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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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들리고 담임선생님이 낯선 소녀와 함께 교실로 들어선다. 친구들이 소곤거린다. 천사처럼 이쁘다며 킥킥거리는 녀석도 있다. 소녀가 굳은 표정으로 선생님 곁에 서 있다. 반장의 구령에 따라 선생님께 인사를 올린다.
“오늘은 여러분께 전학 온 친구를 소개합니다. 이름은 태미선이고 정주 시내 호남초등학교에서 전학 왔습니다. 시골은 낯설고 잘 모르니까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면서 친하게 지내세요. 매죽마을 맞은 편 산배마 을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짝짝 박수 소리가 들린다.
“아하, 영훈이가 박수를 친 것 보니까 반가운 모양이구먼.”
영훈은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벌건 얼굴이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그러자 반 친구들이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박수를 친다. 영훈의 박수 소리가 유난히 크다.
“미선 학생, 인사말 한마디 하세요.”
“태미선이라고 헙니다. 앞으로 잘 부탁헙니다.”
미선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서 있다.
“됐습니다. 들어가 저기 빈 자리에 앉으세요.”
미선은 뚜벅뚜벅 걸어 자리에 앉는다. 영훈의 바로 옆자리이다.
영훈에게는 이상하게 미선의 존재에 신경 쓰인다. 꽃처럼 예쁘고 달 처럼 얼굴이 뽀얀 미선. 피부색이 까무스름한 다른 여자 친구들과 대조 적이다. 언뜻 외계에서 온 듯한 느낌이다. 수업 시간에 집중이 잘 되지 않고 미선에게만 시선이 간다.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때문에 자꾸만 가슴이 뛴다. 영훈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교초 5학년 1반 교실. 쉬는 시간 모두 밖으로 나가 노는데 미선이만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다. 밖에서 이걸 발견한 영훈이 교실로 들어와 미선에게 말을 건다.
“니 산배마을로 이사 온겨? ”
“응.”
미선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맞은편 매죽마을에 살어. 환영혀.”
영훈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미선도 거리낌 없이 손을 내민다.
“이웃 마을에 사니께 앞으로 자주 만나겄네.”
“그러겄지.”
두근거렸던 영훈의 가슴이 대화를 나누니까 조금 진정이 된다.
밭둑 감나무에는 누런 먹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유난히 벌겋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은 달콤한 홍시들이다. 까치들이 깍깍거리며 홍시 주위를 맴돈다. 밭에는 키다리 수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이다. 산 초입 밤나무 가지에 매달린 밤송이 에서 알밤이 뚝 떨어져 지나가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산내면 매죽리의 가을이 익어 가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미선과 영훈은 매죽리의 청정로를 나란히 걸어 집으로 가는 중이다.
“혼자 다니면 무섭겄다. 산에서 너구리가 나올 것 같은디.”
“너구리는 없어. 하나도 안 무섭당게.”
겁먹은 듯한 미선의 표정과 달리 영훈은 히죽거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시내에서 산골로 전학 온 게 쪼금 이상헌디. 무신 이유라도 있어? ”
“아빠가 우체국장으로 발령을 받아서. 아빠의 고향이기도 허고.”
“그렇구먼.”
영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산에서는 직박구리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추령천 물소리가 경쾌한 음악처럼 다가와 산속의 고요를 노크한다. 미선은 걸음을 옮기며 연신 길가의 풀들을 툭툭 친다. 그러다가 미선은 화들짝 놀라며 기겁한다.
“징그러워! 벌레가 바지에 붙었어! ”
미선은 폴짝폴짝 뛰며 바짓자락을 손으로 털어보지만 그것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옆에 서서 걸어가던 영훈이 급히 다가와 손으로 집어 낸다.
“벌레가 아닌디. 도꼬마리구먼. 뭐가 무섭니. 이건 털면 안 되고 손으로 하나하나 집어내야 혀. 고약헌 녀석이여.”
영훈은 빠른 손놀림으로 미선의 바지에 붙은 도꼬마리를 금세 제거 한다.
“고마워.”
미선은 길가의 풀을 건드리지 않는다. 도시에서 시골로 전학 온 그녀로서는 생소한 시골의 들꽃과 들풀들이 경이로울 뿐이다.
“저건 뭐지? ”
미선은 청정로 길가 밭에 하얗게 핀 꽃무리를 가리킨다.
