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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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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에서 13시에 점심 약속이 있어 신설동역에서 전철 1호선을 탔다. 한낮이라 찻간이 널널하여 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맞은 편에 양 옆에 두 딸을 앉힌 40대의 엄마가 있었다. 엄마 오른쪽에 앉은 아이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고, 왼쪽의 아이는 서너 살로 보였는데 그 표정 이 뭐라고 표현을 못 할 만큼 이상하게 보였다. 어디가 몹시 괴로운 듯 도 싶고,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른쪽 아이는 엄마를 쳐다보고 종알거리며 연방 웃는 모습과 퍽 대조 적이었다.
아이가 언제부터 나를 바라보았는지 모르지만, 눈이 마주치며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저 눈빛이며 표정! 내가 여덟 살 적에 늘 가슴 아프게 보았던 세 살배기 여동생 모습이 확 떠올랐다.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금방 애잔한 표정과 눈빛이 되어 아이를 마 주 보았다.
금방 울음이 터질 듯이 입을 비죽거리던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의자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서더니 뒤뚱뒤뚱 빠르게 걸어와 내 품을 덥석 파고들었다. 양팔로 목을 그러안고 양다리로 허리를 감으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턱이 아이의 눈물에 젖는 감각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아이를 꼭 안았다.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울음소리가 높아지는데, 엄마가 다가와 아 이 겨드랑이를 잡아당기자, 아이는 더 크게 울며 내 목을 그러안았다. 나도 아이를 떼어 엄마에게 주려 했지만, 아이는 죽어라고 팔과 다리로 내 몸을 감았다. 대체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는 것 인지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다시 아이 겨드랑이를 잡고 당기다가 말했다.
“어르신, 얘는 제 맘에 드는 어른들에게 한 번 안기면 절대 안 떨어져 요. 돈을 드릴 테니 먹을 거 좀 사주고 달래 주세요. 저는 5가에서 약속 이 있어 내려야 합니다. 한 시간 후에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저는 보험 설계사입니다. 명함을 드릴 테니 어디 계신지 전화를 주세요.”
여자는 빠르게 말하고 명함과 돈 만 원을 내 무릎에 던지고는 후다닥 내렸는데 종로5가역이었다. 아이를 안고 벌떡 일어섰지만 문이 닫히고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황당하여 아이를 떼어 놓으려 했지만 아이는 온 몸으로 내게 감겨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순간적이라 정신이 없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왁자지껄 난리였다.
“어르신, 어떡해요? 저거 이상한 엄마네요.”
“뭐 저런 년이 다 있어, 천벌을 받을 년이네요.”
분통을 터트린 여자는 내 또래의 안노인이었다.
“어르신, 아는 여잡니까? 임신한 것 같던데….”
별별 말들을 뒤에 두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아이를 안고 종로3가 역에서 내렸다. 개찰구를 나와 아이를 내려놓고 앞에 앉아 물었다. 아 이는 이제 순순히 떨어졌는데 얼굴이 예쁘장하니 귀엽게 생겼다.
“너, 이름이 뭐니? ”
아이는 내 목에 팔을 감으며 어눌하게 말했다.
“하-오-기.”
“하옥이, 몇 살이니? ”
아이는 그제서야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나도 빙 긋 웃고는 여자가 준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계속 굴러가 도 받지 않아 더럭 겁이 났지만 아이 손을 잡고 약속 장소에 갔다. 종로 3가역 뒷골목 소머리 곰탕집 식당으로 들어가자 친구 둘이 와 있었다.
배 여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니, 웬 애를 데리고 오냐? ”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나도 앉으며 대꾸했다.
“주웠다.”
“뭐, 줍다니? 애를 주워…! ”
나는 배 여사에게 명함을 주며 말했다.
“여기다 전화 좀 해봐. 난 손이 떨려 못하겠다.”
친구 이장희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대체 뭔 일이야? ”
배 여사가 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말했다.
“전화 안 받는다. 보험설계사 양혜선이 누구야? ”
“안 받지? 아까 내가 해도 안 받았어. 이거 큰일 났다. 내 참 기가 막 혀…! ”
나는 찻간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말하는데, 친구가 끼어들었다. “야 야, 배고파 죽겠다. 먹으면서 얘기하자.”
친구는 우리가 늘 먹던 소머리 수육과 소주를 시키고 아이를 위하여 설렁탕을 시켰다. 내 이야기를 들은 배 여사는 잔뜩 우거지상인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히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더니, 얼굴이 변하도록 놀 라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거 좀 봐라, 다리에 멍투성이다. 어디 좀 보자.” 아이 배 셔츠를 걷어 올렸는데, 가슴이며 옆구리에 꼬집힌 상처와 멍
투성이였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배 여사는 아이를 꼭 안으며 말 했다.
