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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성승철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가을호1 2024년 9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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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옛진성(鎭城)의 수호신이
덮개도 다 열어젖히고
버려진 배춧잎처럼 엎드려 있다

큰 물동이 작은 물동이 항아리가 자리다툼 하고 
온 마을 생명들이 매달리던 자리에
지나가던 강아지가 투덜투덜 적막의 무게를 달고 
길고양이가 긴 꼬리로 기다림의 깊이를 잰다

그 옛날 포작선 타고
까막만 불볕과 싸우고 돌아온 병사들, 
뱃일 마치고 돌아온 멸치잡이 선원들, 
갈증에 주린 나그네들,
썰매 타던 어린 벗들을 기다리는가

동헌도 성첩도 성문도 굴강도 다 사라진
바닷가 고성의 찬란한 영화에 잠기듯
깊은 침묵의 연필로 허공에 무언가를 써대는지
새 한 마리 고개 갸웃거리며 한참을 머물다 간다

족보 있는 샘인지도 모르고
아낌없이 퍼주는 마음도 모르고
물 한 바가지도 못 되는
나를 젖은 손으로 반겨주는 샘

섣달 그믐밤
할머니의 두레박질 소리
가슴 밑바닥을 긁어대고
새벽물 기다리다 불쑥 들어온
인숙 누님의 차가운 발이 나를 깨울 것만 같은

고향 떠난 메마른 가슴마다
추억의 불씨 지펴주는
깊이와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아직도 기다리며 반짝거리는 큰샘

*조선 성종 때 전남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내마을에 설치된 고돌산진성에 있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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