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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황성혁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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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제? ”
핸드폰으로 차분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토요일 오후 부산에 출장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고등학교 동기 동창 박상수이다. 감정원에서 평생을 일한 뒤 고위공직자로서 이십여 년 전 퇴임한 친구이다. 퇴임한 뒤에도 일을 계속했다. 나이가 여든이 넘도록 전국 구석 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감정 업무를 해 왔다. 노느니 움직인다고 말은 했지만 좁은 국토와 부족한 주거시설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돈도 제법 벌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말을 계속했다.
“어제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했다.”
나는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남의 일처럼 한마디를 툭 던졌다.
“참 내, 그 친구들이 나를 췌장암이라카는 기라.”
나는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췌장암이라고? ”
“그렇다 카네. 말기라 칸다.”
“그 친구들이 누고? 의사들이 그란다 말이가? ”
“그렇다 카니까.”
나는 할말을 잃었다.
두어 해 전에 우리는 가까운 동기 하나를 췌장암으로 잃었다. 그는 어느 날 나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말이 적은 친구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말기라 칸다.”
나는 췌장암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는 계속했다.
“반 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끼라 칸다.”
사형선고였다. 참담한 마음으로 나는 물었다.
“그래 일이 이리 되도록 내삐리 두었다 말이가? ”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어조로 남의 말하듯 또박또박 대꾸했다. 
“췌장암이라는 것이 자각 증상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손도 쓰기 전에 말기로 진행되는 기라.”
그는 전력회사에 평생 몸담았고 고향에서 지사장까지 지낸 잘나가던 친구였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 그는 띄엄띄엄 계속했다.
“수술을 할래? 항암 치료를 할래? 하고 의사가 묻는 거야. 수술을 해도 그렇고 항암 치료라는 것도 그렇지. 그저 몸에 고통만 줄 뿐인기라.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한 육십 년 써먹으라고 하느님이 만들어 준 것인데 팔십 년 가까이 써먹었으니 말썽이 날 만도 하잖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수술도 안 하고 항암 치료도 안 받는다. 진통제로 고통만 줄이면 서죽을 때까지 살겠다고 했다.”
나는 불쑥 물었다.
“그라모 우찌 되는기고? ”
“한 육 개월 정도 연명이 가능하다 카니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한 기간이다 생각했지. 반년 더 살면서 내 인생을 정리할라 칸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저토록 대범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일어섰다. 
“가끔 니한테 들를테니까 맛있는 거나 사주라.”
그날 나는 그를 끌고 사무실 건물의 이층에 있는 횟집으로 가서 제일 맛있는 것을 골라 푸짐하게 먹였다. 내 목구멍에는 눈물이 차올라 회가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는 천천히 맛있게 시킨 것을 다 먹고 일어섰다. 그뒤 몇번 더 그 식당에서 회를 먹고 귀향하듯 그는 이세상을 떠났다.
“성일이도 그거였잖아? ”
나는 할말이 없어 이년 전 떠난 친구의 일을 꺼냈다.
“바로 그거다. 그 친구는 수술도 거부하고 항암 치료도 거절했지. 그라고 반년쯤 살다가 갔제? ”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래 자네는 우찌 할 거고? ”
나는 그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마치 소주 한잔 권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가 분위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의 죽음에 관한 대화가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그걸 받아들여야지 우짜겠노.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나 스스로 나의 가장 좋은 모습을 유지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모두가 이 일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할까 생각 중이다.”
억장이 무너져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친구는 지금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농담하듯 이야깃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시시덕가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한술 더 떠서 그 절박한 친구에게 뻔뻔스럽게도 ‘우찌 할기고? ’라고 물었다. 대폿집에 앉아서 소주 한잔하며 다음 안주를 주문하듯 그의 죽음을 두고 노닥거리고 있다.
나는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내가 지금 말이다, 자네 곁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두 시간 뒤 부산행 기차를 예약해 놓았어. 부산에서 일요일 월요일 일보고, 월요일 밤기차를 타고 상경하기로 되어 있다. 이건 오래 전에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 도저히 변경할 수가 없다. 내가 화요일 아침 병실로 갈게.”