“이런 세상에…. 아가, 울지 마라. 괜찮아, 괜찮아.”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쳤고, 음식이 차려졌다. 배 여사가 설렁탕을 대접에 덜어내 식혀주자, 숟가락을 들고 침을 삼키던 아이는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배 여사가 애잔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이구,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그나저나 얘를 어떡하니? ”
친구가 소주를 잔에 따르며 재촉했다.
“배고프다. 먹으면서 얘기하자.”
나는 술맛도 쓰고 고기 맛도 쓰지만, 배가 고프니 몇 점을 먹고는 전 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구르자 여자가 받았다.
“양혜선 씬가요? ”
“예, 그런데요. 전화를 두 번이나 하셨는데 누구세요? ”
나는 잔뜩 매달렸던 가슴이 추르르 내려져 깊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 “빨리 와서 애 데려가요. 여기 종로3가역 1번출구 뒷골목입니다.” “아니, 애를 데려가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
나는 마침내 울화통이 터져 냅다 쏘았다.
“무슨 말이라니, 종로5가역에서 애를 나한테 내던지고 내렸잖아요. 3 가역 1번 출구에서 전화해요. 애 데리고 나갈 테니까, 빨리 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애라니요? ”
내가 너무 황당하여 전화기를 쥐고 부르르 떨자, 배 여사가 빼앗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우리가 아이 점심을 먹이고 있으니까 와서 데리고 가세요.” 여자 말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애는 뭐고 종로5가는 또 뭐예요. 난 애를 데리고 종로에 간 적이 없어요. 전화 잘못 거시고 이러시면 안 되죠.”
전화가 끊어졌다. 배 여사가 전화기를 들고 흔들며 심각한 얼굴로 말 했다.
“이거 일 났다. 말하는 품이 애 엄마 아니다. 대체 어쩌다 이런 덤테 기를 썼냐? ”
친구가 말했다.
“어서 먹구 경찰서에 데려다주면 된다. 종로경찰서 저 뒤에 있잖아. 우리끼리 아무리 속 끓여봤자 소용없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새 아이는 설렁탕 한 그릇을 밥과 고기 건더기 까지 말끔히 먹었다. 세 살배기 아이가 어른도 배가 부른 설렁탕을 알 뜰히 먹었다. 배가 불룩한 아이를 배 여사가 꼭 안아주자 방글방글 웃 으며 목에 매달렸다. 배를 곯고 정에 굶주린 아이가 분명했다.
종로경찰서는 식당에서 10여 분 거리 인사동에 있었다. 경찰서에 들 어가 민원 담당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미아 담당자에게 안내해 주었다. 아이를 경찰서에 데려다주고 상황을 알려주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경찰이 보험설계사 양혜선에게 전화를 했으나 아이 엄마가 절대 아니라고 펄펄 뛰었고, 보험회사 지점장을 바꿔주었다. 지점장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보증한다면서 양혜선은 딸이 없다고 했다.
경찰은 다시 양혜선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종로경찰서에 한 번 와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는 버려진 것이 분명하고, 학대를 받아 온몸이 성처에 멍투성이입니다. 보험설계 사시면 명함이 많으실 텐데, 보시면 언제 누구에게 주었던지 기억이 나 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이를 맡으신 분은 여든이 되신 남자 어르신 입니다.”
전화를 끊은 담당 경찰이 말했다.
“온다고 했습니다. 신사동이라니까 한 시간쯤 걸리겠습니다.”
담당 여자 경찰은 계급이 경사였다. 경찰이 물었다.
“어르신, 그 여자 얼굴을 보셨습니까? ”
“아니요. 난 하도 정신이 없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요. 아이가 내 목 에 매달려 울기만 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오면 결론이 나겠지요.”
보험설계사 양혜선은 두 시간이 넘어서 다섯 시에 왔다. 친구라는 여 자도 함께 왔는데, 양혜선에게는 딸이 없다고 했다. 양혜선은 명함은 자기 것이 분명하고, 이런 명함은 두 달 전에 썼다고 했다. 아이를 찬찬 히 살펴본 여자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 언니가 있었다고 하셨지요? ”
“예, 대여섯 살쯤으로 보였는데, 그 애는 제 엄마와 종알거리며 웃었는 데, 이 아이는 울상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달려와 내 품에 매달렸습니다.”
