입맛이 없어서 조금 핥다가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내가 개 사 오지 말라고 했지! 저거 똥 싸고, 오줌 싸고, 냄새나고, 털 날리고, 짖어대고,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
“아잉 아빠, 내가 잘 치울게. 환기도 잘 시키고 내가 돌볼게요. 걱정 마요, 아빠. 얘도 내 딸이다, 가족이다, 생각해 줘엉.”
딸의 아양에 새아빠는 기세가 좀 누그러졌다. 나는 진짜 아빠가 누군 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다. 수의사가 기뻐한 걸 보면 내가 포메라니안 순종인 건 확실하다. 갑자기 나는 새아빠에, 새엄마에, 언니까지 생겼다. 그리고 근사한 집도 생겼다. 마루는 반들반들 윤이 났고 집 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엄마랑 형제, 자매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립고 보고 싶었다.
다행히 새엄마와 언니는 나에게 잘해줬다. 루나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언니가 달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달이라니, 나도 이름이 맘 에 들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언니는 나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끼는지 황송할 지경이었다. 잘 때도 꼭 껴안고 자고 애지중지 소중하게 돌봐줬다. 그러나 새아빠는 나만 보면 발로 차려고 했다. 특히 언니가 없을 때는 노골적으로 나를 구박했다. 새아빠가 나를 처음 보았을 때 했던 말, 똥, 오줌, 냄새, 짖는 것을 조심하여 나는 배변도 빨리 가렸다. 짖지 않으려고 꾹꾹 참았지만 털 날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포메라니안이 다른 종보다 털이 많이 빠지긴 한다. 사람도 마음대로,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개도 그렇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창밖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몽땅 떨어져 빈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때였다. 드디어 내 운명이 바뀌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언니가 무슨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온 집안 이 파티를 하고 아주 난리가 났다. 사실은 언니가 전교 1등을 해서 새엄마가 언니와 약속한 애완견, 바로 나를 선물한 것이었다. 참, 말이 나왔 으니 하는 말인데, 나도 애완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반려견 이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한다. 강아지도 함께 사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특히 새아빠 같은 사람에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애완견이라고 불리는 건 절대 사절이다. 개도 자기 미워하는 것 다 알고 내가 뒤끝도 꽤 있는 편이다.
새엄마는 언니 공부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열정을 공부에 쏟았다. 언니가 학교에 가면 새엄마는 학원이나 과 외 선생님과 전화로 상담하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다음은 언니 친구의 엄마들과 통화하며 어디 학원이 좋다더라, 어느 족집게 선생님을 꼭 만나야 한다, 누구누구는 성적이 딸려서 우리 과외 팀에 넣어 줄 수 없다, 등등, 정보를 주고받았다. 새엄마의 위력은 언니가 공부를 잘하는 만큼 파워가 대단한 것 같았다. 새엄마의 시계는 언니의 성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언니가 공부를 잘하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 고등학교는 최상위권만 가는 아주 대단한 학교라고 했다.
물론 처음엔 나도 함께 기뻐했다. 언니 주위를 뱅뱅 맴돌며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언니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나를 꼭 껴안고 입에 뽀뽀 를 퍼부으며 좋아했다. 새아빠도 그 큰 체구로 거실을 겅중겅중 뛰어다 녔다. 새엄마는 말할 수도 없을 만큼 흥분했다. 그런 새엄마를 보니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형제, 자매는… 마음이 짠하고 따뜻했던 체온이 그리웠다.
그런데 살짝 고민이 되었다. 이 집에 온 지 벌써 2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고, 그럭저럭 잘 적응하여 살고 있는데 언니를 따라 기숙학교로 갈 생각을 하니 염려스러웠다. 그래도 언니가 있으니 뭐, 어디든 괜찮겠 지, 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새엄마와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느라고 몹시 바빴다. 옷과 책과 이불 등을 넣을 커다란 캐리어와 노트북을 새로 사고, 멋진 교복도 마련했다. 언니가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으니 아주 세련되고 의젓해 보였다. 공연히 내 어깨까지 으쓱했다.
