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9월 6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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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서 지난 세월의 먼지를 걷어내듯 내 모습을 들여다본다. 내 나이는 바람결에 떠밀린 세월의 자취처럼 어느새 만 68세이다. 아내의 나이는 내 그림자를 좇는 바람결처럼 비슷한 만 71세이다. 현실을 점검하려는 듯 근래의 내 생활의 흐름을 둘러본다. 민달준(閔達俊)이란 내 이름에 걸맞게 고공의 매처럼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여긴다. 고등학교의 미술 교사로 근무하다가 강을 건너듯 정년퇴직한 지가 6년째다. 아내는 공공의 도우미로 살듯 중랑구청의 공무원인 간호사로서 일하다가 정년퇴직했다. 현재는 후생의 건강을 가다듬듯 마을 인근의 요양병원에 재취업하여 일한다.
나는 현재 세상의 그림을 떡 주무르듯 취향대로 그리는 서양화가이다. 20대 중반에 실력을 내뿜듯 국전의 특선 화가로 당선되기도 했다. 취향을 주변에 각인시키듯 화가로서는 집요하게 생활해 오지 않았다. 틈이 날 때 그림을 그리면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듯 보관했다. 나를 알아달라는 듯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갖기는 꺼렸다. 세인들로부터 상징성을 부여받듯 화가로서의 대외적인 활동을 해 오지는 못했다. 그림 자체는 여명의 햇살처럼 나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영역이 되었다. 전공이 미술이기에 포근한 햇살에 휘감기듯 나름대로의 만족감에 취해 왔다.
퇴직한 뒤에는 연금으로 생활이 가능하기에 마음이 너럭바위에 드러 눕듯 편안하다. 취향의 숨결을 반영하듯 보람 있는 일을 해야 마땅하리라 여겨진다. 화가의 영역에서도 갯벌에 발자취를 남기듯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 생각된다.
퇴직한 이후부터 나는 마음을 닦듯 중랑천의 산책을 즐긴다. 새의 둥지 같은 내 집은 면목동의 D아파트에 있다. 서쪽의 중랑천까지는 재채기의 침방울이 내닫듯 가까운 400여 미터의 거리이다. 집 서쪽의 중랑천 보행로는 다리를 떠받치듯 장평표 아래쪽에 있다. 북쪽으로 2.2km 가량 허공의 깃털이 움직이듯 이동하면 중랑교 아래에 도착한다. 중랑 교의 보행로에서 경로를 뒤집듯 집까지 되돌아오면 4.6km의 거리에 해당한다. 4.6km씩의 중랑천 보행로를 걷는 것이 식사하듯 정규적인 일과가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체향처럼 저마다의 고유한 자질이 있다고 여겨진다. 천성 같은 자질은 그림의 구도를 다양하게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사람의 눈처럼 화가들에겐 누구한테나 다 있는 능력은 아닌지 훑어보았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여 다양한 구도를 제시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사람들의 키처럼 타고난 특성이다. 망원경을 휘돌리듯 다채로운 구도를 제시하는 능력도 타고난 자질임을 느꼈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듯 다채로운 구도를 제시하는 능력!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을 비수처럼 닦는 것이 과제다. 새로운 구도를 잡으려면 기존의 구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해야 한다. 기존 구도와의 중복을 밤길에 똥 무더기를 피하듯 피해야 한다. 기존의 구도와 닮으면 독창성이 연기가 스러지듯 없어지기에 조심해야 한다.
인터넷에 게시된 대자연의 경치를 발바닥을 쓰다듬듯 수시로 눈으로 훑는다. 특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에는 눈을 물가의 왜가리처럼 멈춰 최대한 분석한다.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려니까 슬그머니 가슴에 부담감이 해변의 밀물처럼 밀려든다. 부담감이란 맨발로 독사와 마주치듯 그림에 대한 두려움 탓은 아니다. 얼굴을 들이밀듯 내 손으로 출현되는 그림들이기에 가슴이 뒤설레는 감정이다. 완성된 뒤에는 창작 의도를 존중하듯 수정하지 않는 게 그림이다. 수정해야겠다면 새로운 구도를 펼치듯 아예 새로 그리는 게 타당하다. 잠시 긴장감에서 벗어나려고 도피처를 찾듯 인터넷의 공간을 뒤적거려 본다. 안면도의 해수욕장에서 갯벌에서 보물을 캐듯 죽합(竹蛤)을 잡는 장면을 본다.
