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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진희(전북)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9월 6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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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백을 인터뷰하기 위해 미술관을 찾은 날은 유난히 날씨가 맑았다. 바람은 초여름의 먼지를 몰고 사라졌고, 맑아진 시야는 미술관 앞으로 펼쳐진 들판의 끝으로 시원스레 뻗어 나갔다. 먼 들판의 끝엔 두 개로 쪼개어진 채계 산이 조각상처럼 서 있었는데, 쪼개어진 산등성이를 출렁 다리가 느슨하게 잇고 있다. 누구라도 이곳을 찾게 되면 품게 되는 의문이 있을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외진 곳에 미술관을 지어 놓았을까.’ 대로에서 논길을 따라 굽어진 길을 한참 들어와서도 산기슭 아래 미술관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곳은 미술관이라기보다 문화백의 작업실에 가까웠다. 문 화백은 전시관 중앙에 작업실을 꾸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거장의 작업 과정도 엿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거장의 작업실을 볼 기회가 없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여느 갤러리와는 차별화된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약속한 시각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산책하러 나가고 없었다. 캠핑용 의자와 물감과 붓들이 흩어진 작은 책상이 놓인 작업 공간에는 비비다 만 물감들이 팔레트 위에서 굳어가고 있었다.
“팔레트에서 비벼낼 수 있는 빛깔이 열이라면 저는 아직 다섯가지 밖에 모릅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림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오래 전 그가 어느 미술평론가 앞에서 한 인터뷰의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지나친 겸양이라는 평가들과 함께 예술의 지난한 과정을 생각한 다면 겸양에 그치는 말이 아니라는 비평가들의 의견들이 지면을 채웠다. 자기 분야에 일가를 이룬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것이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인생의 여정을 거친 후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든 예술이든 정말 정답이 없는 건지 아니면 뭐라고 딱히 규정하기 어려우니 모르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해답은 개인이 찾아내야 할 몫이란 의미로 다가왔다. 전북화단의 거목으로 지칭되는 화가의 팔레트가 눈으로 들어왔다. 여러 빛깔의 물감들이 그 위에서 수없이 젖었다가 말라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무로 된 낡은 팔레트는 그의 생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젤 위로 그의 대표작 붉은 산이 놓여 있었다. 그가 붉은 산을 발표한 건 2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붉은 산을 손보고 있다는 게 다소 의아했다. 약 속 시각이 조금 지나자 청바지에 캡 모자를 쓴 캐주얼 차림의 화백이 들어왔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습니다.”
산책하러 나갔다가 갤러리로 들어선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흔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천진한 미소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문 화백은 우리 연구소 고문으로 있기도 해서 정기 총회에서 본 적이 있었다. 김 소장이 직접 운전을 해서 모시고 올 정도로 연구소 측에선 정성을 꽤 들이고 있었다. 총회에선 말수가 적었고, 조용히 식사하며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만 보였다. 유격대 전사였던 이력과는 달리 마르고 작은 키에 머리가 하얗게 물든 노장을 멀찌감치 무감각하게 지켜봤다. 그런 나로선 화백의 미소에서 느껴지는 천진함이 의외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매일 산책하러 다니시나 봐요.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제가 건강 하나는 타고났습니다. 아주 건강하죠.”
그는 자신의 건강을 장담했다. 그리고 작업실 중앙에 놓인 붉은 산으 로 시선을 주고 있는 나를 향해“어려운 시절에 밥을 챙겨줬던 식당 주인에게 준 선물인데, 다시 손을 봐주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와, 이걸 선물로 주셨다고요? ”
붉은 산이 그의 대표작인 걸 알았던 나는 식당 주인은 과연 이 그림의 가치를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더욱 무구한건 문 화백의 다음 말이었다.
“집에 붉은색 그림을 걸어 놓으면 운이 좋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 그림을 좋아합디다. 그래서 집에 걸 수 있도록 그림 크기를 줄여서 다시 그려서 선물했지요.”