그는 여전히 느긋했다.
“아니 아니 바쁜데 됐다. 안 와도 된다. 자네 목소리 들었으니 이제 됐다. 일 봐라. 내한테 전혀 신경쓸 것 없다.”
통곡이 터질 것 같았다. 대신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아, 자네는 지금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어. 그것을 말하면서 어째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가? ”
그는 여전히 느긋했다. 
“모두 당하는 일이 아이가? 걱정하지 마소.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야.”
전화를 끊고 나는 허둥지둥 서울역으로 향했다. 경황 없는 사흘을 보냈다. 기차 타고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자료 점검을 하고 회의 준비를 했다. 부산에서 우리 쪽 회의 참가자들과 함께 일요일 하루 종일 준비회의를 했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잠들 때까지 다음날 할 회의를 생각했다. 월요일에는 하루 종일 회의가 계속되었다. 중요한 회의였지만 그 사흘 동안 나는 허둥거렸다. 마치 급한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듯 일정에 내 몸을 맡겼다. 어서 끝내고 상수의 일을 좀 조용히 깊게 짚어 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평생을 같이 한 친구이다. 그가 떠난다. 그렇게 성실하고 그렇게 따뜻하고 심성이 깊던 그가 떠난다. 그런데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기 와서 허접스런 밥벌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산에서의 일정을 취소하고 바로 그의 병실로 가서 최소한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언가를 찾아야 했던 것 아닌가.
나는 회의 끝나기가 무섭게 저녁 기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기차 속에 서 그의 삶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친구야, 나는 우째야 되노. 성일에게 했듯 그저 죽기 전 맛있는 점심 이나 몇 끼 사주고 마는 것가? 주말에 교외나 나가서 서성거려 볼까? 아니면 니가 잘 아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함께 돌아볼까? 친구야, 니를 그냥 이렇게 아무렇게나 보낼 수가 없다. 아아 소중한 친구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고.
화요일 아침 열 시, 나는 그의 병실에 들어섰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동창회 부부모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그의 아내가 나를 맞았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병실 안에 있는 소파에 나를 앉혔다. 너무 울어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웬일입니까? ”
내가 숨을 죽이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 금요일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입원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식음을 딱 끊었습니다. 쌀 한 톨 안 먹고 물 한 방울 안 마십니다. 나흘째입니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며칠간 그와 함께 단식을 해 온 것처럼 머리가 텅 비어왔다.
아 그랬던가? 그의‘받아들인다’는 말이 그것이었던가?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식음을 끊은지 나흘째인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편안해 보였지만 가끔 바늘에 찔린 듯 움찔거리며 찡그렸다. 그의 아내는 허겁지겁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토요일에는 두 아이들을 불러서 하루 종일 일을 정리했습니다.” 그의 컴퓨터에는 그가 하고 있던 일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진행하고 있던 부동산 감정 업무를 아들 딸의 도움을 받아 중단 시켰다. 모든 일들이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하나하나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의 고향에 있는 선산을 처분하기로 작정했다. 마침 개발지역에 들어 있어 값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겼다. 아들에게는 선산을 파는 일과 거기에 있는 할 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묘의 이장을 부탁했다. 그는 이미 용인 공원묘지에 자신과 그의 아내가 들어갈 것까지 포함해서 합장묘지 셋을 확보해 두었다.
“객지에서 바쁜 너희들이 때마다 시골까지 오갈 수도 없으니 가까운 곳에 내가 자리를 잡아 놨다. 곧 시골 내려가서 이장 준비를 하고 월요일에는 이장을 마치도록 해라.”
아들은 국군 장교 출신이다. 상조회가 잘 조직되어 있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적은 경비로 하루 동안에 말끔히 이장을 끝냈다. 주 말 동안 그는 그의 재산을 정리했다. 그는 여기저기 제법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하나 집어서 자식들의 동의 아래 나누어 주었다. 아내의 여생에 대한 준비도 깔끔하게 마쳤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컴퓨터에 기록했다. 일요일 저녁 자식들이 돌아가고 둘이 남자 그는 그의 아내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준비끝났제?”