암흑을 비추듯 해수욕장의 이름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방포해수욕장이라 여겨진다. 말라붙은 고목처럼 나이가 들었기에 수시로 졸음에 시달리는 편이다. 바위를 굴러가듯 승용차를 몰기에는 벅차다는 느낌에 휘감긴다. 쉬운 길잡이를 고르듯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식을 찾기로 한다. 지도를 보니 한밤의 섬광처럼 ‘안면도 정류소’가 왈칵 다가든다. 제시된 상징처럼 ‘안면도 정류소’란 곳이 고속버스터미널에 준하는 장소라 여겨진다. 지도로 검색하니 가까운 해변에는 방포해수욕장이 빛살처럼 선뜻 눈에 띈다. 방포해수욕장 남쪽에는 꽃지해수욕장이 지렁이처럼 길게 드러누워 있다.
정류소에서 지도를 깨워 일으키듯 거리를 재니 꽃지해수욕장까지는 대략 4km이다. 해수욕장까지는 꿈에 취하듯 움직여도 1시간 정도만 걸어도 될 거리다. 안면도의 보행로를 개척하듯 걸어서 이동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위성 지도가 손금처럼 상세하기에 걸어서 이동하더라도 문제가 없으리라 여겨진다.
바닷물이 늪지대의 물처럼 많이 빠지는 날짜가 음력 1일과 15일이다. 조개잡이에 생각이 미치자 과거의 쓰라린 경험들이 머리에 기포들처럼 떠오른다. 과거에 현장을 답사하듯 동영상 자료로 숱하게 조개 구멍을 연구했다. 몽산포해수욕장에서 조개가 많이 잡힌다는 소식은 항구에서 뱃고동에 휘감기듯 들었다. 50대의 초반에 조개잡이를 수련하는 듯 몽산포해수욕장에 다섯 차례나 다녀왔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부터 갯벌을 샅샅이 살피듯 갯벌에 들어섰다. 바닷물이 미련을 버리듯 흘러나가는데도 조개의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갯벌의 표면을 다림질한 듯 매끈한 지형만 드러날 따름이었다. 총알이 파고든 듯 갯벌의 어디에도 구멍이 뚫린 지형은 없었다. 3시간쯤이나 물이 빠졌는데도 조개의 구멍은 흔적을 감추듯 드러나지 않았다. 마음이 북받쳐 들끓듯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기는 싫었다. 20cm가량의 길이로 이랑을 만들듯 갯벌을 반복적으로 긁으며 옆으로 움직였다. 긁힌 자취가 소형의 직사각형 밭을 만들듯 갯벌을 호미로 긁었다. 갯벌에 그냥 화풀이를 하듯 갯벌을 호미로 긁었을 따름이었다. 호미가 통째로 갯벌에 푹 들어가듯 대략 20cm 길이만큼씩 긁었다. 경작지를 확장하듯 갯벌을 긁어 기다란 직사각형의 궤적을 남기면서 움직였다. 대략 1.5m마다 동죽이란 조개가 묻힌 견본처럼 한 마리씩 나왔다.
동죽은 흰색 껍질을 갖는, 빵처럼 도톰한 모양의 조개였다. 호미질을 해댔지만 조개의 구멍은 사막의 물기처럼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호미로 갯벌을 가려운 피부를 긁듯 마구 긁으니 동죽이 나왔다.
몽산포해수욕장에서는 사물의 핵심을 놓치듯 조개 구멍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막의 물길을 찾듯 사방을 둘러봤어도 조개 구멍은 발견하지 못했다. 실성한 듯 아무 데나 갯벌을 긁어대니 동죽만 이따금씩 나왔다. 몽산포해수욕장에서는 탐색의 핵심 같은 조개 구멍을 끝내 찾지 못했다.
안면도에서는 조개 탐색의 길잡이 같은 조개 구멍을 찾아내고 싶었다. 갯벌을 긁어서 채취하는 일은 무한으로 땀을 쏟듯 끔찍한 막노동이었다. 물살을 피하듯 막노동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구멍을 통하여 채취하는 방식이라야 했다.
아내 근무처의 휴가일은 윤번의 흐름을 존중하듯 일정하지가 않다. 노년의 선율을 음미하듯 아내의 휴일에 함께 조개를 캐고 싶다. 내가 세수하듯 조개잡이에 숙달해야만 아내한테까지 제대로 가르칠 수가 있다.
규칙을 드러내듯 달력에서는 음력 3월 1일이 양력 4월 20일이다. 음력 1일과 15일이 흐름의 골격 같은 사리이다. 해와 달의 인력이 태양의 불길처럼 가장 강한 날이다. 4월 16일에 목적지를 구체화하듯 센트럴시티터미널에 가서 고속버스표를 예매한다. 목요일인 4월 20일의 물때 자료는 인터넷에 손금처럼 자세히 밝혀졌다. 안면도까지 가는 버스를 화살을 날려 방향을 정하듯 서울에서 예매했다. 숨 쉬듯 편안하게 여겨지는 오전 11시 5분 차를 이용한다. 안면도까지는 하오의 편안함에 스며들듯 오후 1시 30분쯤에 도착되리라 여겨진다. 안면도에 깃털처럼 편안히 내려서 꽃지해수욕장까지 걸어가면 2시 30분쯤이면 도착되리라. 바닷물은 하한선이 제시되듯 오후 3시 46분이 만조 시각이라 밝혀졌다. 이후의 일정에 대비하듯 점심을 먹은 뒤에 갯벌로 들어가기로 한다. 밤 10시 22분까지는 흘러내리는 간수처럼 바닷물이 계속하여 빠지는 터다.