지인이 이사하면 선물로 사 가는 몇만원짜리 사과 그림이나 쨍하니 피어 있는 해바라기 그림 정도로 붉은 산을 말하는 뉘앙스가 자못 겸손해 보였다. 그의 그림이 점당 몇천에서 억 단위를 호가한다는 걸 모를 리 없는 그가 뭇 식당에 걸어둘 그림을 손봐주고 있는 모습에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는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지평을 넓힌 거장의 화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이력엔 늘 빨치산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던 해 한국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발발하던 날 그는 걸어서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러니 까 그는 가장 가까이서 전쟁의 낱낱을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는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위해 갤러리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가 노년에 택한 산 시리즈 중 유독 붉은 산이 많은 이유였다. 그가 빨치산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의미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전향을 하고 예술가로서 삶을 사는 거장에게 선뜻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꺼낸 말이 “새내기 서울대생이 남부군이 된 건 너무나 비약적인 전개 같은 데요. 입산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있을까요? ”였다.
“살기 위해선 입산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죠. 꼬박 보름을 걸어 고향에 닿았는데, 집이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은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 새겨져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외 상을 남겼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화백을 괴롭히는 것 같아 다음 질문을 쉽게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
“미대생이 되기 전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농구를 그만두게 되었을까요? ”
문 화백에게서 의도적으로 뭔가를 끄집어내려는 나의 의도가 너무 직접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며, 나는 멀찍이 거리 조절을 하며 조심스레 질문을 이어 나갔다.
“경기 도중 다쳤었죠. 선수 생활이 어렵게 되었는데, 공부 쪽으로는 재능이 없어 선택한 게 미술이었습니다.”
“농구와 미술도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 영역인데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몸과 예술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모두 예민한 감각을 요구하니까 요. 공부는 머리의 영역이니까 성미에 안 맞은 거죠.”
그가 소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겸손 덕분에 대화의 흐름이 한결 부드럽게 이어졌다.
“아무리 예술 영역이라도 서울대에 들어가려면 두뇌의 영역을 무시 할 순 없을 것 같은데요.”
“옛날에는 공부 못해도 그림만 잘 그리면 대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구력 하나는 타고난 것 같습니다. 뭔가를 시작하면 꾸준히 오랫동안 파고드는 기질 말이죠.”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그를 들뜨게 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내내 경쾌한 리듬을 타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나는 그가 기분 좋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틈틈이 붉은 산의 이야기를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탐색하고 있었다. 문 화백이 어떤 이념이 아로새겨져 사상을 실 천하기 위해 회문산으로 들어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 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면 짐작만 하는 것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우리 연구소 역사 문화 프로젝트 에서 내가 인터뷰해야 할 인물이 모두 빨치산 출신이었다. 김 소장은 전북 지역 출신이 아닌 나를 의도적으로 지목한 것 같았다. 선입견 없이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 주길 바란 것일 수도 있고, 거부 반응이 없는 사람으로 지정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선입견이든 거부 반응이든 설사 내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건 까다로운 일임은 분명해 보였다. 연구소의 일이 한 분기가 넘어갈 때였다. 연초에 기획한 프로젝트 자료를 모으기 위해 강연장을 찾았다. 자서전을 낸 비전향장기수 송씨가 문화회관에서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날 강연장엔 문 화백의 모습도 보였다. 한 세기에 육박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문 화백이 빨치산으로 살았던 시기는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짧은 생의 이력을 부정하지 않는 건 분명해 보였다. 지역 연구소의 고문으로 어느 무명의 비전향장기수의 강연장에 기꺼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어쩌면 그에겐 같은 맥락의 연속일지 모른 다고 생각했다.
이번 강연의 사회를 맡은 김 소장은 송씨를 간략하게 소개한 뒤, 문 화백과 송씨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강연장에는 특별히 문 화백님께서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문 화백님께서는 광주교도소에 갇히셨을 때 그곳에서 송 선생님을 만난 인연이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송 선생님의 강연 소식을 듣고 기꺼이 참석해주셨습니다. 강연 전에 먼저 문 화백님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문 화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어디가 불편한지 한쪽 팔로 연단을 짚어 몸을 슬쩍 의지했다. 미술 관에서 봤던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어 보였다. 문 화백은 약간 구 부정한 자세로 나직이 격려의 인사말을 했다.
