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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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이국의 어느 도시에서 아침에 홀로 깨어나는 걸 꿈꾸었다. 드디어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에서 아주 은밀하게 생일을 맞이했다.
석양이 도버해협을 붉게 물들일 무렵, 나는 호텔 한 채만 한 배를 타고 밤새 도버해의 파도에 실려 아침 일찍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새벽의 창가에서 나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중앙역 안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가서 콜렉트 콜을 신청한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간 뒤 전화교환원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타향에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의 생일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목욕을 하고 촛불을 켜고 딸이 잘 되길 비는 어머니, 지금쯤 어머니는 어디선가 기도를 하고 있으리라. 그리곤 분명 사무실로 전화를 걸 것이다. 퇴직했습니다, 아마 전화를 받을 사장은 그렇게 대답할 것이고, 어머니는 걱정과 불안에 싸여 하루를 보낼 것이다. 어머니가 전화를 하기 전에 먼저 전화를 해야만 했다. 엄마, 여긴 암스테르담이에요. 회사일로 급하게 오느라고 말씀도 못 드리고 왔어요. 죄송해요, 그렇게 거짓말로 꾸며댈 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장에게 한 달간의 여름휴가를 요구하자 사장은 열흘 이상의 휴가는 결코 줄 수 없다고 했다. 여행을 꼭 가고 싶으면 사직하고 가라고. 나는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썼다. 직장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해방기념비가 서 있는 담광장은 수많은 여행자들과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갑자기 거리가 어두워지더니 이슬비가 뿌린다. 거리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지지만 거리의 히피들은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태연하게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고 있다. 그러나 비는 금세 멈춘다.
거리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어느새 햇볕이 내려쬐고 있다. 어디론가 재빨리 꼭꼭 숨었던 사람들도 어느새 다시 나타나 담광장은 축제 분위기다. 뭔가 자유로우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 수많은 여행자와 펑크족들, 거리의 연주자와 가수들로 어수선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거리를 구경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길거리에 드러누울 수 있는 자유, 이렇게 조그맣고 자유로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사람들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니 오늘 실컷 즐기자는 극단적인 표정이다. 무료함과 권태로움, 방종함과 신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 듯한 자만감….
만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대신 나도 그들 속에 섞여 있고 싶다. 앞에 걷고 있는 사람이 픽픽 쓰러져도 아무렇지 않고, 누워 있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휘청거리며 술을 마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도시. 나는 지구상에 이런 도시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안네 프랑크의 집으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운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춘다. 둥근 다리 아래로 총알 모양의 유람선이 유유히 지나간다. 나는 유람선이 지나가고 난 푸른 운하 위로 잔물결이 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모자를 운하 위로 날려 버린다. 나는 유람선이 지나간 물길 위로 모자가 떠내려가는 걸 안타깝게 바라본다. 저 모자는 흘러 흘러 어디로 갈까?
안네 프랑크의 집 앞에는 방문객들이 지루한 듯 여러 겹의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앞에는 몇 척의 낡은 보트가 밧줄에 묶인 채 운하 위에서 흔들거린다. 커다란 나뭇가지가 유리창에 그림자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물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1944년 8월 4일 게슈타포에게 발견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지기까지 2년간 안네와 그녀의 가족들이 살고 있던 곳. 안네 프랑크는 3층 다락방에 숨어 지내면서 아버지로부터 13세의 생일 축하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상상의 인물 키티를 상대로 편지체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유난히 좁고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회전식 책장을 밀자 안네의 가족이 숨어 살던 다락방이 나온다. 일기장에 등장하는 방마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그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벽에 붙여진 안네 가족의 사진과 그들이 사용하던 식탁이나 책상 등을 보자 전쟁보다도 오히려 더 인간의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나치의 광기에 온몸이 오싹해지며 전율을 느낀다.
그러다가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히틀러의 잔학상이 사진으로 전시된 다른 방에 들어가자 문득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던 일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다. 옆집에 금희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 애는 나와 같은 반이었다. 성격이 밝고 잘 까불어대던 그녀는 나와 친했다. 하교할 때 꼭 나를 기다려주거나 내가 먼저 가려고 하면 달콤한 말로 속삭이곤 했다. 오늘 내가 떡볶이 사줄게. 그러면 나는 먼저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꼭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 같았다.