귀향하는 방식도 서울에서 결정하듯 4월 21일 오전의 고속버스로 예매한다. 예매하는 것이 여행에 있어서 안개 지대를 통과하듯 안전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분석하듯 안면도를 오가는 자료를 조사하니 승객은 평균 13명이었다. 비상한 경우에 대처하듯 이러한 데까지 생각한 뒤다. 나는 컴퓨터에서 영감을 얻듯 남들의 수채화 영상들을 살펴보고는 취침했다.
비탈진 개천의 물살처럼 빠른 세월이었다. 4월 20일의 오전에 갈매기가 비상하듯 서울에서 안면도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현장에서 작업할 일정표를 미래에 대처하듯 머릿속으로 구상해 본다. 시간의 관리가 수중에서의 호흡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밤에 작업할 것이기에, 어둠을 먼지처럼 내쫓듯 전등을 구입하기로 한다. 가게의 창구에서 실상을 점검하듯 알아보니, 생각보다 가격이 저렴하다. 수은전지의 전원으로 12시간까지는 대낮처럼 훤하게 쓸 수 있다. 윤곽을 파악하듯 도구를 머리에도 착용하여 전원을 켜 볼 작정이다. 착용한 느낌이 고운 침상에 드러눕듯 무척 편안하기를 바란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잠시 졸았나 보다. 안개 지대를 벗어나듯 졸음에서 깨어나니 고속버스는 안면대교를 건너고 있다. 정류소까지는 호흡의 단위 같은 20여 분만 가면 되리라 여겨진다. 담요의 두께를 가늠하듯 지도의 분석으로 알게 된 판단 영역이다.
마침내 목적지에 투하된 미사일처럼 정류소에 도착했다. 시점을 가늠하듯 헤아려 보니 오후 1시 40분이다. 가게에서 전투 장비를 마련하듯 해루질용 전등을 구입한다. 인터넷에서 실상을 확인한 듯 그다지 비싸지 않은 편이다. 효용을 규명하듯 작동의 여부를 점검하고는 가격을 치른다. 그러고는 바다에 이끌리듯 꽃지해수욕장으로 걸어간다. 운동장의 길이처럼 짧은 4km의 거리라서 도보로도 1시간이면 도착되리라 여겨진다. 골목길을 확인하듯 인터넷으로 반복해서 익혔기에 찾아가는 데에 전혀 부담감이 없다.
마침내 예정된 흐름처럼 꽃지해수욕장에 닿았다. 시각을 점검하듯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2시 40분이다. 예정된 움직임처럼 오후 3시 46분까지는 바닷물이 육지로 흘러든다. 만조가 오후 3시 46분이라고 선을 긋듯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일의 윤곽을 정하듯 3시 50분 정도부터 갯벌에 들어갈 작정이다. 낮이 느슨한 고무줄만큼 조금 길어졌지만 밤이 금세 찾아오리라 여겨진다. 무한함을 일깨우듯 길이가 4km에 달하는 해수욕장이 썩 마음에 든다. 작업의 치밀도를 헤아리듯 물때의 정보를 추슬러 본다. 제한된 굴레처럼 일몰 시각은 오후 7시 13분이다. 작업의 효율을 높이듯 만조 시각 때부터 4시간만 작업하기로 한다. 해안을 지키듯 밤 7시 50분까지는 갯벌에 머물러야 한다. 더 이상의 시간은 과도한 영역처럼 비효율적이라 여겨진다. 정보와 자료에 몸을 맡기듯 충실하게 임하기로 한다. 작업의 윤곽이 설계 도면처럼 제시되었기에 마음이 편안하다. 기회를 포착하듯 바닷물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동안을 활용하고 싶어진다. 주차장의 남쪽에 군진(軍陣)처럼 벌려서 있는 음식점으로 향한다. 시간의 효율을 높이듯 바닷물이 빠져나갈 동안에 식사하기로 한다. 여행객의 마음처럼 편안해 보이는 바지락 칼국수를 주문하여 음식점에서 식사한다. 음식점에는 온돌식 방 구조를 흉내 내듯 앉은뱅이 식탁들이 깔렸다.
