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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미희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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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되었지만 더운 기운은 그 열기를 쉽게 내려놓지 않았다. 기상청에서는 올해의 더위가 백 년 만에 찾아온 더위라고 했다. 게다가 아주 길어서 추석 전날인데도 반소매 옷을 입고 나서야 했다. 공항 대기실에는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하다. 새벽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도 여행을 떠나는 인파는 긴 행렬을 이루었다. 명절 연휴에 며느리로서 여태 꿈도 못 꾸던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 덕분 이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노릇이라 마음은 편치 않다. 저 많은 사람이 설마 모두 고아는 아니겠지? 나는 의자에 앉아서 눈으로 미송과 규린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미송과 규린은 면세백화점에서 산 물건을 찾느라고 물품 찾는 곳에 길게 줄을 서 있다. 새벽이라 공항에 있는 면세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면세 물품 찾는 창구마다 규린과 미송은 돌아다녔다. 둘은 대기 의자에 앉아 쇼핑 꾸러미를 풀어 포장재는 버리고 내용물만 챙겨 정리 하더니, 미송이 팬티와 브래지어를 규린은 잠옷을 내게 내밀었다.
“이렇게 야한 속옷 난 못 입어.”
“너희 남편이랑 잘 때도 중복 입지 말고 야한 옷 좀 입어. 해주야 그 리고 너 일본 가면 옷부터 좀 사자. 몸매도 예쁜데 그게 뭐야. 해외에 가면서도 중복을 입고 가냐? 내가 남자라도 바람피우겠다.”
규린은 내가 입은 생활한복에 질색한다. 난 평소에 개량 한복차림이다. 시원하고 편했다. 그녀들은 한복 바지를 보며 중복이라며 놀렸다. 남편은 내가 생활한복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실루엣이 드러나는 치마 나 반바지 차림으로 나서는 것이 나도 싫었다. 철마다 유행에 맞춰 옷을 사는 일이 어려웠다. 시어머니도 결혼 초에는 “넌 젊은 애가 예쁘게 꾸미고 다닐 일이지 노인네처럼 하고 다니냐? ”며 타박을 하곤 했다.

미송이 선물한 그물로 팬티를 보기가 민망하여 가방에 쑤셔 넣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거울에서 낯선 여자를 만났다. 거울 속의 여자는 여름 사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나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름 내내 먹는 일을 멀리하고 술로만 보냈다는 걸 시커먼 얼굴이 말해 준다. 불혹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라는데,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수분이 하나도 없는 건조한 얼굴이 마주 보고 있다. 내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평정심을 무너뜨렸다. 해외여행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집으로 가서 남편을 어떻게 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른다. 아직도 나 자신과 싸우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 지리멸렬한 나를 인정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20년 동안 쌓은 믿음이 무너지는 것은 단 10분이면 족했다. 남들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내겐 세상이 무너지는 무게로 다가왔다. 견고한 성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대단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미가 지나다니는 작은 구멍만 있으면 저절로 무너져 내린다. 우리 가정의 평 화나 남편에 대한 대단한 신뢰도 사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망가질 수 있었다. 여태 그런 작은 낌새를 애써 모른 척한 내가 미련하고 바보스러웠다.
여행도 문제 해결을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까지도 감정은 파도를 탔다. 어느 순간 내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감정대로 행동하는 일. 감정이 자제가 되지 않고 괘씸하고 분함이 사그라지지 않으면 술을 찾았다. 남편이 술을 숨기면 나는 규린의 집으로 가서 밤새 찔끔거리며 술을 마시고 새벽에 건너왔다. 화를 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의미가 없었다. 나는 몸을 학대하는 일로 보냈다. 미송과 규린이 자학하지 말라고 하여도 내 귀에는 그녀들의 충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바보라는 생각만으로도 나를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름을 시작할 무렵에는 아이가 없는 여름을 즐겁게 보낼 계획에 들 떠 있었다. 아이가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의 패닉상태에서 아직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농도가 옅어져야 하는 데 나는 반대로 더 나빠졌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용서를 하든지 포기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남편만 보면 참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왜 나여야 하는 거지?  다른 여자들처럼 참거나 용서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남편 때문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때문에 화가 났다. 아직도 그 일은 다른 사람의 일처럼 생소하고,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규린과 미송이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휴대폰도 꺼두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피하고 싶었다.
