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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시간을 품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노갑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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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데크를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썰물 때라 훤히 드러난 바닥에서 갈매기 떼들이 먹이를 찾는다. 오래전 기억 속에 저장된 서랍을 열어 예쁜 추억을 함께한다.
지난봄, 한적한 시골에 사는 조숙희 갯벌 화가를 만났다. K문우가 한 아름 꽃다발로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나는 고향 까마귀를 만나서인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녀의 남향집은 파릇한 잔디와 색색의 야생화가 수줍게 피어났다. 처마 밑에 걸린 그림 한 점이 화가의 집이라는 걸 넌지시 알려주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거실과 방 벽면이 온통 그림으로 장식되어 전시관처럼 느껴졌다. 파도 소리가 출렁거리고, 갯벌의 비릿한 냄새가 스멀거려 마치 바닷가에 서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화가가 그린 그림 속의 풍경을 감상하며 바닷길을 걷는다. 갯벌은 시시각각 바뀌는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초록빛으로 덮은 감태와 사람들이 어우러진 작품에 발길을 멈춘다. 꽃샘추위를 견디며 감태를 채취하는 부부와 짝을 지은 여인들의 표정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서로 소통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초가을 햇살을 안은 함초는 맨드라미꽃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갯벌을 붉게 물들였다. 금빛 노을에 반짝이는 갈대의 물결은 원숙한 황혼 부부를 연상케 한다. 검푸른 물길 사이에 닻을 내린 빈 배는 외로움을 견딘 우리의 시간을 닮은 것 같다. 이십여 년 동안 갯벌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표정을 옮겨 담은 여러 그림에서 그녀만의 철학이 배어난다.
“바닷길을 걷다 반짝이는 갯벌과 갈대를 보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 전에 황급히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나에게 그림은 나의 별을 찾는 여정이고, 노래를 찾는 일입니다.”
조숙희 화가는 갯벌 풍경을 별을 만난 듯 화폭에 담는다고 했다. 그림 속 갯벌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품은 땅이고, 힘든 삶을 견뎌낸 얼굴이었다.
갯벌은 물이 빠져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힘을 지녔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침묵이 담겼고, 내일을 바라보는 희망이 깃들었다. 갯벌은 화려하게 핀 벚꽃의 시간이 아니라, 오래 쌓여 이룩된 인내의 시간이었다.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왜 오래전 바닷가를 서성거렸던 내 모습이 갯벌 위에 겹치는지 모르겠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던가. 애써 웃어도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고, 사람들 속에 섞여도 혼자인 것처럼 외로웠다. 그럴 때면 가까운 바다를 찾아 나섰다. 끝없는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쉴 새 없이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 하늘을 나는 갈매기 떼, 쪽빛 물결에 반짝거리는 윤슬 위에 내 아픔과 근심을 내려놓았다. 서늘한 갯바람에다 마음속 안타까움과 아픔을 날려 보냈다. 바다는 말이 없었지만, 늘 같은 몸짓으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어느 날은 썰물 때의 바다를 만났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넓은 갯벌이 민낯을 드러내었다. 거뭇하게 펼쳐진 진흙 바닥은 황량해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뻘게 무리들과 바지락이 숨을 쉬고 있었다. 물길이 지나간 흔적, 갯지렁이가 기어간 자국, 뻘게가 드나드는 구멍이며 생명의 무늬들이 수없이 새겨졌다. 갯벌은 언뜻 보면 텅 빈 땅 같지만,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썰물이 지나간 갯벌은 밀물을 기다리며 해양생물을 보듬어 키웠다. 생명을 품은 갯벌을 통해 나는 아픈 흔적들을 조금씩 지울 수 있었고, 기운차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
화가는 해양생물의 보고인 갯벌의 중요성을 그림으로 말한다고 했다. 그녀는 캔버스를 만든 표현기법이 남달랐다. 신문지를 잘게 찢은 다음 옻 용액을 부어 일 년 동안 숙성시켜 잉크 기름을 없애 번들거림을 막았다. 그 작업은 우리네 삶의 더께를 한 겹씩 걷어내는 것 같았다. 숙성된 신문지 물기를 빼고 풀을 먹여 하늘과 땅의 질감을 나타내었다. 우둘두툴한 면이 색을 먹고 시간의 흐름까지 담아낸, 그 색은 다양한 형태의 갯벌로 빛을 발했다. 신문에 난 시대적인 메시지나 아름다운 글귀는 그림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다. 가만히 눈 맞추면 ‘난 행복한 사람’ ‘새로운 승리로 향함’ 등의 문장이 걸어 나왔다.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활자들이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며 깨달음을 주었다.
사람 사는 세상도 갯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도 수많은 밀물과 썰물이 지나갔다. 기쁜 일이 넘칠 때도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을 갑작스레 저세상으로 보내고 황량한 바닷가를 헤맨 적도 있었다. 갯벌 풍경은 견디기 힘든 마음을 다독였고, 내 삶을 성장시켰다. 갯벌 위의 물길처럼 가슴에 생명의 무늬를 새기며 이 자리에 서 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아니하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갯벌 풍경’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길이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갯벌은 계절을 품고 다시 생명을 키워낸다.
밀물이 밀려오는 갯벌 위로 붉은 노을이 곱게 번진다. ‘갯벌 풍경’에 젖어 들다 보니, 구수한 커피 향처럼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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