자초지종 내 이야기를 들은 양혜선은 아이 몸을 살펴보고는 경찰에 게 말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벌건 대낮에 일어납니까? 생각해보니 아이 아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전화번호는 모르겠고, 친구들에게 알아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니까 내일 중으로 알아서 전화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담당 경찰 명함을 받고 돌아갔다. 그나마 명함의 본인 신원이 밝혀지고 돌아가자 나는 허탈했다. 내 잘못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갖지만,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오그라들곤 하였다. 서류작성을 끝냈는지 잠시 뒤에 담당 박정미 경사가 말했다.
“지금 경찰들이 종로5가역 CCTV를 조사하고, 그 여자가 내린 종로5가와 그 일대를 수사하고 있으니 결과가 곧 나올 것입니다. 양혜선 씨 도 아이 아빠를 알 것 같다고 했으니 내일 중으로 사건이 해결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일단 댁으로 가셔도 되겠습니다.”
배 여사가 물었다.
“그럼 아이는 어쩝니까? ”
“아참, 그렇군요. 이걸 어쩌지요. 우리도 이런 사건은 첨 겪으니까요.” 박 경사가 아이 앞에 앉으며 안으려 하자, 아이는 자지러지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목에 매달린 아이를 안으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 경사님, 대체 이 아이를 어찌합니까? ”
안쓰러운 얼굴로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박 경사가 말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직원들과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잠시 앉아 계 세요.”
우리 셋은 난감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서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30여 분 후에 박 경사와 남자 경찰 경장이 함께 왔다. 경장이 말했다. “어르신, 참 난감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사건이 내일
이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아이를 어쩔 수 없으니, 어르신께서 하룻밤만 데리고 계셨으면 합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아이를 왜 내가 데려갑니까? 난 늙은 홀아빕니다. 늙은이가 여자아이를 데려가서 어쩌라는 겁니까? ”
경찰은 난감한 얼굴로 배 여사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배 여사 무릎에 앉아 있었다.
“결국 나더러 책임지라 이런 뜻인가요? 지금 아이 기저귀가 푹 젖었 어요. 당장 갈아줘야 합니다.”
박 경사가 말했다.
“배 여사님, 죄송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기저귀는 비상용이 있으니 까 제가 데리고 가서 갈아주겠습니다.”
경사가 아이 손은 잡자, 아이는 배 여사 목에 매달리며 울었다. “기저귀가 있으면 주세요. 내가 하지요.”
배 여사는 아이 손을 잡고 박 경사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다시 모였다. 박 경사가 말했다.
“아이는 배 여사께서 데려가시기로 했습니다. 비용으로 50만 원을 드 리겠습니다. 개인 돈이 아니고 경찰서 공금에서 나가는 것이니까 경찰 공무에 협조해 주시는 겁니다.”
나는 이제 마음이 놓였다. 박 경사는 아이 기저귀 10개와 초코파이 한 박스를 주며 고맙다고 말했다. 시간은 6시 30분이었다. 우리는 아이 를 데리고 경찰서를 나와 배 여사의 제안으로 함께 택시를 탔다. 배 여 사의 집은 길음동이었다.
배 여사는 4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9층 30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자 친구 이장희는 마트에서 사온 술상을 차렸 고, 배 여사는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먼저들 먹어. 아이도 씻기고 나도 씻어야 해.”
친구가 맥주에 소주를 말아 잔을 들며 분통을 터트렸다.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냐. 우리 어릴 때는 그 어려운 전쟁통에 도 사람들이 이렇게 망가지진 않았잖아. 제가 낳은 자식을 파리 죽이듯 이 죽이고, 사람 목숨이 개 목숨만도 못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야 살 만 큼 살았지만, 이 세상을 어쩌냐? ”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는 싫어 얼버무렸다. 아이가 울면서 내 게 달려든 것은 내 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어. 우리가 걱정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아.”
친구는 발끈했다. 
“저런 머저리, 하루종일 당하구두 그런 말이 나오냐? 한데 참 이상하 다. 저 애가 너를 어떻게 알아보았냐 그 말이다.”
“알아보긴 어린애가 뭘 알아봐. 그냥 우연의 일치였어.”
“우연이 아니다. 저 아이 니가 살렸다.”
나는 점점 마음이 구겨져서 술맛도 나지 않아 그저 정신이 멍했다. 배 여사가 발가벗겨진 아이를 안고 나오며 말했다.
