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영덕 와우산에서 뜨는 세종시 정동진 일출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옥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9월 667호

조회수62

좋아요0

“이 선생, 우리 다음엔 어디로 탐방 가면 좋겠나? ” 이 선생은 멈칫했다. 학교 현장에서 고향사랑인문지리지 동아리 활동할 때 아이들에게서 듣던 소리다. 해맞이 가 모임의 주제로 떠올라 한참 열띤 토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산악회 회원이 산에 갈 때는 안 모이고 회 먹으러 간다 니까 다 모이냐고 핏대를 세웠던 이도, 인류를 구하든지 나라를 구해 보려 모인 협회에서 본래의 목적보다 인맥을 내세워 사업 확장을 도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무슨 협회를 박차고 나온 이도 눈을 빛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동서(東西)회에 합류한 사람이 장 교수였는데, 그 누구보다 모임 참석에 열의를 보여 다른 사람을 얼떨떨하게 했다. 이번엔 장 교수가 숫제 이 선생의 학생을 자청했다.
그래서 정동진이었다
동쪽에서 해가 뜨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아침을 맞이하자는 게 아니다. 친목 도모나 하자고 동해니 태양이니 운운한 것도 아니었다.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이 확정된 행정수도 세종시를 향한, 새 시대에 맞는 정동진을 위한 행보가 될 것이다. 세종시 정동진이라니.
“역사와 민족 문화. 이 정도 무게는 되어야 금쪽같은 시간을 낸 우리 가 도전할 수 있는 거 아냐.”
이 선생이 영덕을 지목하고 일행이 동의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 선생이 일행을 먼저 안내한 곳은 죽도산이었다. 세종시가 행정도 시로 주목받던 2013년에 영덕군 축산항이 세종시 정동진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영덕 출신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수가 이론을 내세웠지만, 강릉 정동진에 밀려서 정동진이라는 이름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동진이라는 명칭 사용 권한이 강릉에만 있는 줄 알았다는 배경에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고 죽도산은 그런 현장이었다.
그랬던 것을.
세종시 정동진에 대한 세계전통해양문화연구소 김성규 소장의 초청 강연 참석자들은 정동진 역사에 관한 경천동지할 주장과 마주쳤다. 그 주장이 참석자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것은 지금까지 접한 그 어떤 주장과도 달랐고, 진취적이고, 독창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론 전개가 논리적인 데다가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
강릉 정동진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사대문 중 동쪽 출입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 즉 해나루라는 뜻이었다. 해돋이와 관계가 깊다. 해발 53미터인 고성산에 있는 영인정(迎仁亭)은 지금도 해돋이 명소다. 김소장의 강연 덕분에 흥인지문과 영인정에 사용된 인(仁)이 동쪽을 뜻함을 알게 되었을 때 유물과 유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명분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강릉 정동진이 조선시대 한양의 정동진이었다고?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도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한다는데, 이런 어마어마한 이론은 한두 해 고민해서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되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책을 파헤친다고 찾아졌을까.
“한 우물을 파야지. 미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지. 암, 그렇 고말고.”
논문 작성 때마다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일행을 한껏 스트레스에 빠지게 했던 장교수가 애정과 존경을 담아 공감을 나타냈다.
“여러분, 한양의 정동진이라면 고려시대 개경의 정동진도 있었을 까요? ”
이 선생이 짐짓 저음에 무게를 잔뜩 실어 일행에게 물었다. 일행을 둘러보던 이 선생의 눈길은 장 교수에게 고정되었다. 장 교수는 어깨를 으쓱하고 두 손을 높이 드는 시늉을 했다.
세계전통해양문화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개경의 정동진은 고려 조정에서 동해신묘(東海神廟)를 세운, 개경에서 정동 방향인 양양 낙산 해변 이다.
2013년 세종시 정동진을 주장하다가 강릉의 항의에 주춤해져서 세종시 정동진이라는 용어만 사용하지 못했던 게 아니고, 변변한 안내판 하나 세우지 못했던 영덕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정동진을 주제로 토론 하던 중에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물건은 아끼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며. 난 김 소장의 그 말이 참 마음에 와닿네그려.”