길손으로는 버려진 눈덩이처럼 나를 포함하여 3사람이 눈에 띌 따름이다. 식사 시간이 지났기에 음식 냄새가 빠져나가듯 한산한 모양이다. 70대의 노인과 30대 중반의 청년이 한눈에 드러나듯 길손으로 보인다. 청년은 숲에서 무엇을 찾듯 휴대전화기로 뭔가를 검색해서 보는 모양이다. 노인은 키가 175cm가량이고 얼굴의 주름살이 갯벌의 연흔처럼 많은 편이다. 약속이나 한 듯 나와 노인의 눈길이 마주쳤을 때이다. 먼지가 날아들듯 우발적으로 노인이 나를 향해 말한다.
“저처럼 식사 시간이 늦으셨군요. 식탁에 함께 앉아도 되겠어요? ”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듯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노인이 맞은편에 앉으며 미풍(微風)을 내보내듯 슬며시 명함을 내게
건넨다. 나도 답례를 하듯 명함을 꺼내어 노인에게 건넨다. 노인의 명함에서 전직 국어 교사이면서 시인이라는 글이 밀려든다. 노인이 내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손을 내밀어 숨결을 토하듯 말한다.
“우리는 공교롭게도 전직이 같은 교사였네요. 게다가 선생님은 서양 화가이시군요. 시인과 화가의 만남이라? 꽤 얘기할 흥취가 일군요.”
나도 꽃이 벌을 반기듯 사람을 좋아하기에 노인과 악수하며 말한다. “반갑습니다. 민달준이에요. 갯벌의 조개 구멍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왔어요.”
오후의 설정된 경계처럼 3시 50분까지만 해변에 들어서면 되는 터였다. 숨을 들이쉬듯 노인과는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니 여겨진다. 노인은 최종갑(崔宗甲)이며 만 71살이라고 본인이 빛을 내뿜듯 밝혔다. 자연의 위계처럼 나보다 3살이 연상인 사내다. 햇살이 세상을 뒤덮듯 포근히 친구로 사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관심은 몽산포해수욕장에서의 경험처럼 조개잡이에서 막노동에서 탈피하려는 터다. 몽산포해수욕장에서는 등을 긁듯 호미로 갯벌을 긁으면 조개가 잡히는 방식이었다. 드나드는 조수(潮水)처럼 쉬지 않고 호미질만 하면 동죽이라는 조개가 잡혔다. 구멍에 따라 캐는 방식이 아니어서 더위에 무너지듯 쉽게 지쳤다. 안면도에서는 전문 어업인처럼 조개 구멍에 따라 조개를 캐고 싶다. 노후의 풍류 같은 취미로서 조개 캐기는 인기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낙지는 동작이 파고드는 물줄기처럼 빠르기에 어부로서도 잡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내가 노인을 향해 스승을 대하듯 경건하게 말한다.
“최 선생님, 조개잡이에 혹시 경험이 많으세요? 경험이 많으시다면 제게도 기술을 전수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노인이 미루나무에 이는 바람결처럼 허허로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누구나 첫 출발이 문제가 되죠. 출발점에서 정확히 익히면 조개잡이는 누구나 즐길 수 있어요.”
노인은 시간의 좌표를 확인하듯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내게 말한다. “조개 구멍의 판별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오. 제일 중요한 게 조개
구멍이 깔린 장소를 찾는 일이죠. 조개 구멍이 깔린 장소를 찾는 것이 조개잡이의 핵심이죠. 일단 오늘은 내가 위치를 알려줄 테니까 위치를 잘 기억해 두도록 하시죠.”
여행의 목적이 안내도가 펼쳐지듯 90% 이상 성취된 느낌이 든다. 조개 구멍이 갯벌에 징검다리처럼 깔린 위치라? 흔적을 탐지하듯 그런 구멍만 파면 조개를 캐게 되리라 들려준다. 신호등 같은 안내 없이 혼자서 찾으려면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포로가 팔을 들듯 노인의 말을 순순히 인정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몽산포해수욕장에서 실패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무엇에 내쫓기듯 가슴이 답답해진다. 동영상에서 연구했지만 갯벌에만 서면 자취를 감추듯 구멍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론과 실제와의 차이에 멀쩡하게 마비되는 근육처럼 숱한 곤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정말 다르리라 여겨진다. 조개 구멍의 전문가인 노인이 선경의 신선처럼 눈앞에 있지 않은가? 노인은 팔을 내뻗듯 대수롭지 않게 들려준다. 구멍의 위치만 찾으면 숨을 내쉬듯 너무나 쉽다고 말한다. 내 얼굴에 의아심을 드러내는 표정이 실안개처럼 슬쩍 실렸나 보다. 노인이 유쾌하다는 듯 껄껄 웃더니 내게 말한다.
