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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본인의 프리즘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야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김성달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이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9월 6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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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선생님 작업실을 방문한 날은 사흘 동안이나 장맛비가 계속 내리던 날이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액자 속 아프리카 여인이 먼저 반겨주는 작업실 안에서 선생님은 여전히 넉넉한 웃음으로 나를 반기신다. 직접 물을 끓여 타 주시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작업실에 퍼지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선생님은 느긋하게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인다. 언제나처럼 커피 향과 담배 연기 둘러싸인 선생님의 얼굴이 유난히 빛난다.

김성달_ 선생님 작업실의 커피 향과 담배 연기는 언제나 여전합니다.
유금호_ 김 작가, 빗속에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천천히 향과 맛을 음미하세요.
김성달_ 오늘 선생님을 뵈러 오면서 그동안 자주 선생님을 뵙기는 했지만 정작 소설창작에 관한 궁금한 점을 여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술 좋아하시는 선생님 모시고 술집으로 달려가기에 바빴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소설 쓰기에 관해 궁금한 것을 좀 여쭈어보겠습니다.
유금호_ 김 작가가 그렇게 대놓고 소설창작 이야기를 하자고 하니, 나도 오랜만에 학교에서 강의할 때가 슬그머니 떠오릅니다.
김성달_ 소설 쓰기에 처음 입문하는 분들께 각별하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먼저 부탁드립니다.
유금호_ 소설 쓰기에 관한 안내책을 볼쏘시개로 삼으세요. ‘소설창작 강의’니 ‘안내’니 하는 책부터 찢어버리세요. 친절하게 설명된 착상, 구상, 시점, 화자, 결말처리 등등의 안내들이 소설 쓰기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은 어차피 인생에 대한 개성적 접근과 구체적 표현입니다. 본인의 프리즘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야 합니다.
불교 수행 중 선(禪)을 생각해보세요. 수십 권 불경에 매달려 진리에 가까이 가는 대신 면벽, 진리에 도달하는 그 ‘선’의 자세가 인생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 쓰기’의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철학이나 종교적 이론의 습득이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다른 소모적 늪, 삶은 거창한 철학적 명제 없이도 영위되며, 진리는 늘 상대적입니다.
김성달_ 기성 작가들에게도 들려주실 창작자의 자세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유금호_ 자신의 내부 주변부의 삶, 날마다 벌어지는 사건과 그 사건들 뒤에 숨은 음험한 욕망과 음모에서 당신 자신에게 실제 충격이나 감동으로 와닿은 문제에 맞부딪쳐 생각해보세요. 작가 본인이 감동을 느끼지 않는 이야기는 어떻게 꾸며내도 독자에게 역시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보봐리 부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이야기했던 플로베르의 말처럼 소설은 결국 작가 자신의 발언입니다. 대단한 소재가 있다고 해도 작가에게 부딪쳐 충격으로 흡수, 용해 재창조되지 않는다면 소설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사일 뿐입니다. 문제는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감각의 안테나를 세우고 있을 때, 본인의 정서적 안테나에 걸려든 삶의 조각들이 창조의 주춧돌이 되는 것이지요. 릴케의 그 유명한 충고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자문까지는 아니지만 소설을 써야만 살아 있음이 확인될 만큼 절실하게 소설 쓰기가 본인 삶에 필연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는 말은 꼭 남기고 싶습니다.
김성달_ 선생님, 작가는 결국 자기가 아는 것밖에 쓸 수가 없겠지요?
유금호_ 그 말을 들으니 이미 타계한 오규권 선생께 직접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오유권 선생이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던 중 김동리 선생을 찾아뵙고 소설가의 길을 여쭈어본 모양입니다. 그러자 김동리 선생께서 대학 문과 쪽 공부를 했느냐는 질문에 대학을 안다녔다고 하자, 그럼 고등학교 때 문예반이나 그런 쪽에서 문학에 관심을 두었느냐고 다시 물었고, 오 선생은 고등학교도 안 다녔다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김동리 선생이 학교와 소설 쓰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다만 소설을 우리말로 써야 하니까 우리 말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라는말씀을 하시더라는 겁니다. 오 선생은 그날 밤, 기차가 고향 마을 영산포역에서 멈추자 서점으로 달려가 우리말이 제일 많이 실린 책을 한 권 달라고 했답니다. 큰사전은 아니겠지만 작은 국어사전 한 권을 산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날부터 낮에는 농사일을, 밤에는 우리말이 실린 책을 노트에 옮겨 쓰기를 일곱 번 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이제 농사와 농촌은 안다, 전라남도 고향 사투리도 안다, 그리고 우리말을 이제 웬만큼은 안다, 쓸 수만 있는 것만 쓰자. 그렇게 해서 우리 소설사에 독특한 농촌소설 영역 하나를 오유권 선생은 개척하게 됩니다. 저는 작가의 그런 자기 영역 확인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습니다.
