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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을 호수에 내려놓으며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종숙(佳園)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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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했어야 했다. 나를 살폈어야 했다. 지금의 삶에 부족함이 있는가.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직도 꿈꾸는 미래가 있는가. 넉넉한 경제력은? 계속 건강하리란 보장은?
BTS 지민이를 보며 아침을 열고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가 엉덩이를 요리조리 씰룩대면 종종종 따라가며 안아보고 싶어 안달하는 내 어린증(症)을 떠올렸어야 했다. 아직도 열세 살 별명을 떨쳐내지 못한, 그런 나를 유혹하기에 너무 충분하도록 꾸며놓은 모델하우스를 구경 간 날, 앞뒤 생각 없이 계약을 하고 말았다. 1년 반을 거슬러야 하는 겨울이었다. 충동구매를 도운 건 호수였다.
“호수? 글쎄, 네가 일 년에 몇 번이나 호수에 갈 것 같니? 두어 번?” 
매사에 내 편인 오빠에게 나의 어이없는 실수를 털어놓았을 때 조심스럽게 건네어 온 대답이었다. 더 바랄 것 없이 만족한 삶터를 버리고 4억이란 거액을 얹어 호수 값을 치러야 했다. 나보다 훨씬 어른이 되어 버린 두 아들에게는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강남구민을 포기하고 경기도민이 되어 이사를 하였다.
3년 전에 하늘나라로 국적을 바꾼 남편이 생각났다. 평생 네 차례 이사했지만 그저 딸려가는 강아지처럼 힘들지도 슬프지도 않았던 지난날들과 달리 이번 이사는 사막에 버려진 외톨이 같은 심정이 되어 두려웠다.
‘어쩌지? 어떡하지.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적당히 부려놓고 간 이삿짐들을 건드리지도 말고 계약기간 2년만 지나면 다시 옛집으로 돌아가리란 마음이 나의 허영과 허세를 벌하는 동시에 두려움을 덜어주기는 하였다. 그러나 새로움은 낯설지만 낡은 것에 길들여졌던 눈에 보이는 깨끗한 시설과 최신식 환경은 ‘좋기는 하다’는 흥분을 불러왔고 뒤따라오는 얄팍한 변덕과 한데 섞이어 민망해졌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망할 놈의 호수 때문에 신세한탄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지평선 밑으로 사라질 몸일지라도 사뿐히 내려놓아 아프지 않게 도와야 하지 않겠나.
오늘 8월 15일, 나라의 광명에 발맞춰 나도 새로운 빛을 바라보며 마지막 삶의 시작을 위해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몇 날 동안 안개꽃 구름 모자를 쓰고 있던 앞산 봉우리가 오늘은 진초록 머릿결을 자랑하며 내게 어서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추억 속의 호수로 날아간다. 30대 중반에 다녀온 스위스 루체른 호수, 바다처럼 넓으나 한적한 시골마을이어서 우리네 고향처럼 아늑했던 곳이다. 새벽 산책길에 내려가 보니 백조 두 마리가 놀고 있었다. 사람을 피하려는 기색은커녕 가까이 다가와 친근감을 나타내던 녀석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파란 물의 잔잔한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루체른이 다가온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발길을 재촉한다. 백운호수라는 안내판을 지나 산책길 입구로 들어섰다. 자전거와 전동기기의 출입을 막는 표지판이 있어 마음이 놓인다. 백조는 아니어도 이름 모를 오리 가족이 편대를 이루어 부모를 뒤따르는 모양이 정겨워 카메라를 들이댔다. 한국전쟁 직후 평촌 근방의 농업용수 저수지로 시작된 것이 주변의 바라산과 청계산 등에서 흘러드는 학현천 바라천 등 네 곳의 물들이 모여 큰 호수가 이루어졌단다. 호수 둘레에 온통 데크길을 조성해 놓아 우선 보기에 깔끔하고 아름답다. 둘레가 3.5킬로미터라니 한 시간 걷기 운동에도 모자람이 없다. 둘레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마음은 차분히 하나의 결심으로 모아졌다.
“괜찮다. 나의 마지막 삶을 이곳에 내려놓자.”
40년 전, 일상과는 다른 초조와 설렘으로 가득했던 출장길, 스위스의 작은 학교가 목표지였던 까닭으로 하루를 머물던 루체른의 호수는 내게 처음으로 ‘타향에서의 평온’을 안겨주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호수를 닮고 싶었다. 호수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말없음은 공허가 아니라, 모든 소리를 더 깊이 담아두는 능력이다. 바람이 지나가도 파문만 남고 노을이 내려앉아도 색을 머금어 오래도록 간직한다. 나는 그 고요함이 주는 위안을 갈망해 온 것은 아닐까.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다시 마주한 호수의 물결은 그 기억과 닮아있다. 파아란 물, 비슷한 숨결, 환희로운 풍경. 다만 이제는 내가 더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백운호수의 둘레길은 계절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봄이면 잔잔한 새싹의 숨소리가 물결과 섞이고, 여름이면 노을이 황금빛으로 물 위에 누우리라. 가을이면 휘날리는 낙엽들이 서늘한 향기로 스쳐 지나고 겨울이면 더 낮은 목소리로 하얀 세상을 노래하지 않을까. 나는,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내 삶의 빈자리들에 한 겹씩 색을 칠하겠지. 어느 날엔 드문드문 놓인 저 데크 벤치에 기대어 앉아 스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소로 받겠지. 젊은 부부의 밝은 속삭임이나 혼자 걷는 어떤 이의 묵직한 발걸음에서 나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겠지.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던 날들,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들, 그리고 연습처럼 반복했던 용서의 순간들, 호수는 모두를 받아들이면서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 무심함이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 호숫가에 내려놓고 싶은 것은 과거의 후회만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마했던 연기와 남의 눈에 맞추어 숨겨둔 진심들, 그리고 더 이상 채우지 않아도 될 허영심까지도 이곳에 두고 가자. 황혼은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색을 가장 진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내 모든 무게를 내려놓자.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남은 날들을 어떤 색으로 칠할지 스스로 정하는 아름다운 권리다. 호수의 물결이 살랑살랑 데크를 어루만지는 것을 내려다보니 조금은 간지러워 어깨를 웅크리며 오늘의 나와 마주한다. 그 만남은 서늘한 듯 따스하다. 나 자신에게 치유의 말을 건넨다.
“괜찮아, 넌 이제부터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도 돼.”
문득 글을 쓴다. 누구에겐가 모를 작은 고백을 하고 싶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끄덕이며 안도할 수 있도록. 그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내려놓음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을 화려하게 설계하려는 욕심보다 고요하고 진실한 장면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값지다. 저녁이 깊어지면 호수는 또 다른 얼굴을 보일 것이다. 물빛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고 풍경도 바뀔 것이다. 반짝이는 불빛들이 밤물결에 어리어 움직이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매일 같은 풍경이겠지만 매번 다른 의미로 다가올 그 모습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
오늘 나는 지난 1년의 충동과 후회를 한 장의 종이처럼 접어 호숫가에 놓아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새 종이 위에 새로운 문장을 적는다. ‘남은 날들을 원하는 색으로 채우겠다’는 다짐을. 황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삶의 서늘한 진실을 온기로 바꾸는 작은 의식이다. 내 삶의 황혼이 부드럽게 내려앉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 날, 그 황혼이 내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색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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