“민 선생님, 너무 상대의 말을 믿지 않아도 결례가 됨은 아시죠? 선생님의 얼굴에 온통 내 말을 믿기가 어렵다는 표정이 쫙 깔려 있어요. 다음부터는 표정을 관리하는 방법부터 익히셔야만 할 것 같군요.”
하도 자신만만해하기에 노인의 말을 신령의 뜻처럼 믿기로 한다. 살짝 눈을 가리듯 거짓임이 드러나더라도 그때 따져도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허기를 잠재우려는 듯 주문한 음식이 마침 배달되었다. 내 음식은 바다의 담담한 기운을 음미하듯 바지락칼국수이다. 노인의 것은 음식의 취향을 반영하듯 해물수제비이다. 둘의 마음이 통한 듯 소주 한 병도 주문했다. 고장의 풍정을 반영하듯‘이제 우린’이라는 충청도의 소주이다. 노인이 나를 보고 바람이 속삭이듯 은밀하게 말한다.
“소동파가 왕유의 시 속에는 그림이 보이고, 왕유의 그림 속에는 시가 느껴진다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각각 시인이며 화가이니까 말로써 시와 그림을 표현하면 어떻겠어요? ”
노인의 말을 들으니 색깔을 손으로 탐지하듯 불합리하리라는 점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노인을 향해 내가 다소 불편하다는 듯 침중하게 말한다.
“시를 말로서 표현한다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림을 말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는데요? ”
시인이며 화가를 겸한 사람들처럼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였다고 노인이 들려준다. 결코 나를 곯리듯 괴롭히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식사하면서 생각하니 노인의 제안이 파도를 타듯 묘미가 있다고 느껴진다. 새가 날듯 붓으로 종이에 흔적을 남기기란 아무나 하지 않겠는가? 말로써 그림의 분위기를 표출하려면 벼랑을 오르듯 쉽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노인과 내가 식사하면서 세상을 가늠하듯 술을 잠깐씩 마신다. 노인이 썰물을 제시하듯 썰물에 대한 시구를 말로써 표현한다면서 들려준다.
대지의 웅크린 기운
갯벌에 압핀처럼 꽂혀
허기진 낙지처럼 하염없이 누워 있다가
하얀 물결에 자신의 영혼 거두듯
내풀리는 시계의 태엽처럼
우주의 자취 빨아들이면서
흔적마저 지우려는 듯 성큼성큼 물러나누나.(「갯벌의 썰물」
발출된 속도를 보면 대단히 순발력 있는 즉흥시라고 여겨진다. 나도 말로써 썰물의 그림을 노인에게 제시하듯 그려야 할 판이다. 벼랑에서 떠밀리듯 밀리지 말아야 하리라고 생각하여 나도 호기롭게 시도한다.
허공으로 증발하듯 채색된 물감
종이에 미처 스며들지도 못한 사이
종이의 가녀린 홈 타고
지관이 지맥을 감별하듯
청백색에서 백색 포말에 이르기까지
물감의 혼령
물길 찾아 허허로이 떠나네.(「갯벌의 썰물」
녹음해도 좋겠느냐며 동의를 구하더니 노인이 곧바로 내 말을 녹음한다. 녹음된 파일을 반복해서 듣더니 감탄한 듯 노인이 내게 말한다.
“선생님의 말에서 종이에 그려진 썰물의 풍경화가 곧바로 훤히 보이는 느낌입니다. 어떤 색채로 그렸는지까지 선히 느껴질 정도입니다. 조개를 잡느라고 오늘은 이곳 해변에서 머무실 거죠? 오늘 잡는 조개로 끓인 국을 술안주로 하여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면 어떨까요? ”
좋다는 듯 동의하고 갯벌에는 3시 50분까지는 들어가자고 노인에게 제안한다. 노인은 자신 있다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선뜻 동의한다.
3시 50분에 노인과 내가 해신(海神)을 토벌하려는 듯 갯벌에 들어선다. 갯벌에 다른 사람들은 잠적한 듯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여유를 부리듯 나를 향해 말한다.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안 보이는 이유를 아시겠소? 앞으로 2시간 동안 물이 빠지겠지만 그때까지는 조개 구멍이 뚫린 장소가 눈에 띄지 않을 거요. 모래가 아닌 개흙으로 이루어진 갯벌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오. 그때까지는 힘을 빼지 말고 바다와 수평선을 감상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분야의 초행자들은 그때까지를 못 견뎌 마구 갯벌을 긁어 대다가 금세 지쳐서 갯벌에서 빠져나가 버리거든요.”