모든 것을 혼자서 그가 좋을 대로 결말짓고는 죽을 준비를 끝냈다는 것이다. 아내는 따지고 들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야. 이렇게 끝내는 데 가 어디 있어. 나는 뭐야? 도대체 당신에게 나는 뭐야? 당신 정말 내가 당신 따라 순장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듯이 편안했다.
“여보는 내가 평생 사랑한 단 한 사람의 여인이야. 나는 여보를 위해 서도 이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누구에게도 걱정 끼치지 않고 추한 꼴 남기지 않고 마치 은하수로 여행 떠나듯 떠나는 거야.”
그녀는 피눈물을 쏟았다. 평생을 같이했지만 그는 언제나 따뜻하고 정다운 남편이었다. 그렇게 모질 줄은 몰랐다.
“그래도 물이라도 좀 마셔야 할 거 아니야. 잠깐이라도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는 것 아냐.”
“하루 더 있으면 어떻고 하루 먼저 떠나면 어떠나? 어차피 떠나는 거 추한 꼴 보이기 전 나는 당신의 예쁜 남편 모습 그대로 떠나려는 거야.”
나는 그녀의 긴 넋두리를 끊고 물었다.
“그래 그동안 사람들은 좀 다녀갔습니까? ”
“일요일 두어 분, 월요일 대여섯분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해서 저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빠 가 몇 사람에게 직접 전화를 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저러니 병문안이라고 왔던 분들이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잠깐 앉았다가 그냥들 돌아갔습니다.”
“자네 왔는가? ”
그가 나를 불렀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내 귀에 우레처럼 들렸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분위기였다. 나는 의자를 들고 가 그의 침대 머리에 앉았다.
“온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네. 잠을 잘 자더구만. 그동안 자네 얘기 부인에게서 잘 들었네.”
“그래, 잠을 많이 자지. 잠을 잔다기보다 그저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하는 거야. 이 아까운 시간을 잠만 자면서 보내다니.”
남의 말하듯 중얼거렸다. 병실은 건물의 모퉁이에 있어 동쪽과 남쪽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아주 밝았다. 나는 노랗게 변한 그의 눈을 건너다보며 들고 간 건강음료 박스에서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 마셔 보라고. 요즈음 골프장에서 많이 마시는 거라네.”
그는 드링크를 그의 입술에 댄 뒤 머리맡 탁자에 내려놓았다.
“맛지네.”
나는 그의 대꾸가 섭섭했지만 마시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자네와 우리 집사람의 대화는 내 다 들었네. 잠이 든 것 같은데 온몸의 신경은 살아 있어. 정신은 꿈속에 있는데 신경은 깨어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다 들으며 혼자 온갖 참견을 다 한다네.”
나는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래 한 사나흘 쌘 단식을 했으니 몸속에 있던 나쁜 놈들은 몽땅 쫓겨 나갔겠다. 인자 가쁜한 몸으로 털고 일어날 때가 됐구나.”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 의사는 뭐라 카드노? ”
그는 그윽히 나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뭘? ”
“자네가 이라고 있는 거를.”
“이기 최선의 길이라고 내가 결심했는데 의사가 뭐라 카겠노? ” “그런데 자네의 몸은 꼭 자네 혼자만의 것은 아니잖는가? ”
“그라모 누구 건데.”
“자네의 삶은 관련 있는 모든 사람과 인연을 맺고 있지 않는가? 자네 에게 많은 것을 베푼 이 세상에 자네가 갚아야 할 빚도 많지 않나? 그런데 계속될 수 있는 인연의 끈을 어거지로 잘라 내겠다는 것은 하느님 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의사는 그런 개인의 편파적 결심에 동의해서는 안 되는 것 아이가? ”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독단 같아 보이지만 이건 내 주변 사람들과 오랫동안 이미 마음속으로 합의된 깊은 약속 같은 거라네.”
그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아이다. 그건 자네의 독선이다. 아직도 건강하고 정신이 말짱하고 책임진 일이 많은데. 그 책임으로부터 함부로 도망칠 수 없지. 내일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의사는 자네의 독선에 동의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살 만큼 살았어. 멋지게 살았어. 정말 만족하게 살았어. 나는 이제 한걸음 껑충 뛰면 저쪽 언덕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와 있다네.”