어느 날 금희는 아주 심각하게 말했다. 나에게는 아주 큰 비밀이 있어. 사실은 내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어렸을 때 아버지 담뱃대에 찔려 시력을 잃었어. 아버지는 그 죄책감에 매일 술을 마시고 엄마를 때렸고 견디다 못한 엄마는 집을 나가버리셨어. 난 한쪽 눈이 안 보여도 별로 불편한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어느 날 눈병이 걸린 거야. 빨갛게 부어오르고 아파서 한쪽 눈에 안대를 했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장님과 똑같았지. 난 눈이 다 나을 때까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몰라. 만일 눈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눈이 다 나을 때 나는 결심했어. 만약 무슨 일이 생겨 나머지 하나의 눈마저 멀게 되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아름다운 곳을 너랑 같이 여행하고 싶어. 그러고 나서 난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될 거야.
일요일 아침, 금희와 나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아무 말 없이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조그만 강이 나왔다. 멀리 산이 온통 하다. 아카시아꽃이 강물에 하얗게 떠내려왔다. 우리는 흘러가는 강물을 마냥 바라보며 도시락을 까먹었다. 따스한 봄햇볕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내일 볼 시험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금희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두워지자 우리는 강둑을 내려왔다.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버스정류장에는 금희와 나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드디어 버스 한 대가 왔다. 의외로 버스 안은 붐볐다. 그런데도 버스 안은 조용했다. 누구 하나 기침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분위기에 눌린 탓인지 까불이 금희도 조용했다. 옆 사람이 불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계엄령이 선포됐어. 거리에는 사람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았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대문 앞에서 종일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나를 껴안고 통곡을 했다. 이년아, 여고생인지 여중생인지가 도청에서 젖이 도려진 채 죽었다는디 하루 종일 어디를 쏘다니다가 이제 들어오는 거여. 이 호랭이 물어갈 년아.
다음 날 아침, 가로수는 잘려 도로에 길게 누워 있고, 학교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써먹지 않은 비상연락망이 효력을 발생했다. 당분간 학교 나오지 말래. 중간고사도 무한정 연기래. 너무 신나지 않아?
아침 일찍 금희가 찾아왔다.
“지훈삼촌뭐하냐?”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놀러 왔어…. 학교도 안 가는데 뭐 하냐? 하루 종일…. 삼촌 뭐 하냐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지훈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유복자로 태어난 삼촌은 말없는 문학청년으로 자랐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삼촌은 아버지 몰래 데모를 하고 다녔다. 금희와 나는 삼촌이 없는 틈에 삼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걸 즐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금희는 삼촌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금희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침부터 누구냐?”
어머니가 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잔뜩 부풀어 오른 배를 앞으로 쏙 내밀며 부엌에서 나왔다.
“안녕하세요.”
금희가 웃으며 인사하자 어머니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다 큰 년이 재수 없게 꼭두새벽부터 남의 장사하는 집에 놀러나 오고….”
어머니가 어기적거리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자 금희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낼름거렸다.
“너네 엄마는 언제 애 낳니?”
“몰라.”
“챙피하지도 않나 봐. 너 같은 중학생이 있는데 어떻게 배불러가지고 다니냐?”
딸만 다섯을 낳고도 아들을 낳기 위해 또 임신 중이었던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았던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엄마가 늦게라도 아들을 안 낳으면 아빠가 바람을 피워서라도 딴 여자한테 아들을 낳아 올 거라고 그랬단다. 죽으면 죽었지 남의 자식은 못 키운다고 펄쩍 뛰더니 어느 날 갑자기 배가 불러 있더라. 만약에 이번에도 딸 낳고 나서 또 낳는다고 하면 나 가출해 버릴 거야.”
금희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때 나랑 같이 가출해서 절에 가자.”
지훈 삼촌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침부터 뮈가 그렇게 재미있냐?”
금희가 또 귓속말을 했다.