전문가 같은 행세를 하는 노인의 말을 일단 존중하기로 한다. 한계를 드러내듯 지금까지 나는 조개 구멍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본을 놓친 듯 늦었지만 오늘이라도 조개 구멍을 확인하고 싶다. 노인의 제안을 노인의 제자처럼 고분고분히 수용하는 터다. 노인의 제안에 따랐는데도 실패한다면 죄인을 응징하듯 묵과하지 않을 작정이다. 석각(石刻)을 하는 석공들처럼 인내심을 갖고 노인의 제안에 응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달인처럼 나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다의 정감을 담아본다. 인과(因果)를 밝히듯 지구와 유사했던 조건을 갖췄던 화성을 떠올려본다. 계시(啓示)를 받듯 과학자들은 지구도 화성처럼 변할 거라고 예견한다. 바다가 증발하면 지각의 숨결 같았던 화산 활동도 멈춰진다고 했다. 추정이 아닌 예정된 일정이라고 다들 흥분하듯 강력히 말한다. 예정된 일정을 사람들은 미래에 창살처럼 배열된 운명이라고 말하곤한다.
지구의 공식적인 지각 활동은 모깃불 속의 재처럼 스러진다는 얘기다. 지겨운 반복 활동처럼 태양 둘레로의 공전과 자전만 지속되리라는 견해다. 이런 현상들도 꿈꾸듯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리라는 학설도 만연했다. 숨을 멈추듯 태양이 폭발하면 모든 행성들도 재로 흩어지리라는 예측이다. 먼 미래에 활용되듯 새로운 별을 창조할 재료가 되리라고 논의된다. 미래의 새로운 별이 무엇일지 현존하는 인류는 알 수가 없으리라.
해변에서 바람결이 서성이듯 지금의 화성에도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리라 여겨진다. 화성의 어떤 대상도 팔을 휘젓듯 인식받을 흔적은 드러내지 못하리라.
바다가 사막처럼 증발하면 어떤 생명체도 지구에는 존재하지 못하리라 여겨진다. 안타까운 한숨의 여운처럼 인류조차도 지구에는 출생되지 못하리라 여겨진다. 도서관들조차도 인류가 사라지면 스러진 증기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으리라 여겨진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이 도깨비처럼 우쭐댈 시기도 길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노인과 나는 수도승처럼 수평선만을 바라본 채 발걸음을 옮긴다. 수위가 엎드린 갈대처럼 한껏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싸웠던 사람들처럼 둘이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기니 우습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노인과 내가 갯벌에서 벌을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궁금증을 빨리 털어 내려는 듯 노인에게 말한다.
“서해안 갯벌은 지금껏 많이 탐사하셨어요? 서해안 갯벌을 찾으신 특별한 사유라도 있으신가요? ”
노인이 서늘한 바람결처럼 해맑게 웃으며 곧바로 응답한다.
“나도 퇴직한 뒤부터 갯벌을 찾아다녔죠. 그 전까지는 직장에 붙잡힌 신세라 제게 자유라곤 별로 없었어요. 이런 관점에서 정년퇴직이란 게 직장인들에겐 참 좋은 제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모르게 노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두어 번 끄떡인다. 그러고는 탈출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재차 수평선으로 눈길을 던진다. 수평선을 봐야만 폐쇄에서 해방되듯 가슴이 탁 트이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기다리던 시점이 다가온 듯 오후 5시 20분에 접어들었을 때다. 노인이 나를 불러 새 세상처럼 광막하게 펼쳐진 갯벌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내게 비법을 전수하듯 은밀히 말한다.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지형을 잘 보세요. 이런 지형이 인터넷 공간에 동영상으로 제시되곤 하던 겁니다. 이런 지형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세요. 이런 지형에서는 각 구멍마다 호미를 갖다 대면 조개들이 틀림없이 나와요.”
기억을 되살리듯 생각하니 인터넷 공간에서 자주 대하던 지형들임에 분명하다. 조작된 허구의 공간이라고까지 여겨지던 지형들이었기에 가슴이 노도처럼 벅차오른다. 내가 근거를 남기듯 관련된 지형을 여러 장 사진으로 남긴다. 각각의 구멍마다 실험하는 학생들처럼 조심스럽게 호미를 대어 캐어 본다. 내 의아심을 허물듯 구멍마다 탐스러운 조개가 쑥쑥 드러난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듯 너무나 기뻐서 가슴이 마구 두근댄다. 조개 구멍을 발견한다는 것이 신경지(新境地)에 들어서듯 의미가 큼을 안다. 구멍을 모를 때에는 막노동하듯 갯벌을 호미로 무조건 긁어야만 했다. 막노동은 신체에서 정신을 빼앗기듯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랬는데 차원을 변화시키듯 이제 조개 구멍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절대로 달리기 경주를 하듯 서둘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다.
내가 노인에게 작업의 흐름을 정리하듯 양해를 구한다.