“우리나라가 분단된지 벌써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분단의 아픔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가장 힘들고 격정적인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거나, 저처럼 아흔을 넘긴 나이가 되었지요. 오 늘 강연하러 오신 송 선생님께서도 지난 세월 동안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제가 광주교도소에서 송 선생님을 만났을 땐 그야말로 청년의 모습이었죠. 아직도 그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오늘 이렇게 뵈니 그때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참으로 강직하고 선한 면모를 지닌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이 격려해 주시고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은 남부군을 거쳐 광주교도소에 투옥된 이력을 공유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관통해 온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한 사람은 전향을 통해 예술가로 사는 삶을 부단히 완성해왔고, 한 사람은 전향하지 않은 이유로 통고의 세월을 보낸 삶의 대립적 양상이 두 개의 극점을 이루고 있었다. 때때로 삶은 자신도 모르는 구도를 형성하고 우린 그저 그 안에 담긴 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전쟁이라는 구도는 너무나 선명해서 개인이 삶의 구도를 바꾸거나 선택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삶의 구도를 형성해 왔다. 광주교도소에 서 문 화백은 남 화백을 만나 다시 미술을 시작하게 되고, 송씨는 사형 선고를 받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목숨값에 대한 유인가를 찾아야만 했다. 송씨가 전향하지 못한 데는 그의 주위를 둘러싼 삶의 양상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강연에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든 송씨가 이런 강연은 처음이라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9·28 서울수복 때 임실 성수산에서 입산했던 빨치산이었 다. 임실유격대를 거쳐 407연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군사 재판에 부 쳐져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만 20년의 복역 기간을 마치고 사면되었다. 이후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렸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안전법에 저촉되어 다시 구속되었다. 그렇게 감옥에서 살아온 세월이 33년 이었다.
“한 오만 명 정도가 남쪽에서 유격 활동을 했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 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빨치산의 내용은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고, 누구 집 제사라도 있으면 겨우 그 사람에 대해 기억하는 수준이죠.”
송씨는 결국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빨치산으로 살아온 생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분단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우리가 조화롭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했다. ‘분단 극복과 조화로운 삶’명확한 진단을 내놓은 것에 비해,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막연히 그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삶의 고뇌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내기를 바랐다. 분단의 역사가 오래된 화석처럼 느껴졌다. 화석화 되어버린 역사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는 너무도 오랜 기간 대립적 대치 관계에 있었기에 팽팽했던 긴장의 끈은 쉽게 느슨해졌다가 잊히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뭔가, 도대체, 왜 이 길에서 목숨을 바쳐야 하나.”
그가 스물 한 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 순간까지도 이념을 위해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았다. 내게 이념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거기에 목숨을 건다는 건 너무나 막연한 무모함으로 다가왔다. 그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오롯이 자신의 삶, 그 자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장기수로 살아 온 이유가 순전히 이념으로만 귀결된다면 굳이 강연을 열어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개인적인 차원의 불가피한 이유가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나는 송씨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해방되고 난 후 일본 선생에게 아첨한 자들, 당시 힘이 있다고 아이들을 함부로 때린 학생들에겐 학생들 자체적으로 벌을 주었습니다. 괴롭힌 학생은 괴롭힘을 당한 학생을 업고 운동장 스무 바퀴를 돌거나 하 는 방식으로 정리를 했었지요. 하지만 어른들의 사회는 달랐죠. 일제 말엽에 나라 팔아먹고 일제와 결탁하여 식민지하에서도 배불리 먹고 산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잘 살았으니까요. 어른들의 사회는 아이들의 사회만도 못했습니다. 잘못에 대한 반성이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미군이 9월 8일에 인천으로 상륙한 후 삐라를 살포했습니다. 그걸 포고문 제1호라고 하지요. 역사적으로 엄연히 존재한 사실인 데, 교과서에서 이런 걸 가르치지 않습니다. 포고문 제1호에 ‘지난날 직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전원 복귀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에는 정말 해방된 민족으로서 기쁨에 차 있었거든요. 그런데 미군들이 유치장에 있던 친일파들 다 석방하고 일제 시대 직장 가지고 있었던 친일파들 1, 2계급씩 높여주었습니다.”