“너네 지훈 삼촌은 세수를 안 해도 멋있다. 레이프 가렛보다도 더….”
“말도 안 돼. 어떻게 감히 레이프 가렛과 비교를 하냐? 레이프 가렛이 들으면 기분 나빠서 기절하겠다.”
그러자 금희는 아이 워스 메이드 포 댄싱 오오오 올 나잇 로옹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레이프 가렛이 서울에 순회 공연을 오기로 하는 날 꼭 공연을 보러 서울 가자고 약속까지 했었다. 우리 집은 큰길가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집 가까이 파출소가 있어서인지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부쩍 눈에 띄었다.
그때였다. 대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두 명의 군인이 나타났다.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군인들이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은 물론 중학생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간다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떠오른 것이다. 군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들을 훑어보았다.
어머니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부엌에서 나왔다.
“자네는 어서 씻고 통장님 집에 라면 한 박스 배달해주고 자네는 이리 들어오게.”
어머니는 몹시 어색하게 웃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사람은 중학교 졸업하고 우리 집에 종업원으로 있고잉, 이 색시는 옆집 새댁인데 고추장 좀 빌리러 왔지라.”
군인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근데 무슨 일인지….”
그때서야 군인들이 말문을 열었다.
“저 물 한 컵만 주세요.”
군인들이 가고 나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왔다.
“언제 또 군인들이 올지 모르니까 금희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너희들은 다락방으로 들어가 꼼짝 말고 있어라.”
어머니는 다락방문을 열며 지훈 삼촌과 나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지훈 삼촌은 다락방에서 몰래 나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락방에 나 있는 필통만 한 창문을 통해 삼촌이 사라진 골목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두워질 무렵 지훈 삼촌은 뭔가에 쫓기듯 들어왔다. 최루탄 가스를 잔뜩 묻혀 왔는지 비좁은 다락방은 매운 공기가 떠돌아다녔다. 나는 재채기를 하며 창문 밖에서 뒤쫓아 온 군인들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군인들은 방문을 열어제치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군인들이 돌아가자 어머니가 다락방문을 세게 열었다가 꽝 소리를 내며 닫았다. 무언의 경고였다.
그날부터 지훈 삼촌과 나는 컴컴하고 좁은 다락방에 갇혀 어머니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어머니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금희는 수시로 다락방으로 놀러 왔다. 금희와 나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유행가를 따라 적기도 하고 묵은 잡지들 속에서 펜팔 란을 뒤적이며 편지를 썼다.
“금희야, 우리 내기하자. 열 명에게 펜팔을 해서 답장을 많이 받은 사람에게 만두 사주기.”
“좋아.”
편지를 쓰다 팔이 아파서 잠시 쉬다가 나는 문고판으로 된 『안네의 일기』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키티님이라고 시작하는 편지투의 일기가 재미있어서 나도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키티님, 안녕하세요. 나는 미지의 당신을 키티님이라고 부르겠어요.
이곳은 지금 전쟁이 난 것처럼 비행기가 하늘을 수시로 날아다니고 탱크는 바로 집 앞까지 다니고 있어요. 진짜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사람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기도 해요. 저는 컴컴한 다락방에 숨어 이 모든 것을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답니다. 가끔 꿈속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꿈을 꾸었지만 저는 죽지 않기 때문에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무서워요. 하루가 너무 길고 지겨워요. 텔레비전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지지직거리는 라디오를 몰래 듣고 있어요. 라디오에서는 동네에서 일어난 일까지 다 나오기 때문에 재미있답니다. 하루는 군인들에게 쫓기던 대학생 한 명이 군인들에게 에워싸여 두들겨맞고 있자 동네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덤벼들었어요. 사람들의 수가 워낙 많고 총을 든 동네 사람이 한 명 있는 바람에 군인들은 그냥 도망가 버렸어요. 그런데 라디오에서는 우리 집 가게 이름까지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지금 친구와 저는 다락방에서 촛불을 켜고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열 명에게 펜팔을 해서 답장을 많이 받은 사람에게 만두를 사주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꼭 저에게 답장을 보내주셔야 해요 꼭. 안녕.
