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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桑田碧海)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인걸(시흥)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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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이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서울 잠실을 생각한다. 오늘날의 잠실은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선 곳이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논과 밭, 뽕나무밭이 있던 그곳은 이제 거대한 아파트 숲과 상업시설, 체육시설이 들어선 도시로 변했다.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 잠실이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뽕나무밭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대한 도시가 들어섰으니, 과거와 현재의 간격이 실로 놀랍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서울 전체를 두고 ‘상전벽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서울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완전히 과거를 지워버린 도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된 골목 한쪽에 남아 있는 담장, 세월에 닳은 계단, 이름만 겨우 남은 길, 오래된 시장과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과거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붙잡고 있다. 새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서도 옛 동네의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될 때가 있다.
서울을 걷다 보면 그런 순간을 만난다. 빌딩숲 사이로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보이고, 아파트 단지 옆으로 낮은 담장이 이어진다. 넓게 뚫린 도로 곁에서 예전 골목길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춘다. ‘이곳도 예전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가 아무리 변해도 시간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흔적들이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 수도권으로 나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랜만에 찾아간 곳에서 길을 잃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분명 예전에 지나갔던 길인데 낯설기만 하다.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던 좁은 길은 넓은 도로가 되었고, 논밭이 펼쳐져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끝없이 들어서 있다. 예전에 친구와 걸었던 들길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어느 순간 나는 그곳이 정말 내가 기억하던 장소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신도시가 들어선 곳은 더욱 그렇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넓은 도로와 반듯하게 들어선 건물, 높이 솟은 아파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깨끗하고 편리해졌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감정이 밀려온다. 예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그곳에서 살았는지, 어떤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갔는지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변화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더 편리한 집을 원하고, 도시는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도로가 넓어지고 학교와 병원이 생기며 새로운 주거지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낡은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도 함께 나아간다. 도시의 변화는 어쩌면 시대가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장소에는 사람의 기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 장을 보러 가던 시장, 친구와 약속하던 나무 아래, 부모님 손을 잡고 지나던 길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그 시절의 냄새와 목소리와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남아 있다. 그래서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곳에 얽힌 기억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세월은 참 빠르다. 내가 기억하는 동네도 변하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도 변한다. 어제까지 있던 건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 한 세대가 살아온 집이 헐리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아파트가 들어선다. 그렇게 세상은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작은 흔적 하나쯤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라도 좋고, 옛길의 일부라도 좋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작은 표지석 하나라도 좋다.
그것이 있다면 훗날 그곳을 찾은 누군가가 ‘여기는 예전에 이런 곳이었구나’ 하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전벽해는 단순히 세상이 변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는 시간의 위력과 인간의 삶이 함께 들어 있다. 뽕밭이 바다가 될 만큼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시간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과거는 흔적의 형태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변화하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무조건 옛것을 그리워하지도, 새것만을 반기지도 않는다. 다만 새로움 속에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함께 살아 있기를 바란다. 도시가 아무리 높아지고 넓어져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도 서울의 어느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담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이곳은 아직도 기억 속에 있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뽕밭이 바다가 되고, 논밭이 도시가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질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지나온 길의 흔적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시간에게 건네는 작은 예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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