김성달_ 소설은 허구(fiction)라는 명제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유금호_ 상상력 속에 창조되는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무엇을 쓰건 작가의 권한에 속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상상력이라는 자체가 현실적 기반 없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어느 때인가 자각하게 되지요. 소설가는 무엇이나 쓸수 있지만 결국 자기가 아는 것밖에 쓸 수 없다는 한계 인식, 바슐라르는 그래서 상상력이 물, 불, 공기, 흙의 물질적 4원소 위에 구축된다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이 거짓말의 세계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독자에게 진실로 가 닿기 위해서는 그 허구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구체적 리얼리티를 절대 조건으로 합니다. 소설가가 인생의 모든 국면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나 관심, 취미가 있다면 소설 쓰기에 도움이 될 것이고. 그것이 작가의 개성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겁니다.
김성달_ 마지막으로 소설가의 삶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유금호_ 소설가가 속한 시대와 환경, 혹은 극히 개인적인 고통과 참담한 기억의 잔해까지도 소설가에는 재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의미하더라도 중요한 기억의 편린들,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모래 속에 가라앉는 사금 부스러기 같이 빛나는 사랑과 이별과 절망의 조각들이 있습니다. 소설가에게만은 그것들이 재산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거대한 역사적 체험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기취향은 있을 수 있습니다. 특정 식물이나 동물, 인류학, 역사, 종교, 스포츠, 영화, 범죄, 해부학, 바이러스, 우주공학 뭐든지 좋습니다. 세계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지만 영역을 좁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을 심화 확대 시켜 놓으면 그것들이 소설가에게는 은행 잔고같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자산이 됩니다.
실제적 삶의 다양한 현상들은 소설가에게는 단지 소설적 재료에 불과합니다. 필요한 인생의 파편들에 대한 선택권은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몫, 잡다한 현실적 삶이 70∼80매 분량이라는 제한된 양식, 혹은 1,000여 매의 장편 양식 속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실제적 삶은 축약, 혹은 생략되고, 때로 과장, 강조되고 굴절됩니다. 이 선택에서 소설가는 실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 때도, 뿌연 달빛이나 안개를 통해서, 혹은 자기식의 독특한 컬러 필터를 통해서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삶은 소설가에게 재료일 뿐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김성달_ 선생님 주어진 지면 때문에 이쯤에서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강단에서 학생을 지도한 선생님의 창작론이라 그런지 귀에 속속 잘 들어와 박힙니다. 감사합니다.
유금호_ 덕분에 나도 소설창작론에 관해 몇 마디 해보았습니다. 자, 그럼, 우리 한잔 하러 가야죠.

자리에서 일어난 선생은 싱크대 수납공간 서랍 속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 내 손에 건네주시고는 쾌활하게 말씀하신다.

유금호_ 단골 식당에 우럭찜을 부탁해놨으니 안주로 해서 한잔 하고 갑시다. 두어 계절만에 좀 많은 말을 했더니 목이 컬컬합니다.

집필실 출입문을 잠그고 그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잠시 서 있던 선생님이 내 왼팔을 잡으며 말씀하신다.

유금호_ 김 작가….
김성달_ 네에, 선생님….
유금호_ 이제 술 좀 줄이고 소설 쓰기에 더욱 진력하세요. 시간은 마냥 기다려 주지 않는다오.

김성달_ …….

선생님과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생님의 단골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이 원고는 故유금호 선생님의 소설창작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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