“목화야. 저걸 따서 말려 솜을 맨들어. 솜으로 이불을 맨들구.”
널따란 밭에 목화꽃이 하얗게 피어 함박눈이 내린 형상이다.
“이야그허며 걸으니께 잠깐이네. 집에 다 왔어.”
“그렇네.”
산배마을 앞에서 보니까 구절초 동산이 지척이다.
“저기 구절초 동산 어뗘? ”
영훈은 구절초 동산을 가리킨다.
“멋지구먼. 가서 사진 한 방 찍을까? ”
“그리여. 좋재.”
두 사람은 흔들다리를 건넌다. 두 사람이 가운데쯤 오니까 다리가 흔들거린다.
“아이 무서워! ”
미선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난간 쇠줄을 움켜잡는다.
“뭐가 무섭니. 요렇게 살살 가는 거야.”
영훈은 쇠줄 난간을 잡고 실실 웃으며 빠르게 걷는다.
“니만 먼저 가니? 얌체구먼.”
“아, 미안.”
영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응시한다. 그때 영훈은 보았다. 개미허리처럼 날씬한 몸매에 피부가 하얀 천사 같은 미선을. 괜히 영훈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든다.
“후딱 와.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꽉 잡아줄게.”
“빠르게 가고 있당게.”
미선이 난간 쇠줄을 움켜잡고 쩔쩔매며 걷는다.
“나는 거의 매일 이 흔들다리를 건너거든. 그리서 안 무서워.”
“나중에는 나도 안 무섭겄네.”
“당연허지.”
흔들다리는 매죽마을과 산배마을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흔들다리를 건너온 두 사람은 핸드폰을 꺼내 구절초 동산을 카메라에 담 는다. 산 전체가 하얀 눈밭 같아서 황홀하기까지 하다. 벌과 나비가 훨훨 날고 그윽한 꽃향기로 산 전체가 취해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한 꽃 구절초. 가는 허리는 약한 바람에도 한들거리며 자연의 리듬에 반응한다. 뽐내기는 싫고 무리를 이루고 있어 외롭지 않다. 바람과 햇빛이 풍요로워 집단으로 꽃을 피우기로 했다.
“거기 서. 한 방 찍어줄팅게.”
영훈의 요청으로 미선이 구절초 무더기 속에 쪼그려 앉는다. 미선은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트를 표시한다.
“좋아! 쪼깨 고개를 들어! 하나 둘 셋! ”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스스럼없다. 서산에 깔린 붉은 낙조가 하얗게 피어 있는 구절초 동산에 부챗살 모양으로 쏟아져 내린다.
미선과 영훈은 등하교 때 거의 대부분 동행한다. 두 사람이 같이 다니면 무섭지도 않고 심심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서로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침에는 매죽마을에 사는 영훈이 먼저 흔들다리를 건너와 청정로 길가 산배마을 앞 모정에 앉아 미선을 기다렸다가 함께 등교한다. 하교할 때는 반대다. 혼자 가기 무섭다며 미선이 영훈을 기다린다.
두 사람은 약속한 바가 있다. 하교할 때 추령천에서 가재를 잡기로. 미선은 가재를 그림으로만 보았지 실제로 만져본 적은 없어 호기심으 로 가득하다. 그것도 물속으로 들어가 직접 잡는다니 내심 기다려진다.
미선이 영훈을 졸라 가재를 잡기로 한 날이다. 두 사람은 추령천 바위 위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영훈이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 발로 점벙거린다. 물 깊이는 무릎을 넘지 않는다. 미선이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차갑다며 호들갑을 떤다.
“뭐가 차겁니? 시언허구먼.”
“나는 차거운디. 가재는 워디 있지? ”
“이렇게 돌을 들추면 나와.”
영훈이 돌을 들추어 시범을 보인다. 물속에는 버들치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물 위는 소금쟁이가 원을 그리며 돈다.
“잡았다! ”
영훈의 힘찬 소리가 추령천을 흔든다. 번쩍 든 영훈의 손끝에서 가재가 발을 버둥거린다.
“가재여? 맞어? ”
가까이 다가온 미선이 유심히 살핀다.
“맞어.”
영훈은 가재를 미리 준비한 비닐봉지에 담아 그 봉지를 옆구리 혁대 사이에 끼운다.
“나도 잡었어.”