이즈음에서 이 선생이 뭔가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포르투갈 코아 계곡 암각화의 교훈을 주제로 울산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기획전 얘기였다. 이 선생의 말투와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모두들 옷까지 여미면서 귀를 기울였다.
포르투갈의 작은 도시인 포스코아 마을의 암각화는 구석기 시대부터 새겨져 왔으며, 발견과 동시에 댐 공사 때문에 수몰될 위기를 맞이했지 만, 정부는 이미 60%나 진척된 댐 건설을 포기하고 암각화를 보존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때 코아 계곡을 방문한 포르투갈 대통령이 했던 말은 유명해져 인구에 회자되었다.
“문화유산인 암각화는 수영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코아 계곡을 방문하고 댐 건설을 중단시켜 암각화를 지키는 일에는 포스코아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포스코아의 학생들이 암각화라는 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애들이 해냈군. 이름 없는 시민의 힘이지.”
“우리도 틀림없이 이름 없는 시민이지. 거대한 물결을 일게 할 마중물이 되어 보자고들.”
마중물 일행이 대밭산주차장에 하차했다. 죽도산을 지역에서는 대밭산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만호정이라는 정자와, 죽도산길이 모래로 이어진 모래돌섬길로‘경북동해안 국가지질공원’이라는 게시판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만호정으로 오르는 계단에 ‘지질명소 죽도산 육계도’ 라 명시된 글귀가 계단일러스트의 부분이 되어 있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쉽게 눈에 띄는 현위치가 나타나 있는 죽도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내도는 보이지 않았다. 외부로는 죽도산이라 알려놓고 지역에 서는 대밭산이라 하는 것도 좀은 탐탁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눈앞에 계단이 있으니 당연히 오르기는 했다. 지역에서야 너무도 잘 알고들 있겠지만 사전 정보 없이 외지에서 개별로 방문했을 땐 당황스러 운 일이 될 것 같았다. 몇 계단을 오르자 데크는 오른쪽 길과 왼쪽 길로 나뉘어 있었다. 아무런 안내판이 없는 길을 가야 하는 일행의 당황스러운 항의는 고스란히 지역인인 이 선생이 떠안아야 했다. 오른쪽과 왼쪽을 다툴 필요까지는 없었다. 해변 거주 여부와는 상관없이 바다 쪽을 선호했다. 영덕 블루로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 또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번 갈림길에서는 첫 갈림길에서보다 결정을 내리기가 까다로웠다. 바닷가 쪽으로 계속 갈 것인가, 정상 쪽으로 보이는 전망대로 향할 것인가 때문이었다. 죽도산전망대 의견이 조금 우세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온통 대나무였다. 죽도산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데크길을 따라 계단 끝부분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는 데크전망대가 나타났다. 데크에서 바라보는 북쪽 바다에는 테트라포드에 싸인 붉은 색깔 등대가 있었다. 데크전망대의 중심 바닥에 크고 둥근 모양으로 된 동판을 이리저리 살피면서는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 어디에도‘세종시 정동진’이라는 문구는 없었다. 이 선생이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김 소장의 강연 내용을 접한 일행은 이 대단한 이론이 반영된 어떤 구조물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이 선생이 탐방의 효과를 극 대화하기 위해 말을 아끼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실망이었다.
중심 원에는‘Center of eastern coast of Korea’가, 바깥 원에는‘해파랑길’과 ‘영덕 블루로드’가 새겨져 있었다. 세계의 몇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가 나타나 있었는데, 세계 6대륙의 도시를 골고루 새기는 세심함과 서울을 새기면서 통일 지향으로 평양을 새기는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세종시가 새겨져 있었다. 세종시까지는 180킬로미터다. 180킬로미터 떨어진 세종시에서 정동쪽 직선으로 축산항에 해가 떠오른다. 와우산에서도 세종시 정동진 일출로 맞이하는 바로 그 해를 정면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렷다.