송씨는 자신이 겪은 해방정국의 모습을 더듬어 나갔다. 대구인민항 쟁과 여순 십사 연대 사건 성명서의 이야기까지 같은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동족상잔의 비극적 역사가 연이어 나왔다. 이날 문화회관에는 우리 연구소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역사 소설을 쓰는 작가들, 지역 의 자칭 진보 진영이라고 말하는 의원들까지 송씨의 목격담과 증언을 듣기 위해 와 있었다. 지금껏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음지에서 목숨만 연 맹하며 살아온 비전향자장기수의 강연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호기 심을 넘어 하나의 사료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양에서는 만델라가 27년 감옥 생활을 한 걸 보고 세계적으로 최장기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30년 이상 장기수로 살아온 사람들이 100명도 더 됩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장기간 모진 고통을 극복하면서 지조를 지킨 예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역사적 사실이지요. 죽음에 대해 결심하지 않고는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없는 겁니다. 사회주의도 좋지만‘왜 여기서 죽어야 하나’에 대한 정확한 답이 있어야 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사회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의 어버이인데, 이들을 종놈 부리듯이 부리고 있는 썩어 빠진 사회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줄곧 생각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로 바꾸기 위해, 그런 신념에 목숨을 건다는 것.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면 적어도 자신을 이해시킬 만한 명목이 있어야 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사회 변화의 측면에 둔다면, 그래, 적어도 대의적 명분 하나는 생기는 것일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칠 때였다. 지금껏 경청만 하고 있던 관객 중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한 이념이란 걸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미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멸망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강연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뚫고 질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한이 썩어 빠진 세상이라면서 2000년도엔 왜 북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비전향자를 북으로 이송해주지 않았습니까. 남한에 남아 있으면 서 전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전향할 의지가 없으면 북으로 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후 같은 해 9월 2일에 판문점을 통해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되었다. 비전향자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 된 2000년도, 그해는 세기가 바뀐다고 야단이었던 새천년의 해였다. 사람들이 밀레니엄 베이비를 앞다투어 낳는 바람에 일시적으 로 출산율이 오른 해이기도 했다. 남북한이 떠들썩했을 텐데도 나는 비 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기억하지 못했다. 같은 과 선배를 따라 들어갔던 작은 회의실에서 노이즈가 잔뜩 낀 북한의 모습이 영상으로 송출되었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고, 내가 알지 못하는 북한의 얘기들을 들 은 것 같기도 했다. 낡은 화면 속 사람들이 나와 같은 민족이라는 아련한 아픔 같은 것이 만져졌었다. 하지만 어떤 이념을 위해 투쟁할 필요 가 없다고 믿었던 시기에 우리는 주로 연애를 생각했고, 토익을 공부했고, 전공 도서보다 취업을 위한 수험서를 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는 이념 속에 목숨을 걸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왔다는 사 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송씨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관객석을 응시하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저는 41세에 감옥을 나와 46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계셨고 가정도 있었고 애도 있었습니다. 가족이 이곳에 있는데, 이들을 두고 북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전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전향할 생각이 없습니까? ”
질문은 더욱 날카롭게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네, 저는 아직도… 전향할 생각이 없습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송씨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중 심을 잡는 그를 누군가가 무참히 밀어버린 것처럼 그가 휘청대기 시작 했다.
“그건…, 지금에 와서 내가 전향을 한다면 그건 내 전 생애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어떤 민족이든 외국에서 침략했을 때 저항한 민족은 살아남았고 그러지 못한 민족은 다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놈들과 싸워서 이긴다는 게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처음부터 진다고 생각하면 못 싸우는 법이죠. 하지만 민중이 결속하면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을 결속시키는 힘, 이게 어마어마한 겁니다.”
그의 슬픈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의 톤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간간이 휴지를 두며 띄엄띄엄 말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땐 자기 생각을 고르는 것처럼 골똘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골똘함은 뭔 가 밑천이 부족해진 느낌을 전달했고, 사람들은 그런 빈틈을 파고들며 공격했다.