미선이 가재를 들고 외친다. 큰일을 해냈다는 듯 자못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정말로? ”
영훈이 돌을 들추다 굽혔던 허리를 편다.
“아아, 아퍼! 내 손가락! ”
갑자기 미선이 왼손을 털어대며 소리친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뭣 땜시 그려? ”
“집게발에 물렸어. 피 나! ”
미선이 왼손을 흔들며 울상이다.
“그럼 안 되지. 엄청 아프겄는디.”
영훈이 빠르게 다가가 미선의 상처를 살핀다. 미선의 왼손 검지 끝이 벌겋고 피가 난다. 영훈은 재빠르게 미선의 손끝을 힘주어 움켜잡는다.
“미선아, 니가 오른손으로 잠깐 손끝을 꽉 잡고 있어.”
“그리여.”
영훈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미선의 상처를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겁에 질린 미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미선에게는 영훈이 구세주처럼 느껴진다.
“출혈이 멎으면 집에 가서 연고를 발러. 그럼 후딱 나을 거여.”
“알았어.”
“잡은 가재는 물에 놓아주고 오늘은 그만 철수허자. 니가 손을 다쳐서 더 잡을 수 없으니께.”
“그리여 워쩔 수 없지.”
영훈은 봉지에 든 가재를 물에 놓아준다. 가재가 물속으로 굼지럭굼 지럭 기어간다.
“내가 니 가방 메고 갈게.”
“무거울 텐디.”
“아니여. 갈만 혀.”
영훈이 양어깨에 두 개의 책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청정로를 걷는다. 책가방이 전혀 무겁지 않다. 길가 언덕 밑에 물봉선화가 벌겋게 피어 있다. 파란 도화지에 붓으로 붉은 물감을 꾹꾹 찍어 놓은 형상이다. 영훈은 흥얼거리며 가는 걸음 멈추지 않는다.
미선은 영훈이 참 좋은 사람 같다. 무거운 자신의 가방을 메고 가면서도 흥얼거리는 것을 보니. 가재에게 손가락을 물려 다쳤지만, 미선의 기분도 나쁘지 않다. 미선도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서산에 그림처럼 걸린 감빛 노을이 두 사람의 귀갓길을 지켜보고 있다.
미선은 영훈의 전화를 받고 구절초 동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놀게 나오라는 영훈의 요구를 미선은 거절하지 않았다. 흔들다리를 건너는 미선의 발걸음이 가볍다. 여러 번 건너다니면서 생긴 자신감이 역력하다. 꽃 무더기가 너무 황홀하여 매일 구절초 동산에 나와도 지루하지 않다. 미선은 산배마을과 매죽마을을 들락날락한다. 구절초 꽃이 좋아서, 그리고 친구가 좋아서 거의 매일 매죽마을 구절초 동산에 들른다. 그러한 미선이 영훈의 전화를 싫어할 리 없는 것이다. 산 전체가 하얗다. 구절초는 바람이 불면 누웠다가도 오뚝이처럼 금세 일어난다.
“뭣 땜시 불렀대여? ”
“니에게 선물 주려고 불렀어야.”
“무신 선물? ”
“부담갖지마라. 그냥 내가 손으로 맨든거니까. 짜잔.”
영훈은 주머니에서 실에 꿰인 도토리 목걸이를 꺼낸다.
“그게 머재? ”
“니 목걸이다. 후딱 가까이 와 봐라.”
미선은 거부하지 않고 영훈의 요구대로 가까이 가서 목을 길게 쑥 뺀 다. 영훈이 미선의 목에 도토리 목걸이를 걸어주려다 주춤한다.
“니 워찌 그러재? ”
“하얗고 예쁜 목에 이 조잡한 도토리 목걸이를 걸어주면 안 될 것 같은디.”
“무신 소리허나. 내는 좋은디.”
그때야 영훈이 자랑스럽게 미선의 목에 도토리 목걸이를 걸어준다.
“미안허다.”
“워째서? ”
“진주가 아니어서 말이다.”
“니가 워디서 돈을 구해 진주를 사나. 이것도 대만족이다. 니 마음이 중요헌 것 아니여? ”
“그건 그리여.”