아쉽게도 전망대 내외부 리모델링 공사 관계로 죽도산전망대까지는 통행이 제한되어, 전망대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외지인이 대밭산주차장을 어찌 알고 말할 수 있을까, 안내판 하나 없는 지질공원이라니. 오랜고구(考究) 끝에 나온 김 소장의 주장에 놀라 세종시 정동진 표지판 확인을 위해 죽도산 탐방까지 결정한 일행은 데크전망대에 다다라서 야 전망대가 공사중인 걸 알 수 있었다. 이 죽도산전망대가 지역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탐방에 앞장선 이 선생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7층 높이의 죽도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틀림없이 멋질 것이다. 전망대이니만큼 시야를 방해받지 않고 해를 맞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영덕인의 눈으로 보면 죽도산전망대며, 일출이며, 블루로드 데크 모두 멋진 곳이지만, 외지인의 눈으로 보면 수많은 멋진 곳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망망대해에 떠오르는 태양은 바닷가 어디든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주변 경관이 조화를 이루면 일출 모습은 ‘일출 10선’이니‘일 출 100선’이니 하는 목록에 오르기 마련이다. 부실한 안내를 생각하며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산은 대밭산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길보다 반대편 말미산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선택되었다.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옮겨졌다는 건 한양도성시대가 끝난 걸로 보 아야 한다면서? ”
“대통령이 제1차 각료회의를 세종시에서 개최한 건 우연이 아니고,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도.”
“대통령님의 세종시 정동진 방문은 필연이고 당근이네, 뭐.”
하산길에서 이루어진 일행의 왈가왈부는 설사 죽도산에 세종시 정동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미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와우산의 유서지기(由緖之氣)는 그렇고 그런 바닷가 일출지에 서 세종시 정동진인 영덕색(盈德色)이 부각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말미산주차장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앞장서 가던 일행이 예고도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스마트폰을 내미는 동작이 적신호가 되어 줄줄이 걸음을 멈추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파란 지붕. 블루로드 맞네.”
그러고 보니 기와지붕도, 옥상도, 슬레이트지붕도 빠짐없이 파랗다. 아름답다. 이런 소소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도 놀랍다. 클러스 터니, 허브니, 랜드마크니 하는 말들이 일행의 대화에 끼어들어 춤을 추었다.
남쪽으로는 말미산으로 이어지는 현수교가 보였다. 말미산 자락의 블루로드는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국도변에서는 축산항을 ‘천리미항’으로 알리고 있는데, 이런 아름다움을 문학에서는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고 표현했던가. 이 선생이 말미산을 가리키며 운을 뗐다.
마을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60여년 전에 문경의 청춘남녀가 말미산을 찾아왔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문경을 떠나 말미산을 찾아왔을까. 금지된 사랑을 했던 두 남녀는 말미산 정상에 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사촌간이었다. 당나라 사신 김충이 고국으 로 돌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살았던 곳이 너무도 아름다운 축산항이었듯이 문경 청춘남녀들에게도 죽은 다음 세상에서 살고 싶은 최고의 명승지였던 듯하다. 말미산은 두 남녀에게 버킷리스트였나 보다.
“인터넷도 없던 때에 문경에서 이곳으로 온 연인….”
“이 선생, 미안하네, 정말 미안. 뒤가 좀.”
이 선생의 열변이 중지되고, 일행은 저마다 먼산바라기를 하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매우 급한 걸음이 정작 화장실 앞에서 머뭇거리자, 이 선생이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나머지 일행은 계단을 내려와 천천히 현수교로 향했다. 천리미항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그런 식으로 감상하는 셈이었다. 말미산 방향으로 놓인 현수교는 흔히 말하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 세워져 있다
왼편엔 파도가 드나드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변에 이어 바위가 절묘하게 자리잡은 말미산 자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축산천이 흐른다. 바다에 작은 갯바위가 있건만 갈매기는 모두 축산천에 떼를 지어 앉아 있다. 갈매기야 먹이사냥에 바쁘겠지만 갈매기를 바라보는 인간은 그 저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감탄사로 내뱉느라 부산을 떨었다.
“출렁거리지도 않는데 출렁다리는 무슨.”