금희와 내가 그런 편지를 쓰는 동안 지훈 삼촌은 우리 옆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거나 복사된 인쇄물을 읽곤 했다.
밤에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를 세며 잠이 들었다. 총소리는 마치 콩알 볶는 소리 같았다. 어머니가 외출을 하시면 나는 가끔 어머니 몰래 검은 콩을 꺼내 프라이팬에 볶았다. 그러면 콩 껍질이 벗겨지면서 흰 속살을 드러낸 콩이 톡톡 튀면서 프라이팬 밖으로 튀어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들키는 날이면 어머니는 이년아, 콩알이 튀어서 니 얼굴에 철썩철썩 붙어 안 떨어지면 곰보가 되는 거여 하시며 머리를 쥐어박곤 했다.
나는 총소리를 세며 잠이 들 때면 검은 콩들이 얼굴에 달라붙어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 깨어나 보면 여전히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쩔 때는 나쁜 놈에게 쫓기다가 다리에 총을 맞고는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허우적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면 창문 바로 아래에서 골목길을 왔다 갔다 하는 군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다락방에서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연탄 아궁이에 뭔가를 집어넣고 있었다. 연탄불을 갈고 있으면 불빛이라도 스며 나올 것인데 이상하다 싶었다. 아버지가 들어가시자 조심스럽게 아궁이를 열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파릇파릇한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얼른 뚜껑을 덮었다.
다음 날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데 머리에 띠를 두르고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윗뚜껑이 벗겨진 버스에서 팔을 휘두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차에 탄 사람들에게 물수건이나 삶은 계란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러나 총을 멘 청년들은 계란이나 과자를 먹지 않고 동네 아이들에게 다시 던져주고 있었다.
“꼭 운동회 하는 거 같지?”
“그래.”
갑자기 금희가 까르르 웃었다.
“너희 엄마도 저기 있다.”
어머니는 앞으로 툭 튀어나온 배가 무거운 듯 머리에 삶은 계란을 이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는 물에 적신 수건을 청년들에게 열심히 던져주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옆집 아주머니는 주먹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 몰래 밖에 나갈까?”
금희가 말했다. 갑자기 나는 어젯밤 아궁이 속에 돈을 숨기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희야 잠깐만, 기똥찬 것 보여줄게.”
금희와 나는 조심스럽게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나는 아궁이 뚜껑을 열었다.
“우아!”
금희가 탄성을 질렀다.
“우리 여기서 몇 장만 꺼내 쓸까?”
“좋지. 몰래 나가는 거다.”
금희와 나는 아궁이에서 몰래 돈을 훔친 뒤 밖으로 나왔다. 막 대문을 열고 나오자 마치 함박눈처럼 하얀 종이들이 하늘에서 와르르 쏟아졌다. 금희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안 돼, 이건 읽기만 해도 잡아간대.”
내가 잔뜩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그때 골목 끝에서 동네 아이들 한 떼가 고함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종이를 서로 주우려고 엎어지고 넘어지며 자기들끼리 싸웠다. 나는 그들 속에 끼어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동생이 달려왔다.
“어? 근데 언니 왜 나왔어? 엄마가 다락방 속에 있는 것 잘 감시하라고 그랬는데. 언니 빨리 들어가. 잡혀 가면 어떻게 할려고.”
“너, 엄마한테 절대로 말하지 마. 알았지?”
거리는 쥐 죽은 듯 우울하고 음울했다. 가게마다 셔터문이 내려지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우리 양동시장에 가서 수영복 사자. 그리고 서점에 가서 여학생 잡지도 사고…. 금희 니 것도 같이 사가지고 우리 풀장에 가자.”
“정말?”
“응, 우리 아빠는 돈이 얼마나 없어진지도 모를 거야.”
“계속 학교에 안 갔으면 좋겠다. 연합고사도 안 보고….”
그러나 시장에 도착한 우리들은 더 이상 웃고 떠들 수가 없었다. 시장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항상 시끌벅적하고 와글대던 곳에 사람 한 명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산하고 조용했다.
“어쩜 문 여는 데가 한 군데도 없냐?”