아름드리 소나무 옆에 평상이 놓여 있다. 구절초 동산의 쉼터이다. 두 사람은 거기에 벌렁 누워 말없이 하늘을 감상한다. 하얀 뭉게구름이 떠가고 구절초 꽃향기가 밀물처럼 밀려와 후각을 간질인다. 까치 소리가 구절초 동산 허공을 줴흔들고 지나간다. 평상 뒤에 산국이 한 무더기 피어 있다. 하얀 구절초 동산에 노란 산국이 어깨를 들며 뽐내지만 역부족이다. 평상 오른쪽에는 어독초로 불리는 여뀌풀이 눈에 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 여기 있소, 하고 고개를 내미는 여뀌꽃이 색동저고리를 입은 시골 아이처럼 수줍다.
구절초 동산에서 아이들이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산배마을과 매죽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심심하면 가끔 구절초 동산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구절초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지형지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미선, 영훈, 형순, 철민이 가위바위보를 한다. 가위바위보에서 영훈이 꼴찌이다. 그래서 술래이다. 영훈은 소나무를 붙잡고 서서 눈을 감은 채 외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영훈이 이렇게 천천히 세 번을 외친다. 그동안 다른 아이들은 뛰어 몸을 숨긴다. 영훈이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 뒤 미선, 형순, 철민을 찾아 나선다. 그는 구절초꽃들 사이를 오가며 눈을 크게 뜬다. 하얀 구절초꽃 무더기 속에서 분홍 재킷이 언뜻 시야에 들어온다. 영훈은 살금살 금 다가가 쪼그린 채 숨어 있는 분홍 재킷을 확 끌어안는다. 그러면서 외친다.
“미선이! ”
“니 이것 반칙이야.”
미선이 벌떡 일어나며 얼굴을 붉힌다.
“뭣 땜시? ”
“뭣 땜에 붙잡냐고 이름을 부르면 되는디.”
“미안, 사과할게.”
금세 미선이 굳어 있던 표정을 푼다. 영훈은 미선을 보자 자신도 모 르게 덥석 안았던 것이다. 미선, 형순, 철민 순으로 영훈(술래)에게 발견 되었다. 그래서 최후 승자는 철민이었다. 철민이 미선, 영훈, 형순에게 꿀밤을 먹인다. 철민은 싱글벙글 웃으며 승자의 쾌감에 젖어 있다.
다음은 미선이 술래이다. 미선이 첫 번째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미선이 소나무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은 채 크게 천천히 세 번을 외 친다. 그 사이 다른 아이들은 빠르게 뛰어 몸을 숨긴다.
미선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 뒤 냅다 뛰기 시작한다. 억새 군락에서 풀 끝이 흔들리는 이상 징후를 발견한 것이다. 살금살금 다가가 억새 뒤에 웅크리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는 와락 끌어안는다.
“영훈이 니 뛰어봤자 벼룩이다.”
“몸을 만지면 반칙인디.”
영훈이 벌떡 일어나며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니도 아까 만졌으면서.”
“내 그럼 봐주지. 없던 일로 혀줄게.”
미선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나머지 친구들을 찾기 위해서. 쑥부쟁이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는 곳에서 파란색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목격 한다. 미선은 그쪽으로 뛰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친다.
“니 철민 후딱 나오라. 내 눈은 못 속인다.”
철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쑥부쟁이꽃 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못찾은 마지막 남은 사람은 형순이다. 이번 숨바꼭질은 형순의 승리이다.
“니들 머리 디밀어. 맞아야지. 이건 규칙인게. 알겄지? ”
형순이 구절초꽃 무더기에서 나오며 아이들을 향해 외친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형순은 주먹을 쥐고 아이들의 머리를 향해 꿀 밤을 먹일 태세다. 아이들이 서 있는 바로 옆에는 구절초꽃들이 만개하여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미선이 팔에 깁스하고 학교에 나타났다. 왼손을 깁스 팔걸이에 의지 한 미선은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다.
“워쩌다 다쳤니? ”
“다른디는 괜찮어?”
“천당 갈 뻔혔구먼.”
반 친구들이 미선을 에워싸고 있다.
“인도가 없는 시골길을 걸어가는디 지나가던 자전거가 나를 치고 갔어. 뼈가 부러진 거지.”
“그만헌 게 다행이구먼. 많이 다칠 수도 있었는디.”
영훈에게는 미선의 사고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팔을 깁스허니께 엄청 불편혀. 마음대로 뛰지도 못허고 몸을 혼자 씻지도 못헌다니께.”
미선의 표정은 밝지 못하다.