“참혹하다. 어린애를 어찌 이렇게 패고 꼬집어 뜯었냐! 저것들은 인 간도 아니다. 피가 묻은 애 옷을 빨았으니 내 옷이라도 입혀야겠다.”
아이를 내 무릎에 앉혔는데 온몸이 빤한 틈도 없이 멍들고 쥐어뜯긴 상처였다. 나는 안쓰러워 마음으로 가슴으로 아이를 꼭 안았다. 배 여 사가 아이에게 자기 잠옷을 입히자 아이는 품에 안기며 스르르 잠이 들 었다. 우리 셋은 마주 앉아 옛날을 회상하며 술을 마셨다. 아이로 인하 여 우리 세 친구는 참으로 오랜만에 돌이키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아득히 취했다.
배현숙과 나 한기호, 친구 이장희는 6·25한국전쟁 전쟁고아로서 당 시 고아원에서 함께 자랐다. 나는 전쟁이 휴전되던 해 1953년 5월 아홉 살 때, 다섯 살배기 남동생과 세 살배기 여동생을 데리고 용산 흑석동 에 있는 행복고아원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가장 먼저 사귄 아이가 이장 희와 배현숙이었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70여 명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위라는 이장희가 나와 동생을 챙겼고, 역시 한 살 위인 배현숙이 유 달리 내 여동생을 잘 챙겨주었다.
고아원에서 챙겨준다는 것은 다른 아이들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인 데, 고아원 선배 아이들은 늦게 들어온 아이들을 못살게 굴어 제 부하 로 삼으려는 못된 심보가 관행이 되었다. 약한 아이들은 그들의 종이었다.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 휴전 직후라 구호품이 자주 나왔는데, 구호 품 분배를 받으면 먹는 것이든 생필품이든 모조리 빼앗고 저들이 다시 분배하는데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들 무리에서는 깡다구가 무기였다. 얻어맞으면 악바리로 대들어 물어뜯고 할퀴고 제압해야 한다. 힘이 달려 낮에 맞았으면 밤에 자는 놈 배에 올라타고 두들겨패거나 코를 물어뜯어서라도 복수를 해야 한 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어도 배에 올라타면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네댓 번만 하면 깡다구를 인정받아 서열을 받게 된다. 나는 동생이 둘 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죽기 살기로 대들었다. 내가 비실대면 두 동생도 같은 취급을 받기 때문인데, 그걸 알려준 아이가 이장희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덩치가 커서 중간 서열이던 그가 내 편을 들어주어 비교적 쉽 게 이장희 서열에 들어가면서 나도 두 동생도 편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12월 남동생이 또래 셋과 함께 음식 쓰레기를 뒤져 먹고 이질병에 걸려 일주일 만에 셋이 모두 죽었다.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이 병들어도 병원에 갈 수 없고, 죽어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 다. 감시가 허술하니 신고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보조금과 지원금을 계 속 받아야 하니 일부러 숨기는 것이 관례였다.
이듬해 3월 여동생 영옥이가 미국 가정집으로 입양되어 가면서 나는 동생과 헤어지는 슬픔보다 내가 편해지는 것이 더 좋았던 기억이 생생 하다. 열악한 고아원 환경에서 벗어나 미국 가정집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은 큰 희망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 나와 한 살 더 먹은이장희, 그보다한살더먹은열세살곽진영은 고아원을 장악했 다. 곧 고아원을 떠날 17∼18세 선배들이 우리를 밀어주었다.
여자아이들은 열두셋이 넘으면 남자아이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열대여섯이 되는 여자아이들은 관리원은 물론 직원들에게 성노리갯감이 되곤 했었는데, 우리는 그런 행위들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며 달려들어 늘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당시 용산구에 국비로 운영되는 철도고등학교가 있었다. 전국 고아 원생들에게 특혜를 주어 시험에 합격하면 기숙사에서 합숙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나와 이장희는 중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철도고등학교에 시 험을 보아 우수생으로 뽑혔다. 배현숙도 고등학교 과정이던 연세간호 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진학하며 우리 셋은 고아원에서 나오게 되었다. 
배현숙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6 주간 군사 훈련을 받고 간호장교 소위가 되었다. 같은 무렵 1966년 철 도청에 근무하던 나와 이장희도 군에 입대했다. 그해 8월 배현숙은 간 호장교 중위로 진급되며 월남전에 파병되어 십자성부대 101병원에 근 무하고 있었다.
이듬해 1967년 2월, 이장희와 나도 배현숙의 권유로 월남전에 지원하 여 파병되었다. 우리는 철도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운전교육대에 서 운전을 배우고 운전병으로 파병되어 수송 자동차대대에 배속되며 같 은 대대에서 2년간 복무하고 만기제대를 하였고, 철도청에 복직하였다.
