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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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군 복내면 괴정마을은 칠원윤씨(漆原尹氏) 집성촌으로 나의 선조가 수백 년 터를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선친 생전에 자주 들르곤 했던 덕암재(德菴齊)를 오랜만에 찾았는데 선친이 태어난 이곳 이정표가 유정리에서 옛 이름인 괴정(槐亭)마을로 바뀌어 있었다. 가족의 가승(家乘)을 만들면서 16대 선조의 아호가 괴정임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그 유래를 알게 되었다. 태어난 지명을 아호로 쓴 것이다.
마을 어귀 회화나무가 있는 집에는 집안의 대모님이 살고 있는데, 오백 년 된 나무로 임금이 벼슬을 한 선조에게 하사하여 심은 나무라 한다. 이 회화나무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이 댁 이찬식 윤창숙 내외분은 우리나라 삼베 명인이다. 뒤안 대숲에 대나무보다 더 높게 자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까치둥지를 품고 서 있다. 아침에 울면 기쁜 일이, 저녁에 울면 슬픈 일이 생겨 동네의 길흉사를 알려주곤 한다는 까치가 회화나무의 따뜻한 마음을 알았을까 두 둥지나 틀었다.
이런 외줄기 대나무 같은 회화나무는 처음 본다. 대보다 더 높이 서서 푸른 잎을 깃발처럼 날리고 있었다. 절개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처럼 가지를 치지 않고 대쪽 같은 모습으로 곧게 서 있다. 대나무는 옆의 나무를 위협한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대숲에서 버티어낸 모습이 장하다. 회화나무의 큰 둥지에서 제 모습을 그대로 지켜낸 의연하고 당당한 기상이 느껴졌다.
회화나무 아래에서 집안 내력과 젊은 한때 어려움을 겪은 내 삶의 옹이를 아는 선생님이, 아픔을 이기고 사는 내 모습이 이 회화나무를 닮았다며 회정(亭)이라는 아호를 주셨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의 변화를 먼저 아는 사람이며, 이 변화를 읽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져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하셨다. 그리고 회화나무처럼 지혜 있고 당당하게 살라며 ‘근본을 알고 근원을 맑게 한다’는 정본청원(正本淸源)과 세상을 ‘심안(心眼)으로 조용히 바라보는’ 만물정관(萬物靜觀)의 사고가 필요하다 했다.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고 나는 그렇게 되고 싶어 아호를 받았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길한 나무로 심으면 좋은 기운이 들어와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문리가 트이고, 사업하는 집에는 사람이 모여들어 번성한다 했다. 그러나 내가 회화나무를 처음 보고 좋아하게 된 것은, 나무의 진초록 가지와 푸른 잎에서 진취적 기상을 느껴서였다.
내게는 두 딸이 있는데 큰딸은 회화나무 꽃인 회화, 작은딸은 열매인 회실이라는 아호를 주고 싶다. 이러면 괴정 할아버지에 이어 회정 회화 회실로 우리 가정은 회화나무 뿌리에서 나무와 꽃, 열매가 어우러진 셈이다.
8월 어느 날, 황백색의 쌀알 같은 꽃이 피어 있는 회화나무 아래 한 뼘만 한 묘목들이 군데군데 자라 있었다. 나는 이 묘목을 이듬해 봄, 마을의 덕암재와 주위에 옮겨 심었다. 세월이 흘러 괴정 할아버지의 뜻이 튼튼한 뿌리로 내려 덕암재는 회화나무 동산이 되고, 괴정마을에는 회화나무 숲이 우거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