“그 건너 뛴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가? ”
“태어나서 여기까지 온 것, 그리고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 그기 주어 진 인생의 전부 아이가? ”
“자네 언제 종교에 입문했던가? ”
“와? ”
“저쪽 이쪽, 넘어간다는 것은 내세를 염두에 둔 종교적 표현 아이가? ” 
“거기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떠난다는 뜻이다. 삶을 끝낸다는 뜻이다. 다른 뜻이 없다.”
나는 그의 잔잔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깨어 그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부산에서 일은 잘 봤나?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물기가 가신 갈라 터진 목소리로 짤막짤 막하게 그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계속 꿈을 꾼다. 좀전에 잠깐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꿈꿨는지 아나? ”
나는 그저 그를 건너다보았다.
“김창식 선생님 꿈을 꿨다. 우리 국민학교 육학년 담임선생님.”
 눈물부터 나왔다. 우리들의 하늘 같은 선생님.
인민군이 삼팔선을 깨고 쳐내려온 것은 국민학교 오학년 때였다. 다행히 우리가 사는 도시까지 들어오지는 못하고 뒷산까지 왔다가 물러 갔다. 그 처참한 동포들 사이의 전쟁은 마치 몇백 년 계속된 것처럼 우리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지만 실제로 일년 만에 끝났다. 놀라운 것은 그 북새통에도 우리가 학교를 가지 않았던 기간은 반년도 되지 않았다는 일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교육을 계속하는 데 신경을 썼다. 학교는 미군 병원으로 징발되었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요정으로 쓰던 건물에서도 공부했다. 그 건물은 우리 반 친구의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건물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남은 몇 개의 방은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던 곳이라는 흔적은 없었다. 편안한 교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미군의 사무실로 내주어야 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빈 공간만 있으면 어디건 교실로 사용했다. 모두들 학교 문을 닫으면 목숨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는 듯 아이들의 공부부터 챙겼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설운동장에 판잣 집 가교사가 지어졌고 우리는 거기서 육학년 공부를 했다. 그것도 9월 부터 시작되던 학제가 3월로 바뀌면서 6학년 과정이 6개월로 단축되었 다. 아이들의 공부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른들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일년 과정을 반년 동안에 차질없이 마치게 했다. 겨울방학도 없었다. 어두운 아침 일곱 시에 학교에 등교해서 저녁 일곱 시 깜깜해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가서 새벽 공부를 한 뒤 싸간 도시락 아침을 학교에서 먹고, 점심은 집에서 동생들이 갖다 주었다. 그때 김창식 선생님은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젊은 선생님이었다. 군 입대가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약했다. 늘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가르칠 때는 열정적이었다. 선생님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라가 어렵고 우리가 사는 것이 곤궁하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공부해야 한다. 폐허가 된 이 나라를 여러분들이 보란듯이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여러분의 성스러운 의무이다.”
가교사의 판자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은 신문지를 발라 막았다. 선생님은 전등의 촉수가 낮은 것이 걱정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시력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력이 약해지는 것은 국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그때 공부했던 학생들의 시력은 낮은 촉수의 전등 때문에 평생 우리나라 평균 이하로 떨어졌다. 선생님이 전깃줄과 전등을 구해 와서 추가로 직접 선을 연결하고 전등을 달았다. 마지막 전등을 달고 전등을 켠 뒤 책상에서 내려오다 선생님은 책상 아래로 쓰러졌다.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붙들고 한 몸이 되어 울었다.
“내가 작년에 선생님이 사실 댁을 마련해 드렸다.”
나는 감동했다.
“아, 큰일을 했구나.”
“아니 내가 사드린 것은 아니다. 우리 고향에 낡은 집을 가지고 계셨지. 그런데 마침 해변에 조망이 좋은 아파트의 삼층에 집이 하나 나왔어. 그래서 낡은 집을 괜찮은 값에 팔고 적당한 값으로 아파트를 사도록 도와드린 거야. 차액이 좀 생겨서 그 돈으로 선생님의 여생을 편하게 사실 수 있게 되었다네.”