“오늘부터 내가 니 수행비서다. 알겄지? ”
영훈은 미선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등하교할 때 가방 메고 가기, 급식 시간에 급식판 옮겨 주기, 그림 그려주기 등은 영훈이 자청한 일들이다. 그렇게 도와주어도 영훈은 힘든지를 모른다.
“영훈아, 고마워.”
미선에게는 영훈이 오빠처럼 믿음직스럽고 친근감이 든다.
“고맙기는. 친구 사이에 당연히 혀야 헐 일이지.”
겸손하기까지 한 영훈은 참 괜찮은 친구 같다. 영훈이 양어깨에 두 개의 책가방을 메고 끙끙대며 귀가 중이고 그 뒤를 깁스 팔걸이 한 미선이 따른다.
“쪼금 쉬었다 갈까? ”
영훈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한다.
“그리여. 쉬자고. 내가 좀 메고 갈게. 책가방 메고 가는 데는 지장 없어야.”
“안 된다. 니는 환자랑게. 내는 하나도 무겁지 않어.”
영훈은 미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두 사람은 길가 납작한 돌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주위에는 왕고들빼기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왕고들빼기는 입에 쓰지만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하는 식물이다. 그 옆 밭에는 보라색 두메부추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보라색 두메부추꽃들이 바람을 타고 출렁거린다.
“가자구. 얼른 일어나.”
영훈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그리여.”
자리에서 일어난 미선이 먼저 앞장을 선다. 졸졸거리는 추령천 물소 리가 들리고 깍깍거리는 물까치 소리가 산골의 정취를 고취시킨다. 영훈은 양어깨에 책가방을 메고도 휘파람을 불며 가는 걸음 멈추지 않는다. 영훈의 휘파람은 앞서 걷는 미선의 가슴 속으로 따뜻한 온기가 되어 날아간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구절초 동산이다. 이미 두 사람은 구절초 동산 평상에 앉아 숙제하기로 합의가 된 상태다. 만개한 구절초꽃들이 미소를 머금고 산 전체를 황홀한 지경에 빠트린다.
미선과 영훈은 평상에 앉아 책가방을 열고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꺼내 오늘 내준 그리기 숙제를 시작한다. 구절초 동산을 도화지에 담는 것이다. 영훈은 왼손으로 도화지를 누르고 오른손에 4B 연필을 쥔 채 데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미선은 왼손을 쓸 수 없어 발로 도화지를 누르고 데생을 시작한다. 영훈에게는 그 모습이 애처롭다.
“내가 그려줄게. 니는 구경이나 혀.”
영훈은 미선의 도화지를 당겨다 쓱쓱 데생을 한다. 미선은 물끄러미 그 장면을 바라본다. 미선의 안면에는 기쁨 가득 밝은 미소가 얹혀 있다.
“이거 니 가져. 고마워서 주는 내 선물이여.”
미선은 다짜고짜 영훈의 상의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다.
“뭔디? ”
“작은 손거울이야.”
“고마워.”
영훈은 데생을 하다 말고 사각형 모양의 작은 손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본다. 요모조모 얼굴의 모양새를 살피며 신기해한다.
하얀 구절초꽃들이 겨울 설경을 연출하는 곳. 은은한 구절초 꽃향기가 바람결에 묻어난다. 파란 하늘에 붓으로 그린 흰 구름들이 두둥실 떠간다.
억수로 비가 내렸다. TV에서는 35년 만에 내린 폭우라고 떠들어 대었다. 추령천이 범람했다. 산배마을과 매죽마을을 이어주는 흔들다리가 떠내려갔다. 흔들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구절교가 있으나 그것마저 물에 잠긴 상태다. 연일 내린 장맛비는 멈출 기세가 아니다. 비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도 화풀이하듯 물 폭탄을 퍼붓는다. 누구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영훈이다. 학교에 갈 수 없고 미선을 만나 볼 수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영훈은 비가 원망스럽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전화로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훈은 수시로 미선에게 전화를 걸어 궁금한 것을 묻는다. 그때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느낀 점은 미선의 얼굴색이 일 년 전과 판이하다는 점이다. 전학 올 때 뽀얗던 미선의 얼굴이 일 년이 지난 지금은 가무잡잡하 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 미선도 공감한다.
“내 얼굴이 햇빛에 그을러 검게 되었당게.”