배현숙도 간호장교로 2년간 복무하고 우리보다 5개월 먼저 귀국하여 대위를 달고 서울 육군병원에 근무하다가 3년 뒤에 제대했다. 우리 셋 은 이상하게도 6개월 이상 떨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얼굴을 보며 살고 있다. 어릴 때는 비록 고아원에서 비참하게 자랐지만, 사회에 나오면서 부터 우리 셋은 비교적 잘 적응하여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
우리 부모는 박헌영 남로당계의 좌익이었는데, 6·25한국전쟁이 나 며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하자 부모가 경찰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하 루아침에 고아가 된 우리 삼 남매는 숙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숙부는 아버지의 이복동생이었다. 숙부네는 맏딸이 쌍둥이에다 그 밑으로 아들이 둘 있었지만, 우리가 살던 집을 준다는 고모의 조건을 받아들여 돈 욕심으로 우리 삼 남매를 받아들였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이 일곱이었으니, 숙모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숙부는 그래도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라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지만, 숙모에게는 우리가 남남이었다. 딸 쌍둥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 여섯 살이었고, 그 밑에 아들이 내 동생과 동갑내기 다섯 살, 그 밑에 돌이 지 난 아들이었다. 숙부가 청계천변에서 숯과 장작장사를 하던 넉넉잖은 집안은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사촌여동생 쌍둥이는 나만 없으면 내 동 생 영옥이를 꼬집어 비틀고 때려잡았다. 아이가 울며 내게 달려들어 옷 을 벗겨보면, 꼬집은 상처에 피가 맺히고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화가 나서 쌍둥이를 나무라고 손찌검이라도 하면 숙모는 빗자루며 빨래방망이로 나를 두들겨팼다. 1953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동생 둘은 매일 초죽음 상태가 되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늦은 봄 어느 일요일 두 동생을 데리고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창신동 고모네 집 에 갔다. 고모는 두 아이 옷을 벗겨보고 통곡을 했다. 전쟁고아들을 키 우는 고아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고모에게 차라리 고아원에 보 내달라고 강력하게 대들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이미 숙부에게 넘어가 팔아버린 뒤였지만, 나는 숙 부네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렇게 되어 우리 삼 남매는 일주 일 뒤에 고모부의 주선으로 행복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와 나는 술에 곯아떨어져 거실에서 잤다. 친구가 먼저 일어나 깨 웠는데, 배 여사는 주방에서 해장국을 끓이고, 아이는 식탁 의자에 앉 아 웃으며 종알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보자 주방에서 쪼르르 달려 와 다리에 매달렸다. 의자에 앉아 아이를 무릎에 앉히자 방글방글 웃으 며 말했다.
“하부지, 하부지.”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친구가 들여다보며 말했다.
“참, 천생연분이다. 친손녀라도 술 냄새 진동하는 할애비에게 매달리 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제서 보니 세 살 적 영옥이 얼굴 이 겹치는 것 같았다. 어제 전철 찻간에서도 첫눈에 아이에게서 영옥이 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측은한 눈으로 아이를 보았을 것이다. 정에 굶주린 아이는 내 눈빛을 살길이라고 여겨 매달렸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나는 박 경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 시 였는데, 전화를 받은 박 경사가 말했다.
“저는 비번이라 쉬는 날이지만, 아이 때문에 출근했습니다. 아이 엄 마는 신설동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까지 밝혀졌는데 그 뒤부터는 행 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양혜선 씨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이 아빠를 알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좀 기다려 보셔야겠습니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여자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면, 양혜선 씨만 믿 을 뿐인데,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 여사는 그동안 아이에게‘할머니, 할아버지’말을 가르쳤다고 했다.
“애가 한창 말을 배울 나인데, 꼬집히고 맞고 울기만 해서 말 상대가 없었으니 말을 잘 못한다. 넌 그 눈빛이 문제여. 길가다가도 애들만 보 면 들여다보고 웃으니 이런 일이 생겼잖아.”
이장희도 맞장구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넌 어디서든 어린 애들만 보면 눈빛이 달라지잖 아. 대체 그 버릇은 왜 생겼냐? ”
두 사람 말이 맞다. 나는 길에서도 아장아장 걷는 아이나 유모차에 탄 아이라도 들여다보며 웃어준다. 그러면 아이도 방긋 웃으며 손을 흔 들기도 한다.