이제 내 짐도 싸야 할텐데, 나도 가져갈 짐이 언니 못지않게 많았다. 특히 포근한 이불과 옷과 장난감, 꼭 가져가고 싶은 물건들이 있었다. 나는 먹는 건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으나 잠자리는 좀 까다로웠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민망하고 같잖은 생각이었다. 개가 개답지 못하게 잠자리씩이나 이러쿵저러쿵 따지다니, 아무튼 그땐 그랬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제 분수 모르고 날뛰는 것들, 사람이나 개나 닥쳐 봐야 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안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 가. 속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개에 대한 속담이 꽤 많이 있다. 아마 짐승 중에 가장 많이 속담에 등장하는 것이 개일 것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제 버릇 개 줄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개밥에 도토리.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
이것 말고도 많았다. 그런데 개가 그리 좋은 이미지로 표현되지는 않은 듯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맘에 안드는 속담은 ‘달 보고 짖는 개’였 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어리석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니, 몹시 기분이 나빴다. 더구나 내 이름이 바로 루나 아닌가, 내가 나를 보고 짖어대다니….
나의 어리석음은 바로 다음 날 증명되었다. 나는 뭘 챙겨 가지고 갈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언니는 내 짐은 싸지도 않고 나를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그러더니 다음 날 일어나서 내 입에 뽀뽀 한 번과‘잘 있어’ 라는 말 한마디만 쿨하게 남긴 채 떠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새엄마와 언니가 통화하는 걸 들으면 언니는 기숙학교에서 그저 공부, 공부만 하는 듯했다. 강아지 따위는 이미 잊은 것 같았다.
언니와 이별한 후에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새엄마는 안아주지도 않고, 산책도 안 시켜주고, 외출했다가 늦게 돌아와서는 물과 사료도 안 주고 그냥 자버린 적도 있었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듯이 개에게도 견권이 있는데… 배고픈 것보다도 버려지고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더 서러웠다. 나는 점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소화도 안 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새아빠는 내가 눈에 띄기만 하 면 발로 차려고 했다. 나는 새아빠가 들어오면 침대 밑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개도 사람처럼 우울증에 걸린다는데, 나도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았다. 입맛마저 없었다.
나는 언니와 산책하던 공원과 강변길과 숲을 떠올렸다. 그런 곳에 가본 지 벌써 몇 달이 지나갔다. 언니는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나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는 듯했다. 방학 때도 특별 수업한다며 집에도 오지 않고 영상 통화 한 번 해주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 다더니,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올려보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따뜻하고 눈 부신 햇살, 산들산들 상쾌한 바람, 싱그런 풀 내음, 색색의 예쁜 꽃들, 그리고 무엇보다 산책길에서는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우린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며 몸도 스치고, 킁킁거리며 서로 냄새를 맡아 보고, 운이 좋으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드물지만 그중에는 마음에 드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봐야 항상 아쉽게 헤어져야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설레고 기분 전환이 됐다.
나는 애견 카페에도 가봤다. 강아지 전용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음료도 마시고 간식도 먹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귀염받는 자세를 잘 알고 있었다. 머리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앞발은 가지런히 내밀고 앉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다. 이때 표정은 새초롬하게, 누가 먹이를 주어도 대뜸 달려들지 말고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은 후 야금야금 먹어 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이런 리즈 시절, 전성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어느 날은 햇살이 손짓하고, 어느 날엔 바람이 날 부르고,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초록 향기는 나를 유혹했다. 나는 너무 우울해서 머리를 벽에 부딪히며 몸부림치기도 했다. 언니가 떠날 때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봄이 지나고, 여름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니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졌다. 새엄마가 창문을 열면 나는 그 틈새로 바깥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더 이상 이렇게 무료하게 살 수는 없었다. 나는 틈틈이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점심 무렵이었다. 집 안에는 새엄마의 친구들이 방문해 있었고 초인종 소리에 새엄마는 현관문을 열고 내다봤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켰는지 냄새가 아주 죽여줬다. 그러나 어차피 나에게는 주지도 않을 것이고, 새엄마가 계산하려고 카드를 가지러 간 사 이에 나는 살며시 문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배달원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 잽싸게 따라 타서 구석에 처박혔다. 배달 원이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터질 듯했지만, 배달원은 개 따위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폰만 들여다보았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배달원보다 먼저 밖으로 뛰어나갔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바람결이 얼마나 달콤하고 흙내음이 얼마나 구수한지, 거기다가 햇볕과 초록 향기는 더 말해 뭐하랴! 사람에게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증이 있는 게 아니다, 개에게도 그런 목마름이 있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내가 누구? 내가 누구라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래 봬도 북극에서 썰매를 끌던 뜨거운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다. 긴 털 휘날리며 꽁꽁 얼어붙은 얼음 위를 달리는 야생의 개, 정말로 멋지지 않은가! 나는 썰매를 끌던 조상의 후손답게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사방을 둘러보니 숲이었다.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이게 피톤치드구나, 나무 향기가 그윽했다. 나는 길을 벗어나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밟히는 나뭇잎의 촉감과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정겨웠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아까 맡았던 짜장면 냄새가 떠올랐다. 나뭇잎을 조금 핥아 보았다. 쿰쿰하고 퍼석했다. 그런데 나뭇잎 사이로 동글동글하고 작은, 빨간 열매가 보였다. 먹어 보니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허겁지겁 먹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잠자리에 까다로운 내가, 이불도 없이 나뭇잎 위에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
개들이 짖는 소리가 소란스러워서 잠에서 깨어났다. 하룻밤이 지난 건가, 햇살에 눈이 부셨다. 아침인 것 같았다. 개들이 나를 빙 둘러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이 말을 걸어왔다. 멍멍멍!