“남녀 표시가 없는 화장실일 게 뭐야.”
“분홍이 여자 화장실이고, 파랑이 남자 화장실 표지 아냐! ”
일행이 떠들썩해졌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분홍은 여자이고, 파랑이 남자라는 거냐고. 현수교니, 출렁다리니 하는게 어디 이름이냐고. 방파제의 연장 형태로 지어진 잘생긴 다리에도 이름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도움이 될 만한 표지가 없는게 이 마을의 특징이라고.
“와우산은 다를 것 같지 않나요? ”
떠들썩한 가운데로 비수처럼 꽂힌 말이었다. 와우산은 순식간에 일행의 떠들썩을 잠재웠다. 정동진, 세종시 정동진에서 비롯된 탐방이었다. 와우산 탐방이야말로 이번 탐방의 진수가 될 것이다. 
축산항과 함께 오랜 세월을 견뎌낸 와우산, 죽도산, 말미산이었다. 지역에서 죽도산전망대야 어판장이야 하면서 죽도산에 주력하는 동안 와우산은 지역의 관심사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정기를 지닌 와우산은 마침내 와우산의 존재 의미를 새기는 인물을 외부로부터 맞이했다. 와우산은 그런 저력이 있는 산이었다. 
가자, 와우산으로!
일행은 망설임 없이 와우산으로 향했다. 누워있는 소산이니 축산 지명이 이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해발 66미터라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깝다. 잘 만들어진 데크길을 걸을 때보다 일행의 보폭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진중했다. 언덕길이라도 퍽 가파른 길이었지만 일행은 별 헐떡임도 없었다. 일행이 멈춘 곳은 사각의 유허비각 앞이었다. 비각 안에는 3기의 비석이 있었고 중간 비석은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와우산 오르는 초입 계단 옆에서‘영양 남씨 발상지’라고 새겨진 선돌 앞에서 멈추었으니 두 번째 멈춤이었다. 일행 중에는‘영양 김씨 시조 공사적(寧陽金氏始祖公事蹟)’게시판 내용을 확인하는 이도 있었다. 죽도산에서 그리도 찾기 힘들었던 안내판이었던지라, 알 권리를 제대로 누리는 중이었다. 목적지와 별 관계는 없었지만, 거리와 방향을 가리키 는 이정표까지 반가움으로 맞았다.
‘당안렴사김공충유허(唐按廉使金公忠遺墟).’
당나라 현종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던 김충이 돌아오는 길에 풍랑으 로 표류하다가 축산항에 닿게 되었는데 축산항이 너무도 아름다워 당나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이곳에 살기를 원해 당시 신라 경덕왕이 당황제에게 허락을 구하고 남씨성을 하사했다는 내용이다.
“중국인이 자랑하는 당나라 얘기구먼. 중국인이 몰려올 얘기라는 김 소장 의견에 기꺼이 한 표.”
실제 여남현 부주석인 김충의 후손이 천년도 훨씬 지나서 뿌리를 찾아 방한한 적이 있었다. 유허비각에서 눈을 떼자, 위쪽 멀지 않은 곳에 세월의 풍화를 겪은 듯한 비석이 보였다. 
월영대(月影臺). 그리고 일광대(日光臺). 
이 선생이 먼저 비석 근처에 앉았다. 다리쉼을 할 겸 너도나도 자리를 잡았다.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 다면 먼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올 것 같은 위치였다. 건너편으로 죽도산이 보였다. 죽도산도 78미터 정도여서 위압감을 느낄 높이는 아니었다. 안온했다.
큰 나무며, 큰 바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옛사람들이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맹수가 위력을 잃게 되는 데는 16세기부터 화승총 문명 출현이 큰 역할을 했고, 과학의 힘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여 인간의 두려움을 가시게 하는 현대에도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다보다 잔잔한 바 다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장관이다. 사진작가들이 해돋이며, 해 넘이 사진을 작품으로 만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가 아닌 사람들도 기능이 뛰어난 휴대용 전자기기 덕분에 기기묘묘한 사진을 찍어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건 흔한 일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인류에게 꿈을 꾸게 하고 희망을 품게 했다. 오늘날에도 한반도에서는 새해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민족대이동이 일어난다.