그는 생기를 찾아 제법 길게 이야기했다.
“그래 부산인가 어데선가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은퇴를 하신 뒤 혼자 사셨잖아. 아흔이 넘으셨을텐데. 자네가 큰일을 했구나. 정말 고맙다.”
“나는 내 생애가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라 믿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김창식 선생님은 우리에게 영웅이셨지. 우리의 정신적인 뼈대를 육학년 육개월 동안에 만들어 주셨어. 선생님 때문에 우리 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반 아이들과 특별히 구별이 되었어.”
“나는 선생님과도 작별을 했다네.” 
“아, 선생님이 다녀가셨나? ”
“아니 내 마음속으로.”
그는 다시 가물가물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금방 깨어나서 잠깐 꾸물거리더니 비식이 웃으며 엉뚱한 이야 깃거리를 꺼냈다.
“자네 그것 생각나나? ‘중대가리 빠마 해주소.’”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멋쩍어졌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지금 자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
“왜 그런지 나는 지금 그런 생각만 난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은 걸어서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학교가 가까워 지면서 가게들이 많은 거리를 지나가게 된다. 그 중에 여자들 머리 손질 하는 곳이 많았다. 미군과 한국 군인들이 득실거리는 거리에 밤거리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을 위한 가게들이었다. 가게에는 ‘파마넨트’라고 적어 놓았다. 그는 느닷없이 가게의 문을 드르륵 열고 그의 빡빡 깎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중대가리 파마해 주소’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침 일찍 가게를 열자마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쪼무래기’가 약을 올린 것이다. 약이 오른 주인 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쫓아 나왔다. 그는 불알이 떨어지도록 도망을 쳤다. 물론 나도 그의 곁에 있었다.
“그때 그기 와 그리 재미가 좋았지? 평생 그런 재미는 없었다.” 
“세상에 다른 재미가 없었잖아. 또 자네가 있었으니 그런 능청도 부렸지. 아니 그런데 지금 이 판에 그기 생각나나? ”
“몰라, 생전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다.”
나도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는 다시 잠들었다.
나는 실망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 그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이 아니겠는가. 거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번뇌나 공포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처절한 모습을 보리라 기대했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앞둔 모습은 어쩌면 머지않아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한 준비에 참고가 될 수 있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침전물을 걸러낸 맑게 고인물 같았다. 얇은 피부를 말끔하게 발라 놓은 두개골에 눈만 빛나는 학 같았다. 금방 끼룩끼룩 울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나는 차츰 그의 시간이 다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그의 몸의 리듬에 나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야위어 가는 심장 고동에 나의 심장 박동을 맞추어 갔다. 부인은 내게 점심을 먹고 오라는 눈짓을 했지만 나 는 모르는 척했다. 그가 먹지 않는데 내가 먹을 수 없지. 중요한 것은 한 순간이라도 더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나는 다짐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문병객이 오기 시작했다. 그가 특별히 전화한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편에서 맺었던 추억, 끊을 수 없는 인연들이 찾아와 그 인연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병객이 올 때마다 나는 응접 소파로 물러나 앉았다.
방문객들과의 대화는 짧았다. 그는 깨어 있는 동안 입으로보다 눈으로 그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의 상대방은 그것을 알아들었다. 그것은 그가 설정한 무대였다. 그는 인연 깊은 사람들을 무대로 초대했고 그것은 장엄한 작별 의식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누워 있는 사람이 유지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견뎌내지 못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문병객들이 돌아가면 나는 그의 침대 옆 의자로 돌아갔다. 그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꼭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이 어려웠던 대학 시절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 어렵던 결혼생활, 생활이 차츰 풍요롭게 바뀌던 빛나는 시절을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갔다. 숨쉬기도 어려 운 그의 말을 줄이기 위해서 그가 운을 띄우면 내가 말을 이었다.
“한평생, 그래 참 복받은 인생이었다.”
“그건 자네의 심성 탓이다. 아름다운 자네의 가족, 학교 친구들, 직장 동료들, 누구하나 자네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
그는 가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냈다.