“도대체 민중들이 결속해서 어떤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는 겁니까? 민중, 민중 하는데, 그런 감상에 젖어 현실성 없이 허상만 좇게 되는 거 아닙니까! ”
얼굴 없는 관객이었다. 계속해서 같은 사람이 대꾸하는지 질문자가 달라지는지 어느 순간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자기소개와 질문의 허락을 구하는 절차가 모두 생략된 채 무례한 질문들이 강연자의 발언 하나하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 항공모함을 동원해서 전쟁 일으키려고 했지만, 전쟁 못 일으켰습니다. 결국, 미국인들이 서약서 쓰고 물러났습니다. 도끼만행사건만 해도 그렇지요.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 봐 야 합니다.”
어느새 슬픈 표정을 거둔 송씨가 평정심을 찾은 듯 자기 생각을 말했는데, 이건 마치 정면으로 승부를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같았다. 곧 관 객석이 술렁였고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연장을 나가 기 시작했다. 이어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송씨를 똑바로 응시하고 말을 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그런 시대착오적인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원.”
그는 송씨를 비난하는 말만 남겨 둔 채, 강연장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강연장에 남은 사람들은 한순간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한 분위기 속에 덩그러니 담겼다.

송씨는 감옥을 나와 서울에 있는 한빛탕제원에서 일했다. 대부분의 비전향장기수들은 감옥을 나와 적을 둘 곳이 없었다. 가족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았고 출소했을 당시엔 몸이 상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이어서 어디서 경제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이들 에게 탕제원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삶의 거점이 되었다. 송씨는 이 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까지 꾸리게 되었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모여서 만든 탕제원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거점을 두고 운영되었는데, 문 화백은 전국적으로 출소자들을 지원하는 한빛탕제원에 오래 전부터 지원금을 보내 주고 있었다. 그의 이런 행적 들은 의도적으로 찾아서 파헤치지 않으면 외부에서는 모를 정도로 조용히 흘러왔다. 나는 송씨와 문 화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어 보이는 음지에도 따뜻하게 내 미는 손길들이 있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나는 문득 문 화백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언제 나간 건지 귀빈석에 앉아 있던 문 화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강연장이 술렁이기 전 조용히 강연장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귀빈들의 참석은 요식적인 행위로 보통은 강연이 시작되고 10분 내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의 부재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차라리 이런 소요의 순 간에 문 화백이 부재한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간 강연장엔 연구소 팀원들과 지역 의원, 작가들처럼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과 송씨와 같은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로 보이는 머리가 하얀 노인들만이 띄엄띄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강연을 시작할 때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엿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하지만 관심이라고 하여 모두 같은 성격 의 관심은 아닌 듯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 운을 띄워 강연의 분위기를 바로잡아줬으면 싶을 때였다. 송씨가 처연히 입을 뗐다.
“아버지와 형님, 모두 입산하여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허니 제가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는 건 저로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와 형님은 4·19혁명이 있기 전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형님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치열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제게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셨죠. 부모 형제를 그렇게 보낸 제가 전향을 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불편했던 분위기는 이제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오히려 이 전보다 송씨가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다음 말을 이어 나가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가 원하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의 아버지와 형님이 입산하게 된 배경과 이유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들 이 이어져 나오길 바랐다. 하지만 송씨가 그 몇 마디를 끄집어내는 데 온 에너지를 다 쏟은 것처럼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김 소 장이 연구소 자료집에 넣을 내용과 관련하여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지역과 관련된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무엇입니까? ”
김 소장은 강연이 끝나기 전 자신이 준비해온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서두르는 눈치였다. 김 소장이 흐름을 끊어내지만 않았어도 송씨는 그의 무의식으로 깊게 가라앉아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퍼 올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김 소장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놓쳐버린 뭔가를 되찾기는 영영 어려울 것 같았다.