밤마다 퇴근하는 남편을 보는 것도 지루하고 짜증이 났다. 매일 그 일을 시비 삼아 싸울 수도 없었다. 규린이 찾아와 여권을 보자더니 요즘 엔화도 싼데 일본이나 다녀오자고 했다. 추석연휴가 5일이나 되니 안성맞춤이었다.
“어차피 명절날 시댁에도 안 갈 거잖아. 이현수 그 인간에게 복수하는 방법의 하나야. 같이 가자.”
규린은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인간과 왜 사니 나처럼 당장 이혼하지, 하며 역설적으로 남편의 편을 들었다. 남편과 싸움은 일방적으로 내가 졌다.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내가 미안하다고 하고 입을 다물면 끝이었다. 미송은 참고 사는 내가 늘 바보라고 놀렸다.
내게 과외받으러 오는 학생들은 모두 쉬게 했다. 아이가 방학 동안 어학연수 떠나는 시기에 일이 터져서 아이와 뉴질랜드 간다면서 그만 두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집에서 수학 과외를 했다. 처음엔 중학생만 가르쳤는데 그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다녔다. 고등학생 들은 학교에서 야간 자습을 끝낸 10시가 넘어서도 왔다. 방을 두 개나 공부방으로 사용하고 거실에도 나와서 문제를 풀자 남편과 아들 시하의 공간이 안방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밤늦게 집에서 수업하는 것은 무리가 되었다. 옆집에 사는 규린은 아파트 상가에서 미송과 피아노학원을 했다. 그녀들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만 받았다. 밤에는 학원이 비어 있었다. 그녀들의 배려로 나는 피아노학원에서 밤에 과외수업을 했다. 아이가 돌아오고 개학을 해도 나는 더 이상 수업을 할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규린과 미송이 자주 불러냈다.
고등학교 동창인 규린은 결혼하고 우리 아파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규린은 그때 이혼 후였다. 나는 아이가 겨우 돌이 지났는데, 규린은 아 이가 1학년이었다. 규린의 아들이 입던 옷과 장난감 책까지 다 물려받았다. 나는 그 아이 공부를 좀 봐주고 싶었지만 강남으로 학원을 보냈다. 세종 청사에 근무하는 그녀의 전남편은 서울에 일이 있어 출장을 오면 아이를 보러 규린의 집에 들르곤 하는데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다. 규린의 남편 인상은 참으로 선하게 생겼다. 그런 사람과 뭐가 안 맞아 이혼했냐는 질문에 규린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그 인간 찾아오는 것도 보기 싫어서 집 팔아 버리고 이사할까 했어. 우리 친정에서 사준 집이잖아. 내가 왜 피하나 싶어서 그냥 눌러살았어. 여덟 살이나 많은 그 사람이랑 결혼할 때 난 첫 남자였잖 아. 아, 그 왜 있잖아. 가난한 고시생들 합격하면 옛날 애인 버리고 부잣집 딸이랑 결혼하는 거. 딱 그 케이스가 나더라고. 옛날 애인과 계속 만나고 있더라고. 상조회니, 동창회니, 동기회에 들어서 매일 늦고 휴일에도 나가잖아. 그쪽 공무원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지 뭐. 알고 보니 그 인간은 그런데도 안 나가는 꽁생원이었다나. 이혼하고 책임감 하나는 있어서 양육비는 꼬박 보내주데. 월급이 오르면 양육비도 오르고. 그래봐야 애 학원비도 안 되지만. 난 서른에 이미 인생이란 별로 재미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어. 재혼할 생각은 아직 없어.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여고 시절에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나는 규린과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남편도 규린과 미송과 가까이 지내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미송의 남편은 사업가여서 출장을 자주 간다. 미송의 시부모는 미국에 살고 있어서 아이 둘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고 1년에 반은 미국에 가서 지낸다.