일광대와 월영대는 해와 달과 관련하여 이곳, 와우산이 매우 특별한 곳이었으리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지닌 비석 근처에는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비석도 있었다. 남씨의 후손, ‘한강의 기적’을 일구면서 경제 개발의 주역 위치에 있었던 남덕우 국무총리의 건립이라는 기록이 읽힌다. 일광대와 월영대의 역사적 해석에 정통한 사람은 없었을지라도 매우 의미 있는 유적임을 알아본 처사로 보였다. 이 선생은 이곳에서 일직선으로 해돋이를 볼 수 있다며 잘 알고 지내는 축산번영회장을 통해 영덕 축산항 와우산이 세종시 정동진이라는 학설을 내놓은 세계전통해양문화연구소 자료를 인용했다.
“우리가 보려고 한 기와집이 저기 있네.”
눈에 들어오는 두 채의 기와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줄이 쳐진 명신각(明神閣)도, 창고처럼 보이는 숭신문(崇神門)도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원래는 와우산 정상에 있던 건물이 태풍에 무너졌을 때, 태풍으로부터 더 안전한 위치에 새롭게 복원을 한 결과다. 이 기와집의 의 미를 모른 채 마을에서는 전통문화를 지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영 덕 출신의 교수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의미가 김 소장을 세차게 휘어잡았다.
김 소장은 명신각이라는 현판을 보고 몹시 놀랐다. 전통해양문화를 연구해 온 김 소장은 ‘명신’을 보자 이내 일본 신도의 뿌리와 연결했다. 비록 숭신문(崇神門)이라는 현판을 달고도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아니라 방이 있는 집의 형태로 복원되어 있지만, 신을 숭배하여 특별히 신이 드나드는 문을 갖춘 명신각이다. 숭신문까지 갖춘 명신각은 틀림없이 현재의 규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전통문화의 막강한 힘을 의식한 세력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축소되지 않았을까. 9세기 헤 이안 시대의 일본 승려 엔닌은「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이 일본 승려의 기행문 덕분에 중국 산둥반도에 있는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전라남도 완도의 청해진에 관한 자료며 엔닌이 장보고의 배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사료가 국제적으로 확보되었다. 이와 관련된 신라명신상은 현재 일본의 국보가 되어 있다. 신라 명신은 풍랑을 만난 사람을 구하는 해신(海神)이었다. 신라명신은 현대의 일본 사극에도 등장할 만큼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바다의 신이다.
이 선생은 전달 연수자의 처지에서 점점 강연장의 김 소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일행 또한 충격적인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한민국에서도 경상북도, 경상북도에서도 동해 해변의 영덕군, 영덕군에서도 축산항, 축산항에서도 와우산에서 신라사와 국제적인 분위기에 젖어 드는 순간이라니. 이 선생이 포르투갈 대통령이 포스코아를 방문했던 얘기를 했었다.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옮겨지고 제1차 각료회의를 세종시에서 개최한 의미 완성은 세종시 정동진의 대통령 방문이 맡아야 할 것이다. 한류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어, 김밥을 먹으며 케이팝을 따라부르 는 외국인의 얘기가 낯설지 않은 요즘에, 케이컬처 유허지에 김충지가 (金忠之家)를 복원하는 일은 중국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이요, 일본 국보가 되어 있는 신라명신의 뿌리에 관련된 명신각은 일본인에게도 통하는 일이라는 김 소장의 의견이 시민의 힘을 부르짖는 일행에게 시나브로 스며들어 일종의 사명감으로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명신각을 뒤로 하고 하산할 때는 올라왔던 길이 아닌 반대편을 선택 했다. 정상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명신각이 위치할 자리를 정하느라 분주했다. 일행은 명신각 이전을 기정사실로 못 박고 태풍의 방향까지 걱정했다. 이에 맞서 와우산 정상에서도 태풍을 견뎌낼 수 있는 현대 공법을 살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우려를 불식하기도 했다. 와우산의 일광 대와 월영대, 그리고 명신각과 숭신문의 뜻을 모르면서도 마을에서 보호한 것을 보면 와우산이 지닌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의견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이도 있었다.