“그건 아무래도 쌍치에서 있었던 돌고개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송씨는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아련해져서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해방구 농민들이 돌고개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벼가 자라 이삭이 나오고 뜸이 들 무렵 경찰들이 돌고개 일대에 보루를 구축했습니다. 전 북·전남 경찰 400여 명이 이곳에 배치되었죠. 빨치산 보급로 차단이 구실이었지만 사실은 가을 곡식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농민들이 우리 연대를 찾아와 돌고개 경찰들을 축출해 달라고 호소했었죠. 두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1951년 시월에 우리 부대와 408연대, 농민 2000여 명이 총동원되어 다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돌격을 외치며 빨치산과 인민들이 목이 터지라고 함 성을 외쳤습니다. 경찰들은 진지를 포기하고 모두 도주했지요. 그해 가을 우리는 벼 팔만 석을 수확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송씨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과거의 이야기들 속에 사는 사람 같았다. 강연장에 남은 어르신 중 돌고개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날에 관한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이후에도 빨치산 대원들의 육탈된 뼈가 수북이 쌓여있는 여 분산 전투에 관한 이야기와 조직과 동지들로부터 버림받은 배반에 관 한 이야기들도 이어졌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이념에 대한 회의감도 수많은 이야기 속에 앙금처럼 침전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방 군과 경찰들의 민간인 학대에 대한 증언이 강연장에 남아 있는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치산으로 인해 피해를 본 민가에 관한 이야기들도 맞대응하듯 거론되기 시작했기에 어느 쪽의 잘잘못을 재고 따지고 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아니 무의미해 보였다. 이제는 송씨의 강연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들이 한데 얽히고설켜 기록되지 않은 과거를 소환하고 있었다.
“임실경찰서에 빨치산들이 급습한 사건 기억하시는지….”
송씨만큼이나 머리가 하얀 어르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때 우리 동지들도 희생되었으니까요. 기억하고 말고요.”
송씨가 대답했다.
“그날은 우리 동지들 너덧 명이 임실읍에 있는 경찰서로 내려가 자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자수하러 내려간 그날에 유격대가 경찰서를 공격한 거지요. 경찰들뿐만 아니라 자수하러 간 동지들까지 모두 희생 되었던 안타까운 사건이었어요.”
“경찰서에 자수하러 내려온 빨치산 중 2명은 서에 머물지 않고 읍에 있는 친인척집으로 가는 바람에 살았다고 하더군요. 헌데, 함께 유격대 생활을 하면서 동지를 못 알아봤을 리 없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송씨는 어떤 대답을 하려다가 침묵했다. 전쟁 중 조직을 배신한 자에 대한 자비가 있었을 리 없다는 걸 그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수를 위해 빨치산 조직원 너덧 명이 사라진 것을 알고 적에게 진지를 들키기 전 미리 선수를 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상황들, 옆에 있는 동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어느 것 하나 확 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내던져진 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왔을 그들의 삶이 숨 막히도록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송씨의 삶의 이야기가 잔잔히 진술될 줄 알았던 이날의 강연은 예상 하지 못한 대치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여전히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선명히 드러내며 끝을 맺었다. 그리고 김 소장은 이 속수무책의 분위기를 끈덕지게 무마하려 했다.
“이번 강연을 통해 외국인이 만들어 놓은 38선을 이제는 우리 민족이 스스로 녹여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절실히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대립과 갈등 속에 살아왔는데 이제는 제발 소통하고 화합하는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송 선생님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며 이번 강연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소장의 발언은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떨 땐 부지 불식간에 나온 말이 상대의 이미지를 거스르는 경우가 있는데, 김 소장은 가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38선의 경계와 휴전선의 경계가 다르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발언과 현재는 휴전선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식의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부 족해 보이는 표현들 때문에 괜한 부끄러움이 나의 몫으로 밀려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귀빈석에 문 화백이 앉아 있었다. 어쩌면 강연장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과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강연을 한 사람 은 송씨였지만 왠지 이번 강연에서 에너지를 빼앗긴 사람은 문 화백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연이 모두 마무리되고 문 화백은 송씨에게 그림 하나를 선물로 건넸다. 그림의 제목은‘붉은 산’이었다. 여러 개의 붉은 산 시리즈 중 산의 지명이 없는 제목 자체가 ‘붉은 산’인 작품. 송씨의 강연 소식을 듣고 70호로 다시 그렸다고 했다. 이때 김 소장이 문 화백을 향해 붉은 산의 의미를 물었다.