돈 많은 부모가 있는 미송과 규린은 씀씀이가 나하곤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재혼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규린이나 요조숙녀처럼 지내는 미송이가 부러웠다. 여고 동창이었으나 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전공하고 예고보다는 인문계에서 수시로 대학을 가는 전략으로 우리 학교에 다녔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친해지고 싶었다. 내가 그녀보다 나은 것은 공부를 잘했다는 것뿐이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보니 그것은 자랑거리도 뭐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제일 싫은 게 수학이라고 했다. 수학처럼 명쾌한 답이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답이 똑 떨어지는 세상. 나는 세상의 이치도 수학문제처럼 정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풀어도 풀어도 세상살이는 미궁이었다.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나 자신에 관계된 일이면서도 타인과의 관계였다.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다가가는 일이 두려웠다. 일단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도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뒤에야 나 혼자 미친 듯이 날뛰었다. 블로그에서의 이상한 글귀, 이상한 문자, 내가 조금만 눈여겨봤으면 가볍게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나는 규린과 나란히 앉았다.
“해주야 이제 너도 좀 너 자신에게 투자하면서 살아. 화내면 너만 손 해야. 나도 그때 왜 신중하게 생각 못했는지 많이 후회되더라. 뭐니 뭐니 해도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거야. 이제부터 널 위해 살아. 너 엄청 답답한 거 너도 알지? ”
창밖에는 바람이 부는지 구름 이동이 매우 빨랐다. 어떤 것도 머뭇거리지 않고 지나간다. 내가 낭비하고 있는 시간도 구름처럼 흘러갔다. 서로 엉키었다가 빠르게 변하는 구름을 보는데 현기증이 났다. 내 인생도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렇게 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나를 가두고는 이제 그것 때문에 나 혼자 가슴을 치는 것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바르게 처신하며 살았다고 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규린아, 여태 나는 날 위해 뭘 해본 적이 없어. 지금도 내가 잘하는 짓인가 막 후회가 돼.”
“나도 이혼할 땐 단순해서 모 아니면 개, 이렇게 밖에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인생이 수학 문제처럼 풀면 답이 나오는 게 아니란 걸 네가 더 잘 알잖아.”
규린은 혼자 사는 10년 동안 많이 성숙했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 속에서 규린에게 열등감이 들기도 했다. 규린이 명랑해서 아픔이나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종교도 없는 그녀는 나더러 절에 가서 절을 하며 속에 든 열을 가라앉히라며 청계사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는 커녕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차라리 청계산을 올랐다. 35도가 넘는 무더위라 산에는 등산객도 없었다. 무성한 초록 내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땀에 푹 젖어서 내려 오곤 했다.
여름은 길고 악착스러웠다. 뉴스는 날마다 최고기온으로 전력 소비량을 갱신했다고 보도했다. 기업은 휴가를 늘리고 가게는 문을 닫았다. 이상 기온 때문에 이상한 범죄가 늘어났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더위 때문이라며 여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열대야의 밤에도 에어컨도 켜지 않는 방 안에 갇혀 있었다. 남편은 시원한 거실로 나오라고 성화였다. 남편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으면 답답해서 가슴을 쥐어 뜯어야 했다. 목과 겨드랑이에 땀띠가 났다. 피가 나도록 긁었다. 팔이나 목에 울긋불긋하게 깊이 상처가 패이는 쾌감이 견디는 일이라 여겼다. 언젠가는 산산이 흩어져 시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 자 신의 한계점에 닿기 위해 감정을 참고 참았다. 해결책이 아닌 줄 알면 서 그 순간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는 술이었다. 참을 수 없는 밤이면 술을 마셨다. 남편도 말라 갔고 나의 몸도 말랐다. 남편을 서서히 말려서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보다는 내가 먼저 지쳐가고 있었다.