내리막 오솔길은 통나무로 구불구불하게 계단을 놓아 늘어진 것이 마치 저녁노을이 와우산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목너머’에 다다르자,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바다라고는 본 적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함성을 질렀다.
“유서 깊은 와우산이로고. 세종시 정동진이 와우산이면 우리가 ‘목 너머’로 내려온 노을 계단은 세종시를 향하고 있는 셈이군.”
장 교수의 와우산 탐방기가 함성의 뒤를 이었다.
일행은 기대에 찬 눈으로 이 선생을 재촉했다. 최소한 1박 2일이 필 요하다고 주장한 이 선생이 농담 삼아 일행을 안내할 리가 없었다. 와 우산의 감동이 쉬 식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다음 행선지 역시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 선생은 세종시 정동진으로서 영덕의 북쪽에 있는 와우산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가 영덕의 남쪽으로 일행을 안내하는 타당한 이유 두 가지를 내세웠다.
이 선생은 학창 시절 배웠던 신라의 노래 ‘헌화가’의 배경 장소로서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일행에게는 국어를 전공한 이 선생만큼 중요성이 절실하지 않아 의아했다. 신라시대 문학작품에 등장하곤 하는 이름난 여인인 수로부인은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인물이 아니어서 호기심이 발동하긴 했다. ‘수로부인헌화공원’을 조성해 놓은 동해안 도시로 인해 영덕의 헌화가 배경지 운운은 지적인 호기심을 배가시켰다. 이 선생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는 연구 결과를 전달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발령받고 수로부인과 함께 서라벌을 출발하여 ‘강릉으로 가던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行 次海汀晝饍)’라는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수로부인 일행이 이곳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마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긴 이곳 200m 길이의 바윗골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것을 본 뒤에 바로 옆의 ‘헌화가 병풍(屛風) 바위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던 것이 아닐까. 김 소장이 명명한 ‘헌화가 병풍바위 해변’은 바위 절벽을 병풍으로 두른 바닷가로, 집안의 큰일을 치기에 적절한 크기의 모랫벌이 형성되어 아늑한 장소인 데다 바닷가는 나지막한 바위로 경계 지어 있어 파도가 쉽게 넘어오지 못하는 평평한 공간이라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점심 먹기에 알맞다. 흥미로운 일은 지금도 관광객들이 바로 그 ‘헌화가 병풍바위 해변’에서 점심을 먹는 장면이 목격된다는 점이다. 누구나 이곳 아늑한 병풍바위 아래가 바로 눈앞의 철썩거리는 파도를 보면서 점심을 먹음직한 곳임을 알아차리게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 소장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의 노래 ‘헌화가’의 주요 무대는 영덕일 수밖에 없다. 아득한 옛노래의 배경 무대가 영덕일 수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일행은 바로 그 현장에 와 있다는 감회에 잠겼다. 