“백화점으로 가자.”
금희와 나는 불탄 채 검은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거리를 지나 시내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길모퉁이에는 부서진 차들이 쌓여 있었다. 갈수록 거리를 가득 메운 노랫소리와 함성들…. 그리고 곳곳에서 들리는 통곡 소리와 총소리의 기묘한 조화….
“금희야, 우리 돌아가자. 자꾸 눈물이 나서 못 가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돌아가냐? 온 김에 금남로까지 가보자.”
하늘에는 고추잠자리보다 더 많은 헬기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기에 섞인 메케한 최루탄 때문에 눈물 콧물 흘리며 끊임없이 재채기를 하고 다녔다. 느닷없이 총소리가 크게 들렸다. 군인들에게 잡힌 한 떼의 청년들이 개머리판으로 두들겨맞고 어딘가로 끌려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군인들을 쫓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에는 검붉은 피가 엉켜 붙어 있었다.
“이 녀석들, 집으로 빨리 가지 않고 여기서 뭘 해?”
총을 든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호통을 쳤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을 듣고 찔끔찔끔 울기 시작했다.
“금희야, 난 집으로 갈래. 무서워서 더 이상 못 가겠어.”
“맘대로 해.”
금희는 사람들이 간 곳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어떻게 집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게 들어왔다. 멀리 우리 집이 보이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에게 야단을 들은 뒤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지훈 삼촌마저 어디 갔는지 어두워질 때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촛불을 켜 놓고 책을 읽고 있는데 금희가 찾아왔다.
“나 오늘 죽은 사람 많이 봤다. 도청까지 갔었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지 막 울었다.”
“지훈 삼촌도 아직 안 들어왔어. 만약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 마. 지훈 삼촌은 절대 안 죽어.”
“왜?”
“내가 사랑하니까.”
금희는 그렇게 말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 여기서 자고 갈게.”
그러나 지훈 삼촌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도청에서 삼촌을 보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삼촌이 총을 메고 차를 타고 다니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아버지는 하루 종일 삼촌을 찾아다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종일 초조하게 집 앞에서 기다렸다.
“우리도 지훈 삼촌 찾으러 갈까?”
금희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금희와 같이 삼촌을 찾기 위해 금남로로 갔다. 이제는 더 이상 무섭지도 않았고, 최루탄 가스의 메케한 냄새도 참아낼 수 있었다. 금남로는 주위의 건물에서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바닥에 잘게 부서져 마치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렸다. 영화에서 본 황금광처럼 눈이 부셔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유리조각들이 햇볕에 반짝거렸다. 유리조각 위를 걸을 때마다 하얀 눈 위의 구두 발자국처럼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7월에 개통되기로 한 지하상가의 입구에는 차들이 장난감 차처럼 엎어지고 부서진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전번에 도청에 갔을 때 여기에 시체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시체들을 다 도청 안으로 옮겼대.”
“다음에 여기서 귀신 나오는 거 아냐?”
“귀신이 어디 있냐? 만약에 너네 삼촌이 죽었으면 나도 따라 죽어 버릴 거야.”
“언제는 지훈 삼촌은 절대로 안 죽는다면서?”
“그러니까 만약에라고 했잖아. 지훈 삼촌은 살아 있을 거야. 나 다음에 지훈 삼촌과 결혼할까?”
“언제는 비구니가 된다면서…. 어쩌면 삼촌이 죽었을지도 몰라.”
“아냐, 아냐.”
금희가 바닥에 깔린 유리조각을 발로 힘껏 찼다. 유리가루가 햇볕에 반짝거리며 날아갔다. 금희와 나는 도청 앞까지 갔다가 삼촌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삼촌은 청년들 몇 명에게 업힌 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병원에 가자니까 한사코 집으로 데려다 달랍니다. 몇 군데 병원에 갔지만 의사도 없어요.”