명절날 남편만 남겨 두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나름대로 통쾌한 일 이었다. 아이는 전날 밤 친정에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착한 사위, 좋은 사돈이라며 감격해했다. 새벽 4시에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서 나오는데 남편이 물었다. 남편의 얼굴도 나 못지않게 심하게 상했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저러다 자신을 못 이기고 자살이라도 하면 내가 얼마나 후회할까 하는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갔다. 자살을 하려면 내가 해야지 하는 반감이 생겼다. 남편 스스로 초래한 결과였지 만 나는 그 일이 실수라고 믿고 싶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설령 들켰어도 거짓말이라도 해야지. 그 여자와는 사랑이 아니었다고 변명이라도 했으면 내가 덜 비참했을 것이다.
“어디 가? ”
“일본.”
“내일이 추석인데? ”
“내일이 추석이라서 가는 거야. 내가 당신 집에 가서 목을 매고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가는 거야.”
낮은 목소리로 이죽거리고 나왔다. 이제 시댁도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갈 작정이었다. 명절날 집에 있으면서 시댁을 안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와 남편이 같이 가자고 사정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서 위악을 떨고 와야 할 것이다. 규린이 여행을 제안한 것이 현명하고 고맙게 여겨졌다.
나리타 공항에 내리니 겨우 오전 8시 반이었다. 일본도 덥기는 마찬 가지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들만 따라다녔다. 그녀들은 휴대폰으 로 길을 찾고 택시를 불렀다. 나는 한국에서도 그런 걸 할 줄 모른다. 우린 하코네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규린과 미송은 도시락을 먹었다. 나는 뒷자리에 혼자 앉았다. 미송이 물과 도시락을 들고 와 내 곁에 앉아 다 먹는 것을 보고 제자리로 갔다. 나를 마음을 다해 주는 두 여자를 보고 있으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하코네의 노천탕은 아담하고 작아서 우리 셋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맞춤이라며 깔깔거렸다.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하는데 비가 내렸다. 머리는 시원한 비를 맞으며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앉아 그냥 이대로 눈감고 싶었다. 집착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남편도 나도 놓아버리고 싶어졌다. 백 배, 천 배의 절을 해도 가라앉지 않던 마음이 아주 조금 편해졌다. 쏟아지는 비에 모든 것을 씻겨 내리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비우기로 했으니 내 안에 있는 분노여 더는 싹을 틔우지 말아라.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미송이 나를 껴안고 같이 울었다. 미송의 피부는 희고 고왔다. 규린이 운동으로 관리된 몸매 라면 미송은 자연적으로 희고 부드러운 피부였다. 나는 미송의 감촉이 싫어 슬그머니 팔을 빼냈다.
“얘네들이 스트레스 풀자고 일본까지 와서는 하는 짓 봐라. 미송이 넌 또 왜 그래?”
규린이 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미송에게 물을 뿌렸다.
“2년 전에 우리 남편도 바람을 피웠어. 그때는 못 살겠더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잖아. 해주야 인생은 정답이 없어. 네가 이혼하겠다면 몰라도 이쯤에서 네가 잡은 끈을 조금 풀어 줘.”
“그 얘길 왜 이제 해? ”
규린이 펄쩍 뛰며 화를 냈다.
“말하면 니가 어쩔 건데? ”
미송의 목소리에는 담담함이 실려 있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남의 이야기인 양.