“화백님, 붉은 산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송 선생님께 선물로 주시는 겁니까? ”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강연장의 불이 나갔다가 들어온 것처럼 머릿 속에 불이 번쩍였다. 그리고 문 화백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단 몇 초 동 안, 시간은 초를 지나 알갱이 단위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붉은 기운은 집안에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선물로 주면 좋아하더군요. 여기에 사용한 붉은 물감은 특히 색감이 좋아서, 작품이 한창 알려졌을 땐 독일산 라이트 레드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합디다.”

문 화백은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미소 뒤에 굳게 다문 입술은 그 이상의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김 소장은 얼른 강연자인 송씨에게로 시선을 돌려 간단히 인사말을 건넸다. 나는 정전된 방 안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문 화백과 송씨에 게로 다가가 보고서에 쓸 사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뒤 두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캡모자에 점퍼를 걸친 캐주얼 차림의 문 화백과 하얀 셔츠에 검정색 양복바지를 입은 단정한 모습의 송씨가 환하게 웃었다.
문 화백의 부고 소식을 접한 건 봄의 끝자락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오후, 기사를 뒤적일 때였다. 그의 회고전을 알리는 기사에는 미술 관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고인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그가 없는 미술관을 다시 찾았을 때 300호 캔버스에 그리다 만 구 장군 폭포를 보게 되었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작품이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막 태어나려는 폭포처럼 미약한 형태를 갖춘 채 엷게 채색되어 있는 그림은 덧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추상으 로 가기 전 구상의 단계에 멈춘 그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이 추상화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구장군 폭포도 결국엔 구체적 형 체가 뭉개어진 채 문 화백의 내면 풍경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가 그린 바다와 하늘과 산들은 더 구체적인 지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디를 그리든 내면의 풍경이 되어 캔버스 위에서 구체적 형상을 뭉개버린 빛깔로 현현했다. 사실적 입체들이 사라지고 평면화 된 그림 위로 도드라지는 것은 과감하게 채색된 빛깔과 선명하게 그어진 선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그림은 추상의 빛깔이다. 내가 그토록 문 화백에게 듣고 싶었던 붉은 산의 의미도 기실 그가 빛깔 속에 뭉개 놓은 지나온 형상에 불과하다. 뭉개 놓은 빛깔을 굳이 걷어내고 낱낱의 아픔을 읽어내려 했던 어리석음이, 내 아둔함이 울컥 울음처럼 밀려들었다.
갤러리 중앙엔 여전히, 그가 사용하던 캠핑용 의자와 물감과 붓들이 흩어진 작은 책상이 남아 있고, 비비다 만 물감들이 팔레트 위에 굳어 있다. 그리고 사방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노작(勞作)들이 예전과 같이 전시되어 있어 갤러리의 시간은 지난 여름 그를 만난 시간에 멈춰져 있는 듯했다.