게다가 해변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돌출 바위군(群)의경치또한빼어 나서 예나 이제나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꼭 둘러볼 만한 장소라는 점이다. 이 선생이 경치를 자랑하려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 번째로 타당한 이유였다. 그 돌출 바위군 지역에 한반도 해안지대 최장의 바윗골이 있다. 폭 2미터, 길이 200미터의 직선 길로 파도가 들어오는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다. 짧지 않은 200미터나 되는 바윗골이 용하게도 여태껏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군부대가 바로 인근에 있어 초소가 설치되는 바람에 출입이 제한됨으로써 해변이 보호되어 왔기 때문이다. 바닷가 명소는 시야 확보가 우선인데, 안보 차원에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다가 해제된 해변까지 일일이 구글링했던 김 소장의 피 땀 어린 노력으로 놀라운 모습의 바윗골이 지역인의, 아니 그곳으로 발걸음하는 이의 눈을 호강시켜 주었다. 200미터 직선 바윗골이 포함된 ‘골곡포(骨谷浦)’연구는 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탐방에 신이 난 일행은 기세를 살려 바윗골로 향했다. 순전히 바윗길이라 여간 위험하지 않음에도 그 누구도 도로나 산을 이용하는 더 안전한 길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병풍바위 해변에서 바윗길로 향하는 길은 파도가 넘어와서 바닷물 때문에 바윗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간간이 바위 위로 올라오는 바닷물을 피하기도 해야 했다. 혹여 누구라도 다칠 까 염려스러워 이 선생은 마음을 졸였다. 바위에는 바닷물이 올라와 증 발하고 소금이 남은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탐방에 이골이 난 일행은 바윗길이 험하다는 불평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바윗골에 다다르자 모두들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 바빴다. 일직선으로 뻗은 바윗골은 과연 장관이었다. 일행은 본인의 모습이 들어간 사 진보다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사진을 찍기 일쑤였는데, 바윗골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본인을 포함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왕이면 배경에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인 ‘문산호’도 넣고자 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성동격서(聲東擊西) 격으로 희생된 700명이 넘는 20세 안팎의 학도병 덕분이었다. 학도병은 서해안의 인천상륙작전 1일 전에 북한군의 이목을 동해안 영덕으로 유도하여 상륙 지역 판단에 혼란을 초래하기 위한 양동작전인 장사상륙 작전의 주력 병이었다. 학도병들은 3일치 식량과 낙후된 무기로 6일간 전투를 하고, 200고지를 점령했었다. 일행이 뭉친 것도 결국은 나라 사랑에 통해 있었다. 일행에게 문산호는 역사의 한 토막 정도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다만 염려스러운 일은 사진 촬영에 열중하다가 발을 헛디디는 일이었다. 이 선생은 자신이 앞장서서 안내한 바윗골에 모두가 좋은 인상이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돌아가려 했다. 더 머무르고 싶어 하는 일행을 재촉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귀가 만 하면 되는데 서두를 일이 뭐 있느냐는 말에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렵사리 바윗골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선생은 돌아갈 길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일행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앞장섰다. 아이들 인솔자로서의 버릇이 발현되었다. 마지막 일행까지 바윗골을 벗어나는 걸 확인했다. 바위에 밀착한 이 선생의 자세는 일행의 떠들썩한 목소리만 듣게 되었다. 등산길에서도 등산보다 하산 때에 사고가 집중적으로 일어 난다는 말이 떠올랐다. 일행의 목소리에서 활기를 느끼며 괜한 염려였다고 자책했다. 기우였다며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천만다행? 
순간 비명이 들렸다.
장 교수의 몸이 휘청이는가 했더니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누가 붙들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선 생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으나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게 쉽지 않아 적이 당황스러웠다. 모두의 염려 때문인지 장 교수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몹시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미안하구먼. 스타일 좀 구기겠는걸.”
장 교수가 가볍게 한마디 했지만, 표정에는 고통을 삼키는 모습이 역력했다. 차로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불편한 몸으로는 천 리 길 이다. 일행이 장 교수를 부축하려 했지만, 장 교수는 주변의 도움을 한사코 뿌리쳤다. 장 교수는 거의 기다시피 몸을 움직이며 부축하는 사람 의 보조를 맞추지 않는 편이 한결 낫다고 애써 변명했다. 굳이 설명하 지 않아도 장 교수가 어떤 심정인지 짐작이 갔다.
“이 선생, 이 선생 생각은 어때? ”
장 교수였다. 바위에 미끄러진 장 교수 목소리엔 고통이 아니라 신명이 차 있었다. 장 교수가 가까이 와서 이 선생의 어깨를 툭 쳤을 때야 비로소 이 선생은 홀로 장 교수가 다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열없어진 이 선생이 입을 열었다.