머리칼이 긴 청년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갔다. 그날 밤 따라 유난히 총소리가 크게 들리고 군인들의 군화 소리가 조급하게 골목길을 왔다 갔다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병원으로 데려가면 큰일 나. 집안 식구들 중에 데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다 잡아간다는데 하물며 이렇게 총까지 맞았다면 살아남기 힘들지, 아마.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그럼 어떻게 하나? 만약 군인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일 텐데. 우선 어디다 숨기고 나서 간호해야 할 거여.”
동네 사람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수군거렸다.
아버지는 삼촌을 들쳐업고 동네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병원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삼촌을 업고 돌아왔다. 삼촌은 어두컴컴한 다락방 속으로 옮겨졌다. 삼촌은 밤새 신음을 했다. 그 신음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골목길에 서 있는 군인이 꼭 쫓아올 것만 같아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엄마….”
삼촌은 혼수상태에서 나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삼촌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가지 마, 엄마….”
삼촌은 계속 헛소리를 했다. 나는 그런 삼촌이 불쌍해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어느새 삼촌은 나에게 안긴 채 나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듯 삼촌의 머리를 무릎으로 받쳐 안았다. 나는 어느새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가 되어 있었고, 삼촌은 엄마 젖꼭지를 문 채 잠든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씩 다락방 문을 열어 보았다. 어둠 속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산기가 있는지 가끔씩 신음 소리를 냈다. 삼촌이 조용해지자 나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방으로 내려왔다.
“옆집 할머니에게 가서 곧 동생이 나올 것 같다고 하거라.”
아버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아이구, 무신 총소리가 인공 때보다 더 요란하다냐.”
옆집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옆집 할머니는 마흔 살이 다 된 어머니가 몹시 걱정이 된 듯 주름살투성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영영 어둠이 걷힐 것 같지 않은 밤은 끝없이 길기만 했다.
“오메, 고추다, 고추.”
옆집 할머니의 탄성 소리와 동시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온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총소리도 멈춰 있었다.
아침 일찍 금희가 찾아왔다.
“지훈 삼촌 들어왔냐?”
“우리 엄마 아들 낳았다.”
“삼촌 들어왔냐니까?”
그때 옆집 할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오메, 누구다냐? 웬 가시네가 아침부터 재수 없게 넘의 집에 오고 그런다냐? 삼시랑할매 노하시면 어쩔려구. 부정 탄다. 빨리 가거라.”
옆집 할머니가 금희에게 소금을 뿌리며 말했다. 금희는 나가는 시늉을 하다가 할머니가 들어가자 다시 왔다.
“지훈 삼촌 얼굴만 잠깐 보고 갈게. 사실은 어젯밤에 지훈 삼촌하고 결혼하는 꿈을 꾸었거든.”
나는 어이가 없어 금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훈 삼촌!”
금희가 삼촌을 불렀다. 그러나 삼촌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더 큰소리로 삼촌을 부르며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이상했는지 아버지가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다냐. 하필이면 귀한 아들 태어난 날 조카가 총 맞아 죽다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이럴 때 죽으면 개죽음인디…. 어디다 맘대로 파묻지도 못하고 큰일이네.”
“그러게. 작은아버지가 대학까지 보내줬으면 공부나 열심히 헐 것이지 데모는 무슨…. 호강에 초쳤구먼.”
금희는 울부짖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구야? 누가 삼촌을 죽였어. 나쁜 자식들.”
그날 금희는 차를 타고 다니며 데모하다가 다리에 총을 맞고 퇴학을 당했다. 그 후 몇 번 금희 집에 찾아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금희 아버지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 속의 금희는 머리칼이 하나도 없어 추워 보였지만 아주 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문득 금희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멀리,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안네 프랑크 집을 나오자 을씨년스런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어느새 다시 담광장 앞에 와 있다. 광장에는 아직도 술 마시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얼굴에 온갖 색깔로 페인트칠을 한 사나이가 피리를 불며 지나간다. 붉은빛으로 염색한 긴 머리칼이 환상적이다. 피리 부는 남자가 기타 치는 남자 옆에 앉는다. 그러자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피리와 기타가 기묘하게 어울리고 여행자들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른다.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어온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낭에서 담요를 꺼내거나 스웨터를 꺼내 어깨에 걸친다. 마치 신이 노해서 암스테르담을 모조리 쓸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강풍이 몰려온다.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자 그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거나 정열적으로 춤을 추면서 사람들을 붙들어 놓으려고 한다. 가면 안 돼, 너희들이 가면 우리는 심심해서 어떡하니? 가지 마, 제발 우리하고 조금만 더 놀자. 응? 하는 애절한 눈빛으로.
