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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사진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창섭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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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가장 오래된 앨범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빛이 바래고 모서리가 살짝 구겨진 흑백사진 한 장, 그 사진 속에는 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곧게 세운 어깨에 인자한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8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사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손자를 만난 듯, 할아버지의 눈빛은 따뜻하고도 애틋하기만 하다.
사진은 인간의 시간을 붙잡아 두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은 떠나도, 목소리는 사라져도, 사진 속의 얼굴은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문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리움은 시공을 초월한 간절함으로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사진이 바로 그러하다. 그 사진은 한 가족의 역사이고, 한 시대의 증언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슬픔의 기록이다.
1940년대 초, 일본 제국주의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청장년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징용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이 강제 동원은,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폭력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군청에서 연초 지도원으로 성실히 일하고 있었다. 두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작은 행복을 가꾸어 가던 평범한 남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차출 명령이 내려졌다.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어린 아들을 한 번 품에 안아준 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가 끌려간 곳은 남태평양의 남양군도였다. 오늘날의 미크로네시아, 트럭 제도라 불리는 그 섬들은 당시 일본 해군의 핵심 전략 거점이었다. 아름다운 산호초와 에메랄드빛 바다로 둘러싸인 그 섬에서, 조선에서 끌려온 수많은 청년들이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다. 군사시설 건설, 물자 수송, 비행장 건설, 뼈가 부서질 것 같은 노동이었지만 불평을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보급은 충분치 않았고, 잠자리도 불편했으며, 고향 소식은 드물게만 전해졌다. 할아버지가 간간이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셨던 것은, 그 고된 환경 속에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은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미군은 섬에서 섬으로 진격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트럭 섬 역시 미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폭격기들이 하늘을 뒤덮고 함포 소리가 섬을 뒤흔들었다. 그 혼돈 속에서 할아버지는 이웃 섬으로 보급물자를 가지러 배를 타고 가다가 미군의 폭격을 맞았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1945년 8월, 전쟁은 끝나고 일본이 항복했다. 온 나라에서 해방의 함성이 울려 퍼졌으나, 할머니에게 그해 8월은 기쁨의 달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사람들 속에서 남편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기다림은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어도 할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세월만 흘러갔다. 젊은 나이에 생과부가 된 할머니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셨을까. 어쩌면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셨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잃은 증조할아버지는 슬픔을 잊으려 술로 세월을 보내시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만에 뒤를 따르셨다. 증조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담배로 아픔을 곱씹으며 홀로 남은 며느리를 걱정하시다가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 뒤에 눈을 감으셨다. 한 집안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사람의 부재가 이토록 여러 가족의 삶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전쟁은 잔인하게 증명했다.
아버지는 당시 중학생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가슴속에서도 기다림은 사무쳤다. 할머니는 27살에 홀로 되어 두 아들을 키우셨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남편이 보내준 봉급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그 봉급마저 끊기자 농사를 지으며 오로지 두 손과 두 발로 버티셨다. 그 신역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도 할머니는 무너질 수가 없었다. 종갓집 며느리라는 책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할머니만을 바라보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있는 한, 할머니는 쓰러질 수 없다는 것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셨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남긴 것은 징용 가기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할머니는 그 사진을 앨범 깊숙이 모셔두고 오랫동안 혼자서만 보셨다. 먼 훗날 할머니의 손자인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족들에게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신 없이도 내가 열심히 살아서 이렇게 손자를 보았노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트럭 섬을 찾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그 땅의 흙을 한 줌 퍼서 모셔왔고, 할머니의 무덤 곁에 합장하였다. 전쟁이 끝나고도 6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60년 만에 흙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같은 땅에 나란히 누워 계신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해후를 죽어서야 비로소 이루신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를 사진 속의 모습으로 안다. 아버지의 기억으로, 할머니의 눈물로 할아버지를 알고 있다. 어릴 적 친구들이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사탕을 자랑할 때, 나는 자랑할 할아버지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빈자리는 오랫동안 나에게 애절함으로 남아 있었다.
태평양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전장에서 죽어간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남겨진 가족들, 기다리다 지쳐간 아내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 그들의 고통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의 청년들은, 이름도 기억되지 못한 채 이국의 땅에 묻혔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처럼 저마다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우리 가족의 역사를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 사진이 있기에 할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신다. 해마다 제사상을 차릴 때, 아버지가 조용히 꺼내 놓으시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면, 나는 80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60년 만에 귀향한 할아버지는 이제 사진 속에서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신다. “얘들아, 인생은 자신이 헤쳐 나가기에 달렸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고 하시는 것 같다. 사진 속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수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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