“너도 말했잖아. 이혼하면 자기만 손해라고. 그런데 내가 왜 이혼해. 이혼도 안 할 거면서 동네방네 소문내리? ”
“쟤가 저렇게 크레믈린이라니까? 어쩜 미송이 쟤는 나한테도 말 안 하냐? ”
규린이 화가 난 듯이 말했다.
“평생 말하고 싶지 않았어. 자랑거리가 아니잖아.”
미송은 우리 남편만은 아닌 줄 알았다. 그것은 남편을 믿어서가 아니라 일이 터졌을 때 내가 감당할 일이 두려워서 아예 그쪽으로 생각을 안 하고자 했다. 그렇게 나에게나 남편에게 주문을 걸면 그렇게 될 것이라 여겼다. 막연한 두려움을 이기는 나의 방식이었다. 그래도 사건은 터졌고 나도 모르는 내 안의 광기와 싸웠다. 못 견디게 답답해서 혼자서 집어던지거나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미쳐 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두려웠다. 남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을 거라 여겼던 그런 참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나 자신에게마 저도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 나였다. 하루하루가 건성으로 살았다.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일종의 불안한 날들이었다.
미송은 이성적이어서 어느 한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서 충고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완벽한 이중생활을 한 내 남편만큼이나 얄미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우기다가 결국에는 인정하고야 마는 초라함을 그녀는 알까. 아니 그녀는 그 심정까지 다 안다는 표 정과 말투까지 가지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치부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니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규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솔직한 편이다.
“너희 부부관계부터 개선해야 해. 여태껏 너희 집에선 네 목소리 한 번 안 들리더라. 이현수 그 인간 소리만 들리고. 이제야 네 목소리가 들리겠군. 그래봐야 어디 소리는 몇 번 지르기는 했겠어. 혼자서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자기 가슴이나 치고 말겠지.”
규린은 옆집에 살아서 우리 집안 사정을 더 잘 안다. 그녀는 먼저 겪은 것뿐만 아니라 더 지혜로웠다.
“미송아, 너는 그 분노를 어떻게 이겨냈니? ”
나는 이혼을 한 규린보다 말하지 않았던 미송이가 궁금했다.
“나는 아무것도 않았어. 그럴 가치도 없더라. 내가 왜 소모성 싸움에 내 정신과 육체를 갉아 먹니? 알면서도 아무 말도 않으니까 그게 더 고문이래.”
“나도 알아, 싸우고 덤비면 내가 진다는 거. 머리로는 그게 되는데 막상 부딪치면 안 되는 걸 어떡하냐고.”
규린이 맥주를 따르다 말고 말했다.
“그러니까 넌 하수지. 원래 고수는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싸움을 평정하는 거야. 하긴 나도 이혼하고 나니까 그때야 저절로 깨달아지더라. 이혼 안 하고도 이길 수 있었는데 그걸 내가 못 했잖아. 지금은 매 사에 허허실실 잘 넘어가는데 버스 떠나고 손 흔드는 격이지.”
규린이 농담처럼 말했다.
“하여튼 참지도 못하고 이혼한 년이 꼴에 조언을 잘해요.”
미송이 빈정거렸다.
내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남편과의 이혼으로 오는 정신적 공황 일까? 경제적 궁핍일까. 사회의 눈초리를 의식한 걸까? 아니면 남편이 끝까지 나와 이혼 안 할 것이란 터무니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이중적인 생활과 철저하게 나를 농락한 일 때문이기보다는 내가 너무나 멍청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얼마나 단순하고 무식했는지. 철저하게 남편을 믿은 바보였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남편을 믿고 싶다. 아니고 믿고 있어야 한다.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터무니 없는 믿음이라니….
이혼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내 나이가 너무 많았고, 경제력도 없었다. 아이는 겨우 3학년이었고, 아파트도 남편 사업으로 대출을 많이 받아서 나누면 겨우 전세나 얻을 수 있는 액수다. 남편은 죽어도 이혼만은 안 된다고 빌었다. 결국은 철저히 가정만은 지키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여자와 사랑이라면서 조강지처는 배반하지 않겠다는 욕심. 나는 그것이 더 무섭고 싫었다.