“젊었을 땐 안 그랬는데, 늙으면서 저절로 그리되었을 것이다.” 이장희가 일어서며 빈정거렸다.
“늙으면 애 된다더니 니가 그 짝이구나.”
내 전화기가 울렸다. 경찰서 박 경사였다.
“어르신, 아이 아빠를 알아내기는 했는데, 집은 모르고 전화도 모릅 니다. 종로5가에서 치킨 호프집을 한다고 해서 양혜선 씨가 찾아가 보 았더니 한낮이라 문을 열지 않았답니다. 그 사람 이름이 진석근이랍니 다. 네 시경에 담당경찰이 갈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찾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럼 우리가 종로경찰서로 갈 까요? ”
“예, 다섯 시경에 오십시오.”
전화 내용을 들은 두 사람은 찾았으니 다행이라고 반겼다.
나와 배 여사가 아이를 데리고 5시에 종로경찰서에 갔다. 박 경사가 맞이하며 말했다.
“아이 아빠를 찾았습니다. 지금 오는 중입니다.”
“참 다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 아빠가 양혜선 씨 고등학교 동창이랍니다. 그래 서 어떻게 연줄연줄로 연락이 되어 찾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 여사가 밝게 말했다.
“어떻게든 찾기야 하겠지만, 양혜선 씨가 고맙네요.”
그때였다. 아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쪼르르 뛰어가며 외쳤다. “아빠! ”
젊은이가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며 울먹였다.
“하옥아, 대체 이게 뭔 일이냐! ”
아이도 울고 아빠도 울었다. 아빠는 친아빠가 분명하여 나는 마음이 놓였다.
박 경사가 말했다.
“자자, 모두 앉읍시다. 사건을 정리해야지요.”
멀끔하게 잘생긴 아이 아빠는 나란히 앉은 우리 둘에게 넙죽 엎드리 며절을했다.
“어르신들, 고맙습니다. 애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됐어요. 어서 일어나요.”
아빠 옆에 있던 아이가 배 여사 무릎에 날름 올라앉으며 방긋방긋 웃 었다. 배 여사가 꼭 안아주고는 말했다.
“하옥아, 이제 아빠한테 가야지.”
아이는 앉은 채 배 여사 양다리를 안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이를 보며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건의 조서를 꾸미고 나서 박 경사가 말했다.
“처리되었습니다. 아빠를 빨리 찾게 되어 다행입니다. 진석근 씨는 두 어르신께 사례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두 분께서 이틀간 많 은 걱정과 수고를 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사례는 무슨, 그럴 필요 없어요. 어서 아이를 데리고 가요.”
배 여사도 거들었다.
“그래요. 이제 우리는 갈 테니까, 다시는 아이를 이렇게 놔두지 말아 요. 새엄마라니까 아빠가 더 보살펴야지요.”
아빠 손을 잡고 눈을 말똥거리던 아이가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나와 배 여사 사이에 끼며 배 여사 다리를 그러안았다.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하옥아, 이리 와. 집에 가자.”
아빠가 팔을 벌리고 안으려 하자,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며 이제 내게 달려들었다.
박 경사가 나섰다.
“이제 경찰서에서 해드릴 일은 없습니다. 아빠는 어서 아이를 안고 나 가시고, 어르신들께서도 그만 가세요. 우리가 업무를 볼 수 없으니까요.”
아빠가 내 품에서 아이를 떼어 안고 경찰서를 나섰다. 우리도 뒤를 따랐는데,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울음이 뚝 멎으며 얼굴이 새파래졌 다. 아빠가 당황하여 소리치며 아이를 마구 흔들자, 배 여사가 받아 안 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에 눕히고 아이 가슴을 마사지했다. 왕 년의 간호장교 실력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이내 숨을 왈칵 토하며 울음이 터졌다. 배 여사는 아이를 가 슴에 안으며 등을 다독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던 아빠는 아이를 안은 배 여사를 그러안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여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내가 그랬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 세 살배기 동생을 안으며 나도 저렇게 울었다. 배 여사가 울음이 그친 아이를 안고 말했다.
“대체 이 일을 어쩌니? ”
어쩌기는 아빠에게 주면 된다. 어쩔 줄 모르고 바장대는 아빠에게 단 호히 말했다.
“어서 아이를 받아 안고 차로 가요. 잠시 울다 말겠지요. 어서요.” 다른 방법이 있을 턱이 없다. 아빠는 배 여사 목을 그러안은 아이를
떼어내 가슴에 안았으나, 아이는 제 아빠 머리를 쥐어뜯으며 처절하게 울었다. 몇 걸음 걷던 아빠가 멀거니 서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자, 아이 는 아빠 가슴을 밀어내고 내 가슴에 달려들며 숨가쁘게 종알거렸다.