“이렇게 꼼짝 않고 누워 있으니 정신이 맑아진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 밥을 굶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카던데.”
“내 의지 탓인 것 같다.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뜻대로 완성된 형상이 되어 가지고 눈앞에 하나 하나 또렷이 줄을 선다. 아쉽거나 후회될 일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보아도 자네는 너무 독선적인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쓴 대꾸에 그는 그저 웃었다.
“이거 봐라. 나는 지금 발가벗은 기분이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알 몸으로 대낮에 사람 많은 광장에 나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도 그런 꿈을 가끔 꾼다. 그때마다 부끄러워 옷을 찾아 헤매지 않았나? ”
“그런데 부끄럽지가 않아. 벗은 것이 시원하고 자연스러워, 아주 자유스러워.”
“희랍 신화의 그림을 보면 그렇지 않더나. 신들은 모두 벗고 있지. 인 간들만 덕지덕지 껴입고 다니지 않더나. 이건 자네의 죽음에 대한 체험 이야. 자네의 이 소중한 체험은 자네를 깨우쳤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이만하고 일어나게. 그리고 자네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 사는 사람들의 삶도 깨우쳐 주게.”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는 딴소리를 계속했다.
“나는 내가 숨을 거두면 나의 육신을 화장해서 뼛가루를 아무 곳에나, 잘하면 고향 바닷가에 뿌려 주었으면 했다. 가볍고 자유스럽게.”
“아니 자네가 나서서 공원묘지에 자네 묘터를 잡았다며.”
“그건 내가 아니야. 나의 장례는 남아 있을 사람들이 결정한 거야. 죽은 뒤 나의 육신은 이미 내 것이 아니야. 그들 편할 데로 정하도록 했어. 버려진 육신이 무슨 의미를 갖겠나? ”
한 문병객이 돌아가고 나서 잠깐 눈을 붙인 뒤 그는 또 입을 열었다. 
“자네 아나? 참 이상한 일도 있다. 아주 밉고 보기 싫던 친구들이 눈앞에 나타나는 거야. 그들을 줄지어 세워 놓고 나는 한 명 한 명 끈질기게 따져 보았다. 그들의 어디가 미운지? 왜 미운지? 왜 그들이 내게 모질게 구는지? 되돌아보기 시작했어. 그런데 답이 쉽게 나오더라. 간단해. 내가 그들에게 지나친 생색을 내었거나 그들에게 모질게 굴었거나 그들에게 미움을 살 일을 했던 거야. 그들은 단지 거울이었어. 나의 미움이 그들에게서 반사되어 내게로 되돌아온 것뿐이야. 그런 결론이 나 오자 마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나? 그들이 한 사람 빠짐없이 웃음을 띠고 부드러운 말을 건네며 내게 다가오는 거야. 순식간에 미운 사람이 없어져 버렸어. 안 이상하나? 이제 나한테는 미운 친구, 보기 싫은 친구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 지금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화해한 사람들이가? ”
“꼭 그런 거는 아이고 뭔가 이쪽에 남긴 것이 있는 인연의 끈이 풀리지 않은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지.”
‘나도 자네와의 악연이 덜 풀린 사람 중에 하나라 말이가? ’나는 거의 입에까지 다다른 말을 가까스로 막았다. 그럴리 없지만 또 그러면 어떠랴.
“그래, 그 친구들과 화해를 했나? 전화라도 한번 해 주었나? ” “화해를 했지. 그러나 전화를 한 것은 아니고 내 마음속에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인자 모든 것이 행복하게 끝 났다.”
“북 치고 장고 치고 혼자 노는구나. 그러게 다시 이세상으로 돌아오는 거야. 멀게 느껴지던 친구들, 못된 친구들 다 용서하고 모두 멋지고 따뜻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 보자고.”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다른 병문안 객이 있어 나는 소파로 물러났다.

저녁 다섯 시가 문병인들의 퇴실 시간이다. 그는 네 시 반쯤 되자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읽었다. 이제 이쪽에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우리의 인연도 끝났다. 그는 한마디도 작별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그를 잊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으며 나와의 잊을 수 없는 작별 의식을 마쳤다. 잘 가게. 친구야. 나도 얼마나 더 이 세상에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자네를 두고 두고 기억할걸세.