남편이 사귄 여자가 한 명이건 열 명이건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다른 여자를 더 사랑하고 애틋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 신뢰는 이미 끝이 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를 매개로 부부라는 틀을 묶어 두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이없을 뿐이었다. 규린과 미송도 나의 이혼에 반대했다. 
“여자 혼자 살면 모든 사람이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아. 저절로 페 미니스트가 되는 거야. 이혼해 주면 누구 좋아하라고? 그냥 살면서 원수 갚아. 적당히 바람도 피워 가면서.”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셋이서 각자 방에 들어갔다. 규린이 식당에 가자며 1층으로 오라고 톡이 왔다. 미송과 엘리베이터에 서 내렸는데, 규린이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 났나? 일본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 한다고 번역 앱을 들고 다니던 사람 이 대화하는 자세는 아니었다. 한국인인가 하는 생각에 다가갔다. 어디서 본 듯한 남자였다.
“누구시죠? ”
미송이 그 남자에게 물었다.
“아니. 아까 하코네에서 만난 분이셔. 우리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호텔로 찾아왔네.”
“어머, 정말이네. 어떻게? ”
미송이 묻자 규린이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하코네에서 온천에서 나와도 비가 내려 우리는 기차보다는 택시로 도쿄로 돌아오려고 앱을 검색했다. 나는 지도 앱이나 지하철 앱, 번역 앱이 하나도 없어서 방관자처럼 보고만 있었다. 규린이 우산을 쓰고 있 는 어떤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도쿄로 오는 길을 물었다. 그 남자였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밤의 신주쿠 거리로 나섰다. 앞장서 걷는 두 사 람은 영어로 이야기하며 초밥집을 데려갔다. 낯선 남자와 밥을 먹는 것 은 불편했으나 미송과 나는 둘이서 소곤대며 먹었다. 2차로 맥주까지 마시고 헤어졌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미송은 규린의 능력을 놀렸다.
맥주를 마신 탓에 자다가 소변을 보려고 두 번이나 잠이 깼다. 아직 새벽 3시였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1층에 있는 호텔의 작은 정원으로 갔다. 한국에는 오늘이 추석이다. 동경의 하늘엔 달도 별도 볼 수가 없었다. 밤 풍경이 바람에 흔들렸다. 반소매를 입고 있는 팔에 바람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가을바람이었다.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아직은 여름날의 열기가 남아 있는 밤이라 땀이 밴 피부에 거칠게 부딪혀 오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명절날이라고 생각하니 혼자인 것처럼 울컥해지려고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이런 느낌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이런 고적한 느낌과도 친숙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굳이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고 도망갈 필요는 없다.
이제 더는 추석날 아이와 남편의 손을 잡고 수유리 시댁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북한산 자락에 있는 도선사에서 달빛을 배경 삼아 절을 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달밤을 걸어오던 일도 이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이도 어린 한 시절을 기억하게 될는지. 엄하고 까탈스러운 시어머니가 노여워할 일도 겁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려고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우리가 묵는 9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가 탔을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자 어떤 남자가 내렸다. 아까 그 남자였다. 나는 건들거리는 기분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냉방 된 실내공기가 살갗에 와 닿았다.
관계를 아는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결단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나도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에 나는 지난 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녀는 분명 아니었다. 남편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자신이나 그녀에 대해서도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했으나 우리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밤에 자면서 나는 맥주도 물도 마시지 않았다. 자기 전에 화장 실을 다녀오고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일본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리니 아직도 여름옷을 입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었다. 3일 전의 일들이 옛날처럼 아득해졌다. 남편과의 관계도 그녀처럼 무심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아이가 보고 싶었다. 택시를 탔다. 나는 아이가 있는 친정으로 방향을 말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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