“먼저 양해를 구할게요. 대화는 밤에 나누기로 하고 밤에 안주로 할 조개를 집중적으로 캐면 어떨까요? 우리가 갯벌에 온 이유가 조개를 캐려는 게 아닙니까? ”
노인도 알겠다는 듯 흔쾌히 팔을 흔들어 대답한다. 그러고는 그도 작업할 공간을 찾아 발걸음을 백로처럼 가볍게 옮긴다.
작전을 전개하듯 본격적으로 조개 캐기에 임할 때부터다. 나에겐 가슴속으로부터 기쁨이 분수처럼 치솟아 작업 자체가 즐겁기 그지없다. 임시 저장 공간을 마련하듯 비닐봉지에 바닷물을 조금 채운다. 잡힌 조개들이 바다에서처럼 숨을 쉬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해수욕장에서는 분포가 조밀한 듯 명주조개가 많이 잡힌다. 떡조개나 모시조개도 간간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 잡힌다. 백합은 희소성을 드러내듯 어쩌다가 한 마리씩 잡히곤 한다. 바지락도 자태를 자랑하듯 잡히지만 상대적으로 작기에 곧바로 살려 준다.
비닐봉지에는 잡힌 조개들이 굵은 콩알이 채워지듯 서서히 차오른다. 재미에 빠진 듯 허리도 아프지 않고 다리도 아프지 않다. 조개 구멍을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상공으로 치솟듯 가슴이 마구 벅차다.
동료의 진척을 확인하듯 바라보니 노인도 상당한 양의 조개를 캤다. 조개를 안주 삼아서 밤을 즐기듯 충분히 음주하게 되리라 여겨진다. ‘동물의 세계’라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본 지식이 얼핏 물결처럼 밀려든다.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듯 동물들은 먹을 만큼만 먹이를 잡는다고 들었다. 자연의 지혜를 존중하듯 술안주가 될 만큼만 조개를 잡기로 한다. 조개의 양을 가늠하니 30분만 더 잡으면 둘러쓰듯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노인에게도 의중을 전하자 노인도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동의한다.
일몰의 시점을 피하듯 오후 7시 무렵에 갯벌에서 노인과 빠져나온다. 둘이서 함께 묵기로 하여 이야기꽃을 펼칠‘꽃지여관’으로 간다. 숙소는 406호인데 안면도 정류소에서 팔의 길이처럼 가까운 위치이다. 숙소의 창밖으로는 안면도의 휴양림이 먼발치로 선경처럼 그윽하게 보인다. 우선 실무적인 절차를 밟듯 잡힌 조개의 양을 확인한다. 무명조개가 73마리이고, 맛조개처럼 생긴 죽합(竹蛤)이 16마리이다.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듯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얄따란 조개도 27마리이다. 간단한 산술적인 계산으로도 가능하듯 잡힌 조개는 총 116마리임이 확인된다.
노인과 내가 양재기를 얻어 조개를 숙소의 화장실에서 깨끗이 씻는다. 작업을 마치듯 조개를 거의 다 씻을 무렵이었다. 50대 후반의 주인 여자가 숙소에 들어와서 말한다.
“여관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 수가 없어요. 음식을 마련하려거든 애초부터 펜션을 구했어야죠. 일단 제가 조개탕을 끓여 드릴게요. 일체 수고비는 받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말을 마치고는 주인 여자가 수확물을 가로채듯 양재기를 들고 나간다. 노인이 여자의 시종처럼 따라 나가더니 작은 밥상까지 구하여 들어선다. 노인이 은밀한 미소를 짓듯 묘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한다.
“수고비를 안 받겠다는 말은 수고비를 받겠다는 말보다도 지독한 말이거든요. 그래서 푼돈을 쥐어 주고는 빈 밥상까지 구해 왔어요.”
당연하다는 듯 수고비는 둘이서 계산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노인에게 말한다. 하찮다는 듯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푼돈이라서 괜찮다고 말한다.
이윽고 오래 별렀던 절차처럼 방바닥에는 빈 밥상이 차려진다. 군진의 시설물처럼 소주 4병과 마른안주 몇 점이 상에 펼쳐진다. 대략 20여 분이 산골의 시냇물처럼 흘렀을 때다. 숙소의 요리사처럼 주인 여자가 국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노인이 주인 여자에게 예를 표하듯 정중하게 말한다.
“어이쿠, 수고 많으셨어요. 그런 뜻에서 약주 한 잔만 하시겠어요? ” 주인 여자가 술을 안 마신다면서 선을 긋듯 거절하고는 나간다. 여자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노인과 내가 지기들처럼 밥상에 마주 앉는다. 각자가 궤도를 개척하듯 조갯국을 냄비에서 자신의 국그릇에 따른다. 서로 궁금하다는 듯 우선적으로 조개의 국 맛을 음미한다. 우려를 불식시키듯 개운하면서도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다. 주인 여자의 음식 솜씨가 전문 요리사의 수준처럼 높다고 여겨진다.