-넌 누구냐? 어디서 왔어? 행색을 보니 버려진 지 얼마 안됐구나?
-버려지긴, 누가? 내가 탈출했지.
-네가 나왔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왜 탈출했어? 학대받았냐?
-직접 학대받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버려지고 학대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너무 답답해서 살 수가 없어서 자유를 찾아 탈출했어.
-별 이상한 개 다 보겠네. 자유? 그게 뭔데?
-너흰 자유도 모르냐? 무식하게.
-무식이건 유식이건, 너는 우리 구역으로 들어왔으니까 규율을 따라야만 해.
-자유도 모르면서 뭔 규율 타령이냐?
-어쭈, 사람이랑 좀 살아봤다고 제법 똑똑한 척하네. 어쨌든 넌 식량을 구해서 우리가 정한 나무 밑으로 가져와야 해.
-왜 그래야 하는데? 식량은 뭐할 건데?
-우리에겐 대장이 있어. 대장이 관리해.
-그럼 대장은 우리에게 뭘 해주는데?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싫으면 이 구역을 떠나면 돼.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으나 개도 사람처럼 완장 차는 거 좋아하고, 완장질하는 것들이 있구나,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달리 갈데도 없어서 이 구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먹이를 구하는, 잠자리를 마련하는, 지팡이로 때리려는 등산객에게 대처하는, 여자 등산객이 먹이도 잘 주고 예뻐한다는 등등, 숲속에서 살아가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보내는 SOS 신호도 가르쳐주었다.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목청을 높여 외치라고 했다. 멍멍 머엉멍 머어엉멍 머 어어엉멍 머엉멍 멍멍… 되풀이하여 소리치라고 했다. 나는 머릿속에 잘 입력해 두었다.
나는 숲속을 뛰어다니고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거나 먹는 생활에 점점 익숙해졌다. 숲속엔 먹거리가 넘쳐났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원래 그렇다고 했다. 열매도 많고 등산객도 많아서 부지런하고 눈치 빠르게 움직이면 배고플 일은 없었다. 나는 애완견이나 반려견이 아닌 홀로서기, 루나로서의 독립심을 기르며 조금씩 성장해 갔다. 숲속 생활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매일 갇혀 지내며 주는 사료만 받아먹는 것보다는, 내 먹이는 내가 구한다는 주체적인 삶이 훨씬 의미 있었다. 게다가 새엄마 덕분에 내가 텔레비전을 많이 보아서, 친구들이 아는 게 많다고 부러워할 때는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장과 똘마니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멀리서 보이면 빙 돌아서 다른 곳으로 가곤 했다. 대장은 내가 몸집이 작고, 힘도 없어 보이고, 숲속 출신이 아니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장은 나름 의젓한데도 있어서 그러려니 하겠는데, 똘마니들 이 더 웃기지도 않았다. 같잖은 것들이 더 출신을 따지며 무게를 잡고, 뻐기고, 윽박지르곤 했다. 어딜 가나 꼭 저렇게 꼴값을 떠는 것들이 있었다. 저런 사람들을 텔레비전에서 많이 봤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마주 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그래도 여기서 발붙이고 살려니 일정한 분량의 먹이를 상납하는 건 어기지 않았다.
