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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 고개의 전동성당

한국문인협회 로고 윤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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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은 김제 들녘에 묻혔지만, 내 삶의 결은 모두 전주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내게 고향은 언제나 전주였다. 학창 시절의 소란도, 첫 월급의 떨림도, 아이의 첫걸음도 모두 이 도시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쉰 중반에 접어들 무렵, 삶은 예고 없이 나를 서울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낯선 대도시의 숨 가쁜 소음 속에서 나는 뒤늦게 고향이라는 단어를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공기를 떠난 뒤에야 더 선명해진 고향은 날 선 질문이 되었다.
서울은 건조한 산문(散文)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스치면서도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눈빛에는 저마다 서둘러 찍어야 할 마침표만 있을 뿐, 행간의 여백은 보이지 않았다.
살에 착 감기는 그곳 공기에 익숙했던 몸은 서울의 건조한 계절을 오래 낯설어했다. 그래도 시내버스 한 정거장만 벗어나면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는 대도시의 익명성 뒤에 숨는 편안함은 좋았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도시락 하나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들. 보이는 창문마다 수없이 많은 불빛이 켜졌지만, 그 어느 창에도 내가 불러볼 이름은 없었다. 고향에서는 저녁 무렵 골목만 걸어도 아는 얼굴 하나쯤은 마주쳤는데, 이곳에서는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서도 끝내 혼자라는 사실을 밤이 되면 실감하곤 했다.
어느 늦여름 비가 내리던 저녁, 퇴근길에 가구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아현동 고개를 넘고 있었다. 하루의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던 그때, 갑자기 코끝을 스치는 비릿하고도 서늘한 공기가 있었다. 그것은 전주의 냄새였다. 조금 낡았지만 오래 만진 물건처럼 손에 익은 그 거리였다.
한순간, 서울이라는 도시의 투명한 막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젖은 가로수 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전주천 둔치의 버드나무를 스치던 빗소리와 다르지 않았고, 우산을 스쳐 흐르는 빗물에서는 오래전 퇴근길 전동성당 앞을 지나던 저녁의 냄새가 번져 나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삐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 혼자 다른 시간 속을 걷고 있는 듯했다.
순간, 환각처럼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여름비에 젖어 검게 빛나던 전동성당의 돌길이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가 아현동 고갯길의 자동차 경적을 지우고, 발밑의 보도블록은 성당 앞의 묵직한 돌길로 치환되었다. 비가 갠 태평동 골목 끝에서 피어오르던 눅눅한 흙내음이 아스팔트의 열기를 뚫고 올라왔다. 서울의 마천루 사이로 전주의 익숙한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중앙시장 노전의 무쇠솥에서 막 건져 올리던 상추튀김의 맛까지 혀끝에 되살아났다. 그날 이후 아현동 고개를 지날 때마다 나는 전동성당 앞을 걷는 사람처럼 걸었다.
서울살이 3년째 되던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졸다 깨어 창밖을 보았을 때, 한강 위로 떨어지는 붉은 노을이 마치 모악산 너머로 저물던 해와 닮았었다. 그 붉은빛은 내게 “그만 돌아오라”는 무언의 전갈처럼 느껴졌다. 특별한 사건도, 거창한 결심도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서울의 하루가 내 삶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을 빠져나와 천천히 택시에 올랐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낮은 건물들과 익숙한 간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새로 생긴 건물도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조용해졌다. 서울에서는 늘 어디론가 서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 생각은, 전주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나를 놓아주었다.
수도권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전주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거나 혹은 멈춰 선 듯 보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뒤처짐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느린 저녁이 싫지 않다. 이곳은 내게 거창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골목의 돌담들에서 나는 오래 비워 두었던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일부러 전동성당 앞으로 발길을 옮기곤 했다. 젖은 돌길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아현동 고개에서 나를 붙잡았던 그날의 빗소리를 다시 들려주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성당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서 있던 젊은 날의 나와, 아무 의심 없이 내일을 믿던 시간까지 함께 그리워했던 것이었다.
그제야 내 고향의 느린 시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했던 이 도시의 느림이 무엇인지. 서울에서는 하루가 지나가면 어제의 얼굴도 금세 잊혔지만, 이곳에서는 십 년 전 가게도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전주는 오늘도 묵묵히 자기 속도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 느린 불빛들이 싫지 않다. 아마 내 삶의 마지막 풍경도 이 도시의 낮은 지붕들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모악산 너머로 해가 지는 저녁이면 나는 창문을 쉽게 닫지 못하고 괜히 오래 열어 둔다. 하루 동안 달아올랐던 마음도 그 바람을 따라 조금씩 식어 간다.
서울에서는 끝내 낯선 손님으로 살았지만, 전주에서는 저녁 바람 하나에도 내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향은 오래 머물렀던 장소라기보다, 아무 말 없이도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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