“조선시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 書)』와『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영덕현’지도에‘골곡포’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바로 이곳이 골곡포가 될 거라는 거죠. 장사천이나 지경천 하구에 쓰지 않고 장사천 왼편으로 치우쳐 기록된 것은 골곡포가 바위에 배를 댈 수 있는 포구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원하시면 포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놀랍게도 바윗골은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방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선생 주변으로 모여든 일행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웃음을 터뜨릴 수 없는 이 선생에게 묘한 소외감이 밀려왔다. 장 교수가 원 한 것은 왜 바윗골이 골곡포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의기투합 한 일행은 대통령의 영덕 방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작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명이라는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선 생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행은 곧 웃음기를 거두고 골곡포에 열중했다. 순식간에 돌출 바위군은 지성인 아지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행이 자 리 잡은 곳에서는 200미터 바윗골이 선명하게 보였다. 일행은 국제적 인 시각으로 접한 지식을 곱씹었다.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는 동짓날 일출 빛이 중앙 제단석(Altar stone)과 도축석(Slaughter stone)을 통과한다. 한때 밀밭이었다가 발굴된 독일의 고섹 서클(Goseck circle)은 땅에 둥글게 이어진 원을 판 것으로 두 개의 문이 각각 동지의 일출과 일몰의 방향임이 확인되었다. 아일랜드 켈틱족의 뉴그랜지(Newgrange) 선사 고분은 돌로 쌓은 긴 직선 통로 안으로 동짓날 일출 빛이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페루의 세로 델 헨틸(Cerro del Gentil) 피라미드군(群)은 향동지일출선상(向冬至日出線上) 에 있고, 찬킬로 13탑(The Thirteen Towers of Chankillo) 또한 잉카인들의 태양신에 대한 움직임을 추적하는 숭배의 흔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마 야인의 도시로 유카탄반도 동쪽 해안에 위치하는 멕시코의 15세기 건축물 툴름(Tulum)은 한 건물 꼭대기에 작은 구멍이 있고 동지와 하지의 일출 때에 빛이 난다고 한다. 석굴암 채광창 유무 논쟁은 아일랜드 고분들의 향동지일출 채광창에 연결하여 해석했다. 동짓날 해돋는 방향으로 지어진 석굴암은 채광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사인들의 우주관 특히 해안지대 선사인은 서로 유사한 우주관을 나누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김 소장의 주장에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터다.
빛은 바이블의 첫 장에 나오는 중요성만큼 선사인에게는 가장 신성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것이 시조 신화마다 빛이 등장하는 이유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과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빛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횡혈식 고분은 들어가는 사람의 통로이기보다 달빛, 햇빛 이 들어가는 채광로의 의미가 중요했음이 선사시대 고분 연구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인 동짓날 일출 방향은 특히 중요해 서 향동지일출선이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한 해중 가장 밤이 긴 동지를 지난 다음 날은 선사인에게 새로운 태양이 솟는 새해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신성한 일출로 여긴 날이다.
돌출 바위군에 일행의 진지한 언행이 내리꽂혔다. 김 소장의 연구 결과는 어느 연구 기관이나 단체의 연구 결과보다 혁혁하다. 강연장에서 지역인보다 더 지역을 깊이 연구하는 자세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김 소 장은 논어 학이(學而)편의 인부지불온이면 불역군자호아(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 답하면서 군자라는 자부심이 순수 학문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덧붙였다. 하긴 일행이 탐방에 나선 것도 결국은 누군가 알아 주었으면 해서가 아니었다. 일행은 동짓날 골곡포의 향동지일출 확인을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마침 올해 동지는 맞춘 듯이 주말이다. 다른 일행의 행동을 따라 스마트폰에 동지 일정을 저장하면서 장 교수가 조금 전 비명이 터졌던 화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한양 도성 밖으로 나온 현 정부의 운수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의 세종시 정동진 방문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덕군에서 대통령의 세종시 정동진 방문과 해맞이 행사를 추진해야 한다. 누군가 대통령 경호 운운하다가 대통령실의 권한에 대한 월권행위라는 지적을 받았다. 월권행위라는 말은 또 다른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시민의 힘을 보여주자. 나라가 시민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묻지 않기로 하고, 먼저 영덕에서 세종시로 태양의 길을 따라가 보자는 것이다.
동서회의 골곡포 결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세종시를 향해 세종시 정동진 출발!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