내가 숲속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겨울 동안 지낼 집을 마련했다. 등걸에 동굴처럼 비어 있는 공간은 최적의 장소였다. 우리는 그 안에 나뭇잎을 수북하게 채워 넣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요령을 터득했다. 아직 한겨울은 아니나 꽤 추운 날씨가 이어졌다. 때때로 운이 좋으면 목도리나, 심지어 덥다고 벗었다가 벤치 위에 그냥 놔두고 가는 등산객의 점퍼도 주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똘마니에게 빼앗겼다.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내 몸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소화도 안 되고, 한낮에도 덜덜 떨리고, 자꾸 졸려서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일도 귀찮고, 마침내 헛구역질까지 했다. 나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종일 누워서 자다가 깨다가 하며 지냈다. 하루는 대장이 집에 들렀는데 나는 일어나기도 힘들어서 그냥 누워 있었다. 그랬더니 같잖은 똘마니들이 짖어대고 난리가 났다. 빨리 일어나 대장에게 인사하라고 윽박질렀다. 대장은 똘마니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그 리고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 새끼 가졌지?
-…….
대장은 한숨을 푹 쉬더니 나가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어떻게 새끼를 가지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곰곰 생각 해 보니 짐작이 가는 수캐가 있긴 했다. 그게 그거였구나, 아무도 나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물었다.
-너 중성화 수술 안 했어?
-그게 뭔데?
-너희 주인은 널 사랑하지 않았구나.
-아니, 언니는 날 정말 사랑했어.
-그런데 널 만나러도 안 오고 중성화 수술도 안 해 줬냐?
-…….
-텔레비전에서 보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야. 그런 걸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거야.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진짜지.
나는 공부 좀 많이 했다고 깝죽대며 잘난 척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혈통 있는 포메라니안 순종이라며 우쭐대고, 사람들과 살며 텔레비전 좀 봤다고 으스대던 내가 꼭 그 꼴이었다. 완장 차고 갑질하던 똘마니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쨌든 몸조심해. 뱃속에 아가가 들어 있으니까.
그날 이후 몸이 차츰 더 무거워지는 걸 보니 임신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먹거리는 줄어들었다. 귀여운 다람쥐나 청설모도 밤과 도토리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종종 마주하게 되었다. 지난가을, 밤과 도토리, 나물 등을 배낭이 터져나가도록 주워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숲 어귀에 붙어있는 현수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여기에, 밤과 도토리는 야생동물에게 양보하세요, 라고 적혀 있어.”
“어디? 흥, 양보 좋아하시네. 밤과 도토리나무를 동물들이 심었냐? ”
“교양 좀 갖추세요. 밤과 도토리는 숲속 동물들의 겨울 식량이잖아요.”
“굶어 죽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동물 식량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몰랐다. 야생동물이 겨우내 먹을 수 있도록 밤과 도토리를 주워가지 말라는 뜻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나마 따뜻한 한낮엔 몸이 무거워도 먹이를 찾아 살살 돌아다녔다. 다행히 대장은 나에게 식량 상납을 면제해 주었다. 대장은 역시, 이 구역의 우두머리답게 현명하고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내 먹이는 내가 구해야 했고 출산 후 먹거리도 준비해 놓아야 했다. 나는 나만의 비밀 저장소를 점찍어 두고 출산 후를 위한 식량을 조금이나마 숨겨 놓았다.
그러다가 아무런 예감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친구들이 모두 외출한 사이에 꼬물이가 쑥,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양막을 찢고, 탯줄을 자르고, 모유를 먹이는 과정을 오롯이 해냈다. 요 꼬물꼬물하고 예쁜 걸 세 마리씩이나 주시다니! 나는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찔끔 삐져나왔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눈물이 나온 김에 나는 아주 조금 더 울었다. 절대로 슬퍼서가 아니라, 그냥 뭉클한 것, 뜨거운 뭔가가 내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오늘, 먹이를 구하려고 숲속 정자까지 갔다가 무례한 김 사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눈을 찔릴 뻔한 모욕까지 당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비밀 저장소에 숨겨 놓은 식량을 꺼내 먹을 수밖에 없다. 내가 잘 먹어야 우리 꼬물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으니까. 그런데 비밀 저장소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분위기가 싸하다. 나는 숲속 깊숙하게 들어가 나만의 장소인 나무 아래를 헤쳐보았지 만… 없다. 여기 맞는데, 아닌가? 옆, 또 옆, 옆에, 또 옆 나무에도 없다, 없다, 없다, 누구냐? 벼룩의 간을 빼먹는 나쁜 놈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데 멍멍 머엉멍 머어엉멍 머어어엉멍 머엉 멍 멍멍… 긴박한 외침이 들린다. 이건 우리 구역의 SOS이다. 집에 가 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든다. 집에 무 슨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 게 틀림없다. 누가 우리 꼬물이를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제 내린 비로 미끄러운 나뭇잎을 헤치고, 쓰러지고 나뒹굴면서도 달렸다. 그런데 넘어지면서 유리 조각을 밟은 것 같다. 숲에 놀러 왔다가 쓰레기도 그렇지만 유리병 까지 버리는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 더구나 깨진 술병을 그냥 버려두고 가는 개만도 못한 사람 새끼들, 너희는 꼭 천벌을 받고 말리라!