“하부지, 아빠 싫어.”
아이는 내 가슴을 밀고 배 여사에게 달려들며 말했다. “하머니, 좋아. 아빠 싫어. 하머니, 집에 가자.”
배 여사가 아이를 안고 말했다.
“이봐요. 이걸 어째요? 내가 안고 차 앞에까지 갈 테니까 아이를 떼 어 태우고 가세요.”
아빠가 앞장서고 내가 따르고 배 여사가 아이를 안고 따르며 푸념했다. “아이고 힘들어, 팔 아파 죽겠네.”
한참 걸어 주차장 차 앞에 왔다. 아빠가 조수석 문을 열고, 배 여사가 아이를 떼어내려 했지만 아이는 죽어라고 목에 매달리며 울었다. 내가 외쳤다.
“어서 차에 타고 애를 받아요. 내가 떼어서 앉힐 테니까.”
아빠가 철철 울면서 말했다.
“어르신, 우리 아이 차에서 죽든가 집에 가도 죽습니다. 어제 배 여사 님 댁에서 잤다니까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오늘 밤 제가 함께 자면 서 달래보든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드릴 말씀도 많구요.”
내가 아이를 받아 안고 대꾸했다.
“배 여사, 그럽시다. 우리가 하룻밤 더 고생합시다.”
차에 타자 아이는 그제야 내 품에서 떨어져 우리 사이에 얌전하게 앉 았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배 여사 집에 왔다. 아이는 집 안에 들어와서 도 아빠 옆에 앉지 않고 배 여사 옆 의자에 앉아 눈치만 살폈다. 아이는 하도 시달려 눈치가 빠르고 꾀가 말짱하니 영악하다. 아빠가 잔뜩 미안 한 얼굴로 말했다.
“배 여사님, 저도 오늘 밤 여기서 자겠습니다. 두 분께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동의하는 눈으로 보자 배 여사가 받았다.
“할 얘기가 뭔지 들어봅시다.”
“고맙습니다. 제가 술을 좀 마시고 싶어 나가서 사오겠습니다.” “술은 먹을 만큼 있으니 사오지 앉아도 돼요. 내가 술상을 차리지요.” 술상에 앉자 아이가 의자에 앉아 꼬박꼬박 졸았다. 배 여사가 안아다
안방 침대에 재우고 나왔다. 소주를 연거푸 석 잔을 비우고 아빠가 눈 물을 훔치며 말을 시작했다.
“죽은 아이 엄마와 지금의 처, 보험설계사 양혜선과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저와 아이 엄마는 동갑내기로 서른넷에 결혼했습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된 진석근의 신세타령을 간추리면 대강 이렇다.
시흥의 남녀공학 고등학교 동창 진석근과 김이향은 동갑내기로 2018 년에 결혼했다. 이듬해 딸 하옥이를 낳고 두 돌이 되었을 때인 작년 봄 2월, 김이향이 운전을 하고 친정엄마와 경기도 동탄 외가를 다녀오다 가 안양 부근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나면서 두 모녀가 죽었다. 김이향이 죽을 때, 임신 6개월이었는데, 태아가 아들이었다고 했다. 김이향은 고 등하교 동창 양혜선의 권유로 종합생명보험을 들었는데, 사고가 나자 보험금 3억을 받았다. 10톤 화물차 가해 차량 측에서도 임신상태인 여 자가 죽었으니 두 사람 보상금 4억을 받아 총 수령 보험금이 7억이 넘 었다고 했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함께 죽었으니, 두 돌잡이 하옥이는 맡길 곳이 없 었다. 진석근 어머니는 계모였는데, 딸의 쌍둥이 손주를 돌보고 있었으 니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나타난 여자가 네 살배기 딸을 데 리고 살던 이혼녀 박영선이었다. 친구 김이향 장례식에도 참석했던 박 영선은 친구 딸 하옥이를 친딸처럼 키우겠다며 함께 살자고 했다. 호프 집을 운영하던 진석근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살림을 합쳤 다. 그게 8개월 전인 2022년 4월이었다. 박영선은 김이향 보험금 7억을 노리고 달라붙은 것이라고 했다. 박영선은 들어오자마자 정기예금에 들어 있는 돈 7억을 자기 이름으로 해달라고 졸랐다. 진석근이 거절하 자 그때부터 하옥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미 혼인신고도 했고, 임신 5개월로 아들을 잉태하고 있으니 빼도박도 못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박영선의 딸 다섯 살배기 아람이와 하옥이는 날이 갈수록 앙숙이 되 더라고 했다. 낮 12시경 아빠가 영업 준비를 하려고 집을 나오면, 아람 이는 하옥이를 장난삼아 두들겨패고 힘이 들면 꼬집어 뜯는다고 했다. 가게에서 일을 거들던 박영선은 임신 4개월이 넘으면서부터 힘이 든다 며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다고 하는데, 돌보는 게 아니라 딸과 함께 하 옥이를 잡는다고 진석근은 치를 떨었다.