“제 몸엔 아직도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지리산 총격전에서 맞은 총 알은 오른쪽 어깻죽지 아래를 관통했지요. 그 바람에 팔을 잃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팔로 지금껏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버릇처럼 대답 끝에 천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문 화백의 어깻죽지에 남아 있는 상흔은 그의 몸에 새겨진 이야기였다. 흉터는 아문 뒤 에도 말을 한다고 했던가. 총알이 지나간 자리는 빨치산 시절을 기억하고 언제든 그를 과거로 데려가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 속에 흉터 가 희미해진 만큼 고통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그의 어깻죽지를 관통 한 것이 총알이 아닌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총상을 입는 바람에 국방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죠. 그때 총상을 입지 않았다면 지금 쯤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남 화백을 광주교도소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에 저도 없는 거나 마찬 가지거든요. 그분은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인격체였죠. 총기로 가득한 눈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제대로 바라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언젠가 제게 보낸 서신에 미술을 하려면 먼저 인간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를 남기셨습니다. 자네는 인간 됨됨이가 되었고, 생각할 줄 아니 절대로 붓을 놓지 말라는 글을 보내셨는데, 이 구절은 제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에게로 날아든 총알을 남 화백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운 명적 흐름의 하나로 회고했다. 전쟁의 발발, 회문산으로의 입산, 지리산에서의 총격전, 어깻죽지를 관통한 총알, 광주교도소 수감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종국의 만남이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하던지요. 이곳이 제가 머물 곳이란 생각이 든 건강바람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 미술관을 짓는다고 했을 땐 처음엔 콧방귀를 꼈었죠. 하지만 제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운명이었는지 바람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도 그의 삶을 예측하지 못했다. 전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노년을 준비하고 있던 화백은 결국 섬진강 줄기를 따라 유려하게 산맥이 펼쳐 진 고향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10년을 거주할 계획을 하고 300 호 캔버스 열 개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가 섬진강의 바람을 맞으며 작업을 한 기간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섬진강으로 들어오기 전에 점을 봤었지요. 처녀 보살의 점괘에 내가 99세까지 산다고 나왔습디다. 점괘가 맞는다면 10년은 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 싶어서 대형 캔버스 10개를 사서 이리로 살림살이를 옮겼지요.”
지난해 초여름 내가 섬진강 미술관을 찾았을 때 300호 캔버스가 미술 관 한쪽 벽으로 겹겹이 세워져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캔버스들은 거장의 집념과 열정이 이미 깃든 것처럼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들어선 화백의 모습은 아흔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강해 보였기에 처녀 보살의 점괘가 아니더라 도 10년은 너끈히 생을 이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처녀 보살의 말 에 어떤 영험함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약된 생의 기간에 한 번 더 심 장을 울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 하지만 삶이란 어느 날 문득 예 측을 벗어나기도 해서 누군가의 걸음을 세워 놓은 채 지나온 길을 우두망찰 바라보게 만든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문 화백의 이야기는 오롯이 산 자의 몫으로 남았다. 지난 초여름에 읽어내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이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난독증 환자처럼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을 느낀다. 공들여 적어 놓은 일기처럼 펼쳐진 그의 그림들이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무슨 미련이 남아 보고 또 읽어본다.
하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되었던 새천년에 세상에 내놓았던 <바보 자화상>은 너무도 슬픈 구도를 머금고 있다. 검붉은 배경과 하나의 평면을 이룬 흉상은 유물이 되어버린 청동 조각상처럼 침울하다. 문 화백은 온갖 허물을 벗고 본연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그의 자화상엔 아직 허물을 벗지 못한 자아가 하나의 물상 처럼, 죽은 예수처럼 새겨져 있다.
적성산의 가을, 지리산의 녹과 적, 임실의 운암강, 산청의 하늘, 구름, 추정, 솔바람, 산운, 바다, 설정(雪情) 그리고 붉은 산. 그의 고향을 둘러 싼 산맥의 가을은 조용히 붉었다가 치열하게 검붉었다가 어두워졌다가 환해지기도 한다. 그가 야수파의 범류임을 극단적으로 증명하려는 것 처럼 붉은 산은 강력한 색의 선택과 보색의 과감한 대비로 구사되어 있 다. 비스듬히 빗금을 그어 붓의 질감이 살아 있는 선은 선연히 여각을 이루었는데, 강렬한 보색대비 때문에 여각이 더욱 두드러진다. 반직선 하나를 접점으로 붉은 산은 녹색의 산과 두 개의 각을 이루며 면적을 공유하기도 한다. 단단히 응축된 산야의 구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문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틀인 사방의 직각마저도 그림으로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틀 위에 그어진 구도는 감각적이고 안정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인 듯 경계를 넘나 드는 붓의 흐름을 찬찬히 따라가 본다.
그림은 직각 안에서 이루어지고, 직각에서 더 넓게 나아가지 못한 각 의 구도가 삶의 범주처럼 다가온다. 한 각에 대한 다른 각, 반직선 하나를 공유하는 두 개의 각이 그가 지나온 삶의 여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빨치산의 시절도 전향 후 걸어온 예술가로서의 여정도 그에 겐 그저 삶을 완성해 내기 위해 지나온 형상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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