“처음에는 하얗던 니 얼굴이 시방은 달라졌어. 가무잡잡한 니 얼굴에 더 친근감이 간다니께. 나도 얼굴이 타서 검은데 워뗘. 검은 사람끼리 잘 지내보자고.”
“그리여, 고렇게 혀 보자고.”
미선과 영훈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은 적이 있다.
미선과 영훈의 6학년 8월은 폭우로 만날 수 없는 슬픈 계절이다. 영훈이 굽이쳐 흐르는 추령천 물가에 서서 하염없이 산배마을을 바라본 다. 달려가서 미선을 만나 놀이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을 달랜다. 한참을 서서 기다리면 약속이나 한 듯이 미선이 반대쪽에서 나타나 손을 흔든다. 이게 꿈인가 싶을 정 도로 영훈은 미선의 등장이 믿기지 않는다. 너무 반가워 영훈은 크게 외친다.
“미선아, 나다! 영훈이다! ”
서로 만나지 못해 가슴이 답답한 것은 미선도 마찬가지이다. 흔들다 리는 떠내려갔고 구절교는 물에 잠겨 있으니 만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영훈은 얼마나 답답할까. 섬에 갇힌 상태라고나 할까. 고립된 영훈은 당장 학교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미선은 추령천 물가로 나와 매죽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가 집채라도 삼킬 듯 사납게 흘러간다. 흔들다리는 아예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한참을 서 있는데 미선이 서 있는 반대쪽 물가에서 펄럭이는 물체가 포착 된다. 누군가 미선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마구 손수건을 흔든다. 유심히 바라보니 골격이 많이 눈에 익다.
“미선아, 나야! 반갑다, 반가워! ”
영훈의 외침이다.
“영훈아, 잘 있었니? ”
미선도 목 놓아 외친다. 미선의 간절한 마음이 영훈에게로 날아간 것 일까. 약속이나 한 듯이 영훈이 미선 앞에 나타나 손을 흔드는게 미선에게는 감동이다. 미선도 마구 팔을 흔들어댄다. 곁에서 노랗게 꽃을 피운 미역취도 미선을 따라 가지를 흔들어댄다.
10월이 되자 만개한 구절초가 매죽마을 일대를 하얗게 덮는다. 매죽 마을 어디를 가도 구절초 세상이다. 파란 도화지에 붓으로 꼼꼼하게 하얀 점을 찍어 놓은 하나의 화폭이다. 추령천 위 흔들다리는 복구 공사로 분주하다. 노란 조끼에 하얀 안전모를 쓴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학교에서 돌아온 미선과 영훈은 구절초 동산 평상에 앉아 있다. 평 상에 앉아 있으면 산배마을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쩌게 우리집이야.”
미선이 손으로 산배마을 위쪽을 가리킨다.
“감나무가 있는 집? ”
벌건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가 저 혼자 무겁다.
“맞어.”
미선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평상 좌우 어디를 봐도 하얀 물결이다. 무더기를 이루어 지천으로 피어 있는 구절초꽃들이 멀리서 보면 하얀 포말이 잔물결을 타고 넘칠 듯 연신 흔들리는 호수 같다. 벌들이 윙윙 거리며 구절초꽃 주위를 맴돈다.
미선이 갑자기 캑캑거리며 기침을 토해낸다.
“워디 아퍼? ”
“쪼금 미열이 있기는 헌디 괜찮어.”
미선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아프면 미리 약 먹어야 혀.”
“알았어. 답답허니께 구절초 동산을 후딱 휭 둘러보고 올게.”
“그리여. 나는 평상에서 쉴 팅게 어서 댕겨와.”
미선이 구절초 동산 꽃길을 따라 구절교 쪽으로 뛴다.
영훈은 책가방에서 실꾸리와 가위를 꺼낸다. 실꾸리에는 바늘이 꽂혀 있고 바늘에는 실이 꿰어 있다. 손을 뻗어 구절초꽃 한 송이를 가위로 자른다. 그런 다음 꽃받침에 실을 꿰어 두 번 감치기를 하고 매듭을 짓는다. 그렇게 똑같은 방법으로 새로운 구절초꽃 한 송이를 잘라 꽃받침에 감치기를 두 번 하고 매듭을 짓는다. 그런 식으로 구절초꽃을 실에 일정한 간격으로 꿰어 구절초꽃 목걸이를 만든다. 영훈은 그걸 자기 목에 걸어보고 활짝 웃는다. 멋진 목걸이가 완성되었다는 성취감에 만족한다.