“배 여사님, 우리 하옥이를 키워 주세요. 제가 어머님으로 모시면서 매월 100만 원씩 드리고 공탁금으로 1억을 드리겠습니다. 하옥이 집에 데려가면 죽습니다. 제발 불쌍한 아이 살려주세요.”
그건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아이도 집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예 감으로 느끼고 그리 반항할 것이다. 미물도 죽는 자리에는 가지 않는 다. 나는 여덟 살 때 그걸 알았다. 동생 영옥이도 고아원에 가지 않았으 면 죽었을 것이다.
배 여사는 턱을 고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난 지금 여든 살이야. 내가 애를 돌본들 2, 3년 일 게야. 그 후에는 어쩔 것인데? ”
그건 또 그렇다. 배 여사 현재 건강상태로 보아 5, 6년이 넘을 수도 있 겠지만, 이 문제는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배 여사는 돈을 바라고 아이를 맡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될 것 같았다.
“배 여사, 어떻게 생각해요? ”
“아이를 맡는다고 해도 법적으로 처리할 일도 많고 복잡해요. 그거 다할수있어요?”
배 여사 말을 들은 진석근은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우리 하옥이만 맡아 주신다면 모든 일 내일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랑했던 이향이 분신인 딸 하옥이를 죽일 수 없습니다. 제가 잘 아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부탁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셋은 많은 의견을 주고받다가 내가 결론을 말했다.
“아이 엄마 보상금 7억 중에 절반은 딸 양육비일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3억 5천을 아이 양육비와 교육비로 공탁하구, 5천은 보통예금 으로 넣어둬서 양육비로 쓰게 하는 것이 어떤가? 자네가 매월 100만씩 준다지만 그게 한두 달도 아니고 어떻게 믿겠는가.”
아이를 맡기로 결심한 배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빠가 한참 생각 하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3억 5천 공탁금은 저와 공동명의로 해주시고, 5천 보통예 금통장도 드리겠습니다. 물론 매월 100만도 드리고요. 정부에서 아이 들에게 주는 돈도 모두 어머님께서 받도록 처리하겠습니다.”
배 여사가 말했다.
“아이 계모가 가만있겠는가? ”
“펄펄 뛰겠지요. 나쁜 년입니다. 임신하지 않았으면 진즉 이혼했을 것입니다. 뱃속 아이도 내 자식인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디엔에이 검사를 해볼 것입니다.”
배 여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그걸 어찌 아는가? ”
“그년은 낙태 수술을 하고 막바로 제게 달라붙었습니다. 임신시켰던 놈이 현재 그년 뒤에 있다는 걸 두 달 전에 알았습니다. 저 연놈들 나까 지 죽이고 전 재산을 빼먹을 것이 분명합니다.”
배 여사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식탁을 두드리며 탄식했다. “세상에, 세상이 어찌 이 지경이 되는가.”
진석근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제 딸을 거두어 주시는 것은 저까지 살려주시는 겁니다. 제 친모가 없으니, 정말 평생 어머니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제 진심을 믿어주세요.”
배 여사가 아들이 된 진석근 손을 잡으며 받아들였다.
“자네 진심을 받아들이겠다. 네가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사는 날 까지 아이를 키우겠다. 이건 내 진심이다. 내 친구 한기호가 보증할 것 이다.”
내가 자신있게 보증했다.
“우리 두 사람은 죽는 날까지 펑펑 쓰고도 남을 돈 있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
진석근은 벌떡 일어나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도 다섯 살부터 계모에게서 자랐습니다. 두 분 첫 모습에서 우리 부녀 살려주실 어른이라는 거 알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흐뭇해서 달게 술잔을 비웠다. 세상이 아무리 그악스러 워져도 따뜻한 인간의 본성을 지닌 사람들은 많다. 나는 오른손으로 배 여사 손을 잡고, 왼손으로 아들이 된 진석근 손을 잡고 그저 조용히 웃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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