나는 일어섰다. 그의 아내가 병원 출구까지 따라왔다. 병실에서 차분한 자세를 유지하던 아내는 밖으로 나오자 흐트러졌다. 눈물은 끊이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나의 얼굴도 눈물로 덮였다.
‘우십시요. 마음껏 우십시요. 며칠 안 남았습니다. 울 만큼 우시고 그를 편안하게 보내십시요. 그가 떠난 뒤 더 울지 마십시요.’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따독거렸다. 병원의 출입구에서 드디어 그녀는 주저앉았다. 그녀가 억눌러 왔던 슬픔과 절망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도 그녀 앞에 퍼질러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 신경쓰지 않고 통곡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모질 수가 있습니까. 평생을 같이 산 사람 앞에서 눈을 벌겋게 뜨고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으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건 자살이 아닙니다. 자살은 남의 눈을 피해서 하는 짓입니다. 그 는 당당하게 소신껏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지 모르지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사람의 이기심일 뿐입니다. 평생 그렇지 않던 사람이 어째 마지막 순간에 저토록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
“이기심이 아닙니다. 부처님 같은 이타심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 다. 그가 세상에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사랑입니다.”
나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엘리베이터까지 데려갔다. 그녀의 몸은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처럼 흐트러진 채 흐늘흐늘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엘 리베이터의 문이 닫힌 뒤 나는 엘리베이터가 그의 병실이 있는 층에 도착할 때까지 층 표시등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병원을 떠났다.

다음날 김창식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와? 박 사장에게 무슨 일이 있나? ”
나는 할말을 잃었다. 나이 드신 분에게 그의 일을 그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몸이 좀 좋지 않습니다.”
“와? 무슨 중병인가? ”
“예. 아주 안 좋습니다.”
“갑자기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는데 지난 며칠간 여엉 전화를 받지 않는구만.”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선생님은 어째 편안하십니까? ”
“내사 나쁠 것이 없지. 그저 편안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지.”
“목소리가 참 편하게 들립니다.”
“박 사장이 집을 옮겨 주어서 정말 생활이 밝고 편해졌다네. 나이 들 면 큰 이사하지 말라고 하더라마는 낡은 집 정리하고 작고 깨끗한 아파트로 옮겼더니 몸에 새 피가 도는 것 같다네. 어째 여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원.”
그쯤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박 사장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췌장암이라고 카네예.” 선생님이 크게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아차차, 췌장암이로구나. 그것 피해갈 수 없는 악질이지 않나? ” “그런데 이 친구가 췌장암 확진을 받은 뒤 곡기를 끊고 물 한 방울 안 마십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저러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야기해줘서 고맙네. 내가 이 나이에 병실에 얼굴 내밀기도 그렇고 장례식에도 나가기가 거북한데 어떻게 박 사장 과 작별을 하지? 전화도 받지 않으니.”
“어제 선생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저희들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평생 우리의 삶에 균형을 잡아 주고 계십니다. 작별하실 것도 없고 그냥 그 친구를 가슴에 간직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친구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 나 스스로 저승길에 한발 내딛고 있는 주제에 남말할 것 없지.”
“선생님에게 하찮은 죽음을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 특별한 의미를 갖고 태어나듯이 죽음 또한 저 마다 숭고한 의미를 갖지 않겠나? 하찮은 죽음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일세. 전화 끊네. 건강하게 지나세.”
나는 전화를 끊으며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인사드렸다.
“예 선생님, 가끔 전화 올리겠습니다.”
그 주일 금요일 내 휴대전화에 그의 메시지가 떴다. 나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지하는 형식의 자기 사망 통지서였다.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종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개의 작은 종이 낮지만 울림이 긴 여운을 내 귀에 남기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잘 가게. 친구야, 내 고귀한 친구야.
며칠 뒤 그의 부음을 들었다. 나는 그의 빈소에도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그와의 소중한 작별 의식을 이미 마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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