“무신 목걸이를 허고 있나? 재주도 좋네.”
돌아온 미선이 영훈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신기해한다.
“응, 이것. 니 주려고 만든 거야.”
영훈은 자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내 미선의 목에 걸어준다.
“괜찮은디. 마음에 들어.”
미선은 구절초꽃 목걸이를 요모조모 살피며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우리사진한장박을까?”
“좋지.”
미선은 영훈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영훈의 핸드폰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다. 하나 둘 셋. 두 사람의 활짝 웃는 모습이 핸드폰 카메라에 담긴다. 사진을 찍고 나서 미선이 갑자기 캑캑거리며 기침을 해댄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우중충한 날씨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청정로 길가 남보라색 용담꽃들이 몸을 움츠리고 만개한 뙈기밭 메밀들이 젖버듬히 눕는다.
“미선이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결석하고 있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 병세가 심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혹시 찾아가거나 그러 면 안 됩니다. 전염될 위험 때문에 면회도 안 된답니다. 우리 모두 미선이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시다.”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영훈의 귓가에 선생님의 말씀이 쟁쟁하다. 까치 떼가 깍깍거리며 어두운 상공으로 날아간다.
미선이 오늘까지 사흘째 결석이다. 항상 하교할 때는 곁에 미선이 있었는데 사흘째 볼 수 없으니 혼자 귀가하는 영훈의 마음은 오매불망이다.
‘그리여 미선이는 이겨낼 것이구먼. 시골에 와서 몸이 단단해졌으니께.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날 것이구먼. 글치만 아프다고 허니께 걱정이 여. 참말로 기분이 영 젬병이네.’
“야, 니 어디 아프네? 워찌 그리 죽을 상이야? ”
“평소와 많이 다르네. 내가 보기에도 이상헌디. 뭔 일 있어? ”
매죽마을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철민과 형순이다. 축 처진 영훈의 어깨를 보고 이상하게 여긴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다 내린 것 이다.
“자전거 뒤에 타. 실어다 줄팅게.”
철민이 자전거 짐받이를 가리킨다.
“잔소리 말고 그냥 가기나 허시지. 혼자 있고 싶은 게. 쫌 기분이 그래.”
영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어서 가라고 손짓한다.
“그리여, 그럼.”
“먼첨 간다.”
철민과 형순은 자전거를 타고 쪼르르 청정로를 질주한다.
영훈이 청정로 중간 지점 원두막에 왔을 때다. 원두막 옆에 메리골드가 무리 지어 노랗게 피어 있다. 활짝 웃는 미선의 얼굴 같다.
‘그리여, 미선이는 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돌아올 거여. 참말로 그랬으면 얼매나 좋을까잉.’
영훈은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천둥소리가 거칠게 청신경을 자극한 다. 빗줄기가 창을 때려댄다. 가을비치고는 성깔 사나운 폭우다.
‘미선아, 후딱 일어나. 가슴이 답답혀서 못 살겄다. 니는 꼭 일어나야 헌당게.’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자, 어머니가 말한다.
“영훈아, 니 모르제. 미선이 폐렴 후유증으로 폐 섬유화 증세가 있어 입원이 길어질 모양이더구나. 참 안되었당게. 착허기로 소문난 아이인디 말이여.”
“입원이 길어진다고? ”
“폐렴도 무섭지만, 폐 섬유화가 더 무서운 모양이여.”
“그게 뭔디? 죽는 병이여? ”
“죽을 수도 있는 고질병으로 알고 있어야. 호흡곤란, 기침, 가래를 동반허고 폐가 딱딱허게 굳어가는 무서운 병이지.”
“근디 맨처음 워떻게 알았어? 그게 진짜면 안되는디.”
“미선이 이모가 나허고 친구거든. 아침에 카톡으로 왔당게.”
“미선이는 안 돼. 그런 착헌 애가 죽으면 안된다고.”
“영훈이 니도 몸조심혀. 미선이네 집에 가면 안 되여. 알겄지? ”
“엄마는 시방 무신 소리를 허냐고. 미선이 솔찬히 아프다는디 고것이 문제냐고.”
영훈은 불퉁스럽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아니여. 아닐 것이구먼. 그럼, 직접 확인하는 거여.”