드디어 저기 집이 보인다. 그런데 대장과 똘마니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다. 저것들이 식량을 훔치고 내 꼬물이까지? 내가 오늘은 정말이지 못 참는다, 대장이고 뭐고 그냥 들이받을 거다. 양아치 같은 새끼들, 개나 사람이나, 이런 깡패 새끼들이 꼭 있구나! 나는 온 힘을 다해 대장을 향하여 돌진했다. 똘마니들이 말릴 틈도 없이 나는 그대로 대장을 들이 받았다. 그러나 대장은 끄떡도 하지 않은 채 버티며 서 있고 대신 똘마니들이 달려들었다.
똘마니가 발로 배를 냅다 차는 바람에 나는 나뭇잎 위로 나가떨어져 뒹굴었다. 함께 살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내가 잠깐만 다녀온 다고 꼬물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유리에 찔린 발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장과 똘마니들이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개나 사람이나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 좋은 친구를 옆에 둬야 하는 것도 개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대장은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고 발까지 구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디 갔다 왔어? 자식들 버리고 너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거 아니었어?
-뭔 소리야? 우리 꼬물이를 어떻게 버려? 내가 양아친 줄 알아? 숨겨 놓은 식량 찾으러 갔는데 다 도둑맞고, 등산지팡이에 눈 찔릴 뻔하 고, 깨진 유리병에 발까지 다치고….
나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울고 싶었으나 꾹 참고 당당하게 맞섰다. 다시 똘마니들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데 똘마니가 나의 다친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이게 내 약점을 눈치챘구나, 비겁하게 발을 공격하겠다 이거지? 나는 아픈 발로 똘마니를,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걷어찼다. 똘마니는 내 발길질을 피해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와서 말했다.
-옆 구역 개들이 먹이가 부족하니까 우리 구역을 습격했어. 네가 숨긴 식량은 다 빼앗겼어. 그래도 꼬물이는 우리가 지켜냈어.
나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친구들이 꼬물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 마리 모두 무사했다. 친구들은 먹이를 잘게 씹어서 꼬물이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꼬물이는 입을 날름날름 벌려 잘도 받아먹었다. 꼬물이를 보니 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대장이 들 어와 나뭇잎 짓이긴 것 같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찐득한 걸 찢긴 발 에 발라줬다.
-곧 피가 멈출 거야. 먹거리를 좀 가져다 놓았으니 당분간 나돌아다니지 마. 그리고 겨울 잘 넘기고 봄이 오면 다시 식량 상납하도록 해. 곧 봄이 올 거야, 그때까지만 잘 견뎌 봐.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전에 주웠는데 똘마니에게 빼앗겼던 파란 점퍼를 꼬물이가 덮고 있었다. 눈시울이 시큰했으나 꾹 참았다. 나는 이제 엄마니까, 한가하게 눈물 따위나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봄이 오 면 나는 다시 숲속을 뛰어다니며 먹이를 구하고,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꼬물이에게 가르칠 것이다. 세상은 힘들고 슬픈 일만 계속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배우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좋은 친구를 사귀고 개 보는 안목도 길러야 한다는 것을… 텔레비전이 아닌 경험을 통하여 잘 교육 시킬 것이다.
나는 친구들이 가져다주는 먹이를 받아먹었다. 구운 순살 치킨, 개들에겐 최고의 영양식이고 구하기도 힘들어 처음 먹어 보는 먹거리였다.
-대장이 주고 갔어. 많이 먹고 힘내라고.
-그리고 봄이 오면, 네가 똘마니라고 부르는 이 구역 수호대에 들어 오라고, 대장이 널 추천했어. 받은 건 꼭 갚아야 하는 거라고.
-수호대가 밖에서 보초를 설 테니까, 이젠 푹 쉬어.
나는 꼬물이를 비집고 그 사이에 누웠다. 서서히 꼬물이의 체온이 전해졌다. 이 체온 덕분에 올겨울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꼬물이가 내 가슴으로 꼬물거리며 파고들었다. 나는 점퍼로, 바람 한 줄 기 들어올 틈새 없이 꼬물이를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리즈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꼬물이를 꼭 껴안고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보초를 서는 수호대의 나뭇잎 밟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꿈속에서도 아련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