거리는 어느새 텅 비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찢어진 모자와 얼룩덜룩한 낡은 담요를 품바처럼 뒤집어쓴 늙은 거지가 한 손에 술병을 들고 휘청거리며 지나가다가 그 자리에 고꾸라진다. 허공을 내젓는 늙은 거지의 앙상한 손이 바르르 떨린다.
나는 빗줄기를 피해 선물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나막신이나 풍차들이 손님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앙증맞게 진열되어 있다. 엽서도 고호의 그림이나 렘브란트의 명화 등을 비롯해 풍차가 있는 한가로운 정경까지 다양하고, 보기 민망한 포르노 엽서도 눈에 띈다. 그런데 명화도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재미있게 변형되어 있다. 참 재미있는 나라야.
나는 공중전화부스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간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이 든다. 가족들은 전부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그 사이에 부도라도 나서 어디엔가로 도망가 있는 걸까? 아니면 갑작스럽게 이사라도 간 걸까? 설마 불이 나서 타버린 것은 아니겠지. 서울을 떠나온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연락이 안 되자 온갖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든다.
나는 갑자기 내가 떠나온 곳이 실제로 존재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관계 맺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 정말 그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나는 거리를 걷는다. 엿장수들이 목에 줄을 매고 엿판을 들고 있는 듯한 둥그런 악기를 목에 걸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연주하는 사람이 연주를 하고 있다. 얼굴에 온통 페인트칠을 하고 앞니가 모두 빠진 채로 입으로는 피리를 불고 손으로는 악기를 두드린다.
남자의 기이한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마술에라도 걸리게 할 듯한 악기 소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영혼을 쥐어짜는 애절한 소리가 황홀함의 극치를 이룬다. 오르페우스가 천국의 왕 하데스를 탄복시키기 위해 켜는 하프 소리가 이와 같으리라. 나는 그 이상한 힘에 이끌려 바닥에 앉는다.
남자는 연주를 끝내자 구경꾼들이 던져준 동전을 주운 뒤 어디론가로 사라진다. 나는 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넘어지고 만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게 걸려 넘어졌는데 그 옆에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형의 건물 아래에는 엎드려 자고 있는 사람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들 틈 속에서 나는 한 어린애가 쭈그리고 잠들어 있는 걸 본다. 얼굴은 거무틱틱하게 더럽혀져 있고, 콧등에는 심술궂은 그 무엇이 서려 있다. 엄마에게 야단을 맞고 나와 울다가 길거리에서 잠이 든 걸까? 아니면 거리의 아이일까? 아니면 사창가의 여인을 엄마로 둔 불행한 아이일까?
도대체 사람에게 어떤 미래가 있다는 말인가? 미래란 별 볼 일 없는 현재를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고통스런 지금 현재도 언젠가 힘들고 절망적일 때 꿈꾸던 찬란한 미래가 아닌가? 세상에 나오면 온갖 병과 고뇌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뿐이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얼굴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이의 얼굴에 묻은 평화로움을 조금이라도 묻히겠다는 듯이. 나의 손끝이 아이의 볼에 닿는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생명 그 자체와 미래, 그대로의 느낌이다. 그렇다.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참으로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술병을 내밀며 마시라고 한다. 갑자기 나는 이 낯선 남자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햇볕에 진분홍빛으로 빛나는 남자의 긴 머리칼이 무척 아름답다. 문득 나는 오늘이 내 생일임을 기억해 낸다.
나는 남자에게 술병을 받아든다. 그리고 높이 쳐들어 축배를 한다. 술이 묻은 입술이, 혀가, 목구멍이 불탄다. 거리가, 나무가, 하늘이 불탄다. 멀리 물 위의 암스테르담이 마구 불타기 시작하고 있다. 아아, 너는 이제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