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9월 6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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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나의 생일이 찾아온다. 나의 형제자매는 생일잔치도 벌이고 겸사겸사 여름휴가도 진행하자고 했다. 모두 좋은 아이디어라며 만장일치로 결론을 맺는다. 내 마음이 부풀어 올라 합창할 악보집과 조그마한 마음의 선물도 챙긴다. 어린애처럼 경기도 가평에서 맞이할 생일잔치를 기다리고있다.
생일! 갑자기 잊고 지냈던 어느 날의 내 생일 축하연이 고개를 삐쭉 내민다. 가슴 밑바닥에서 황홀하고 짜릿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다. 내 생애에서 가장 가슴 벅찬 생일이었는데 이 어인 변고인가.
늦장가를 간 아들이 결혼 후, 처음 맞이한 내 생일 아침이 었다. 아들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내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아리숭하게 연막작전을 펴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순순히 따랐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안내에 따라 식탁 앞에 멈추니 놀라움이 충격으로 바뀌었다. 이런 정성어린 생일상을 받게 될 줄이야. 우렁각시가 나타나서 모락모락 김이 나오는 밥상을 차려놓고 감쪽같이 사라진 듯했다.
“어머나, 세상에 이럴 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며느리 등만 다독거렸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 진 터라 언제 일어나서 이 많은 음식을 차려놓았는지, 어떻게 만들었는 지 물었더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휴대전화기 속, 백종원 레시피를 들여다보며 마무리했다나. 하도 신통방통해서 그 전부터 음식을 많이 다뤄 봤냐고 하니 “아니오”라고 하며 하나하나 완성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말문을 막았다. 며칠 전부터 소리소문없이 뭔가를 준비하는 분위기는 감지했지만 이런 꿍꿍이가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바쁜 일이 있나보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둘이서 비밀 작전을 멋지고 깔끔하게 수행했다. 뜻밖의 잔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그 자체였다.
식탁 주변은 온통 생일을 축하하는 화려한 장식과 글씨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잔치상 주변은 아름다운 꽃들로 꽃밭이 집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했다. 상 위에는 수수떡 단자와 둥근 찹쌀떡에 노란 식빵 가루를 묻힌 단자가 이중으로 놓여 있고, 축하 케이크에는 내 이름이 새겨 있어 먹기에 너무 아까웠다. 생일 수수 단자는 내 아이들 생일에도 번거롭고 시간이 엄청 많이 걸려서 생략했던 터였다. 이걸 두 가지 색깔로 직접 만드느라고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들었을까. 정성이 하늘에 가서 닿을 듯했다. 고추, 새우, 명란젓을 주재료로 해서 완성한 이태리 요리들, 월남 보쌈, 갖은 해산물로 입맛 돋게 한 화려한 음식들, 마지막으로 미역국까지 셋팅하니 음식이 꽉 채워져 더이상 배치할 공간이 없었다. 화려하고 큰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니 임금님 수라상을 마주한 듯 했다. 그날 나는 여왕이 되어 붕붕 떠다녔으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도 떨려서 끝까지 부르기가 힘들었다. 감정이 북받치면 눈물이 나오지 않던가. 내색하지 않으려 빈 웃음을 날렸다. 새며느리가 한 식구가 되어 우렁각시처럼 빈틈없이 생일상을 차려 놓았다. 그런데 그 순 간에 나는 왜 옛날 옛적 오빠의 생일상을 떠올렸을까.
어느 날, 대학생 오빠가 여름방학에 하향했다. 오빠의 생일이 되자, 어머니는 세필 한산모시로 한복을 지어 입히고 생일상을 떡 벌어지게 마련했다. 민어, 조기 등 고급 생선과 낙지, 새우, 전복, 개불, 소라, 우렁쉥이 등 다양한 해산물 음식, 떡, 잡채, 나물, 과일을 포함한 온갖 별미로 밥상을 꽉 채웠다. 온갖 별식이 총출동해서 포식한 후, 오빠 덕분에 ‘잘 먹었다’고 생각했다. ‘왜 내 생일은 없냐’고 불평하는 가족도 없었고, 우리 모두는 이 상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빠는 어머니의 신앙이었으니까.
나는 결혼 전에는 생일상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혹시나’하고 아 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마찬가지다. 우리 어머니는 팔남매를 이삼년 터울로 낳아서 양육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 사업은 기울대로 기울어서 회복하기 어려웠으나 다른 일을 찾기 위해 항상 바빴다. 교육은 주로 어머니가 주관하였다. 자식 교육이 영순위인 어머니는 팔 남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오빠와 두 언니는 서울 유학생이었고, 셋째딸인 나는 고향집에서 자연스럽게 맏딸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걱정하고 한숨 쉬는 어머니의 모습을 대하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나 역시 오빠와 언니들을 걱정했다. 바로 아래 두 남동생, 그 아래 두 여동생은 너무나 어렸다. 그런 상황에서 내 생일이 오는지, 가는지는 나도, 어머니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오빠의 생일상이 우렁각시가 차려준 내 생일상과 오버랩되어 뜬금없이 떠올랐으니 이상야릇한 일이 아닌가. 이 묵직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시에 나는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며 어머니를 도와드리려 안간힘을 썼다. 빨래, 부엌일, 장보기, 심부름 등 열심히 했으나 어머니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했다. 공부 잘하면 기뻐할 듯해서 그도 열심히 해보았으나 잘했다거 나 가벼운 보상이라도 받은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서 문제 해결력이나 추진력이 앞섰다. 나는 애썼으나 어머니께 위로 받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당시의 서운함이 되살아나 오빠 생일상과 비교되어 새삼스럽게 감정통제가 쉽지 않았던 듯했다.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난 중학생 시절의 ‘어린 나’가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무의식 세계에 갇혀 있었던 일이 수면 위로 갑자기 떠 오르니, 나도 그 감정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십대 중반의 소녀가 너무 일찍 스스로 감정통제를 하며 애어른이 되었다. 그 나이에 친구들 과 까불며 가고 싶고, 먹고 싶고, 놀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모두 유보하며 지냈다. 우렁각시의 출연으로 단단히 그 시절을 보상받 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해서‘어린 나’가 기쁨의 눈물을 보였지 싶다. ‘일찍 철이 든다’는 말 속에는 ‘슬픔’도 조금 배어 있는 듯하다. 우렁각시처럼 상대에게 사랑과 정성과 시간을 내어 주면 슬픔이 상쇄되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리라. 자유롭고 순수하게!
우렁각시의 출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몇 년전, 친정 가족 여행에 도 온갖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개별 포장해서 각자에게 전했다. 예쁜 장식과 편지까지 동봉하니 감탄사를 날리며 그와 가족으로 결합됐다는 건 ‘ 축복 ’이라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인연 맺은 주위 사람들과도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좋은 파트너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도 ‘어린 나’처럼 자유를 유보하고 있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