노인이 선공을 취하듯 먼저 입을 연다. 노인이 무슨 말을 석류알처럼 내쏟아 내 마음을 흔들지 궁금했다. 그랬는데 바늘처럼 날카로운 내 감각과는 동떨어진 말이 내게로 밀려든다. 지진이 발생하는 원인이 액체로 만들어진 맨틀 탓이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대답하기가 사막을 대하듯 막막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 벽돌담처럼 쌓은 상식들을 바탕으로 내가 노인의 질문에 응답한다.
“솔직히 저는 자연과학 쪽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에요. 하지만 과거에 자연과학을 전공했던 친구들의 얘기들을 토대로 제 의견을 말할게요.”
과거의 친구들은 옷을 뒤집듯 색다른 견해들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성간물질들이 홍수 때에 오물들처럼 집결하여 별(恒星)이나 행성(行星)이 되었다고 한다. 가족사를 얘기하듯 46억 년 전에 태양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보조를 맞추듯 당시에 태양도 만들어지고 지구도 만들어졌 다고 한다. 북극성이 하나이듯 태양계의 유일한 별은 태양이고 행성은 8개라고 했다. 화성과 목성 사이의 공간에 부평초들처럼 다수의 소혹성들이 존재한다고 들려주었다.
별은 화로의 불빛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라고 했다. 행성은 별빛을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천체라고 했다. 빛과는 거리를 두듯 지구도 행성이라고 했다. 행성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재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듯 행성들이 태양으로 끌려들었다. 무리를 뒤쫓듯 태양 쪽으로 움직였던 무수한 천체들이 태양으로 끌려갔다. 지구가 하루살이처럼 가볍게 태양으로 끌려가지 않았던 원인도 들었다. 전설의 숨결처럼 신비로운 생성 당시 지구의 이동 각도의 문제였다. 지구와 태양을 연결한 선분으로부터 벼랑의 경사처럼 거의 수직이었다는 점이었다. 물체가 추락하듯 끌려가는 대신에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는 행성이 되었다. 지구와 형제들처럼 비슷한 여건을 가졌던 천체가 7개의 행성들이라고 한다.
학문적인 이론이기에 우주의 숨결처럼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지구가 태양으로 끌려갔다면 어두움이 빛에 스러지듯 지구는 사라졌으리라 여겨진다. 내가 노인한테 상식을 뽐내듯 자연과학의 이론을 들먹일 때다. 노인이 더 이상 듣기가 거북하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나이까지 살았다면 누구나 그 정도의 상식은 가졌을 것 아니오? 그 정도까지는 서로 안다고 전제하고서 다음의 논의를 진행하면 어떨까요? ”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게 여겼던 근원을 털어놓듯 노인에게 말한다. “인간이 세상에 출생한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
이때부터 배가 본류에 합류하듯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이 든다. 노인은 그가 품어 왔던 생각들을 먼지를 털어대듯 탈탈 털어놓는다. 인간으로 출생한 것이 은총을 입듯 소중한 축복이라고 여긴다고 들려준다. 출생한 지역에는 초월하는 게 좋으리라 말했다. 인간에게 출생의 자유가 없었다는 칼날처럼 예리한 관점 탓이다. 출생한 곳이 어디였든 샘물처럼 소중한 의미가 변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시비하듯 과거사를 근거로 현실의 불편을 따지지 말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나에겐 조선을 강제로 병합했던 일본이 거머리처럼 싫게 여겨져 왔다. 격언 같은, 노인의 말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으리라 여겨진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침 햇살이 눈가루처럼 휩쓸려 드는 느낌이다. 세상을 해부하듯 얘기를 나누느라고 밤을 새운 모양이다. 창작 작업에 매달릴 때처럼 몸과 정신이 조금도 피곤하지는 않다. 노인을 만난 것은 새로운 세상과 마주치듯 삶의 축복이리라 여겨진다.
귀가를 확정하듯 오전 8시 20분발 서울행 고속버스를 예매한 터였다. 아쉬움을 달래듯 노인과 식사까지 함께할 처지는 아니라 여겨진다. 새의 둥지에서 벗어나듯 여관을 노인과 함께 나선다. 정선이 거주지라는 노인과 작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듯 버스에 오른다. 의자를 젖혀 인연을 소중히 여기듯 잠을 가만히 청해 본다. 그렇지만 가슴속의 황홀함이 기포처럼 들끓어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버스에 올라 명상에 잠긴 것만 해도 축복받은 듯 감동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