영훈은 뒤집어쓴 이불을 휙 걷어낸다. 핸드폰으로 미선에게 직접 통화를 시도한다. 신호는 가는데 반응이 없다. 한참 동안 기다려 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썩을 놈의 시상이 있나.”
정지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윗목에 던져버린다.
구절초 동산 평상에 앉아 산배마을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착허고 이쁜 미선이에게 그런 병이. 만약 미선이 돌아오지 못헌다면 요걸 워떻게 혀야 허냐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돌아 금방이라도 죽 흘러내릴 것 같다. 일 년 남짓, 햇수로는 이 년째 같은 반에서 공부하고 등하교도 함께한 친구. 짝을 잃어버린 외기러기의 심정이라고 할까. 구절초꽃들은 미선의 소식을 모른 채 따뜻한 가을 햇빛을 받아 하얗게 웃고 있다. 영훈은 구절초 동산을 걷는다. 미선과 함께 걸었던 구절초 동산 꽃길에 미선의 영상이 어른거린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돌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또 걷는다. 서산에 해가 걸려 산그늘이 생기자, 구절초꽃들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영훈아, 가자. 너 낮에도 입맛 없다고 굶었지. 굶으면 니 죽어야.” 어머니가 다가와 영훈의 손을 잡고 집 쪽으로 끌어당긴다. 영훈은 못 이기는 척 따라간다.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 막무가내로 고집만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영훈아, 마음이 엄청 아프지야? 미선이 갸가 참말로 불쌍허게 되았당게. 얼굴도 이쁘고 그런디 참 안 되었어야.”
영훈은 대꾸를 하지 않고 애간장 태우는 슬픔을 삼킨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는다. 안방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린다.
“미선이 갸가 우리 영훈이를 한 번만 만나보고 싶다고 혔대야.”
“고건 안 되제. 우리 영훈이가 폐렴에 걸리면 큰일인 게. 안 그려? ” “고건 안 되지라우.”
영훈은 밥을 먹다 말고 밖으로 나온다.
“영훈아, 니 어디 가나? 밥을 그 쪼금 먹고.”
“가슴이 답답혀 미치겄당게요. 구절초 동산에 가서 바람 좀 쐬고 올팅게 걱정 말고 있으시요잉.”
영훈은 밤마다 구절초 동산에 나와 별을 보며 미선을 생각한다. 병원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미선. 안타까운 마음은 가슴 저미는 절절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멀리 밤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은 미선의 영롱한 눈이라고 믿기에, 무수히 반짝거리는 별을 보고 있으면 영훈의 마음이 조금 안온해진다.
‘착허고 순허며 예쁜 미선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랑게.’
“영훈아, 날씨가 추워. 후딱 들어가.”
별빛이 반짝거리는 허공 저 멀리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린다. 매우 귀에 익은 음성이다.
“미선! 훌훌 털고 일어나야 혀. 알았지? ”
“…….”
“워찌 대답이 없는 거여.”
영훈은 평상에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어둑한 하늘에서 미선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부서져 내리는 달빛을 받아 구절초꽃들이 수만 마리 물고기 비늘처럼 번쩍거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꽃들이 물 위로 튀어 올라 번쩍 거리는 피라미 무리 같기도 하다.
‘미선, 구절초 동산에서 함께 놀았던 때를 기억허지. 우리 다시 숨바 꼭질을 혀야 허니께 그리 알어.’
영훈은 달빛이 어른거리는 구절초 동산 꽃길을 걷는다. 미선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은가루를 뿌려대는 꽃길에 소녀가 나타나 영훈의 앞을 내닫는다. 깡충깡충 뛰기도 한다. 콩콩거리는 뜀박질 소리가 명징하게 들린다.
“미선! ”
영훈이 외쳐 부른다. 구절초꽃들이 기립하여 경청한다. 소녀가 멈칫 서서 뒤를 응시한다. 그녀가 분명하다. 영훈이 소녀를 보고 내닫는다. 소녀도 내닫는다. 구절초 동산에 달빛이 눈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미선! ”
영훈의 외침이 고요한 밤의 구절초 동산을 울린다. 바람 타는 구절초 꽃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밤의 정적을 흔든다. 손에 잡힐 듯 잡 히지 않는 소녀. 안달이 난 영훈은 달빛을 가르며 소녀 가까이 가기 위 해 속도를 낸다. 손에 작은 손거울을 움켜쥔 채. 내닫던 영훈이 구절초 꽃들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