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그의 편지 앞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종옥(서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조회수8

좋아요0

오늘은 상현달이 조각배처럼 남쪽 하늘에 떠 있다. 상현달을 바라보는 시인은 어떤 시상이 떠오를까. 화가가 바라보는 상현달은 어떤 그림으로 묘사되어 나올까.
오래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 년의 신화>를 관람했다. 전시실 벽에는 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굵은 선으로 그려진 그 소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강인한 민족의 혼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내 마음을 붙잡은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 앞에 서 있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몇 장의 편지, 누렇게 빛이 바랜 종이 위에 눌러쓴 글씨는 누군가의 숨결처럼 따뜻하게 살아 있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히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는 동안, 가슴이 뭉클하고 눈가에는 눈물이 젖어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의 하루를 생각해 보았다. 가난한 화가가 차가운 방에 작은 등불 아래 앉아 있었을 모습, 그림보다 먼저 아내를 떠올렸을 그의 밤, 가난이 그의 삶을 짓누르고 있어도 그리움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던 그 시간,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에게 보내는 글들은 화려하거나 길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 깊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많지는 않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이 그 문장 사이다마다 고여 있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있지 못해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도, 그저 그 사람을 향해 마음을 보내는 일,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가장 순수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날 전시실에서 눈가가 젖어 있었던 것은 깊은 그의 사랑 때문이었는지, 그의 삶이 슬퍼서였는지, 아마도 그건 내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세월이 가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누군가를 향해 쓴 한 줄의 글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오래 비출 수 있는지 때때로 생각했다. 나는 오래도록 이중섭의 편지를 잊지 못했다.
나는 주소는 있으나 받는 이가 없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동교리의 지아비 묘지로 그리움의 편지를 썼었다. 햇살이 따스한 날에도, 바람이 불어오고 비 오는 날에도, 눈 내리는 겨울밤에도 나는 몇 번이고 그리움이 밀려올 때마다 한 사람을 향해 편지를 썼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그곳은 아프지 않은 곳이냐고, 눈이 오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이곳은 지금 계절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다시 오고 싶지 않느냐고….
그 편지는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리움의 편지였기에 그의 영혼은 나보다 먼저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쓰던 시간만큼은 그가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편지는 누군가에게 도달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듯한 마음을 붙잡기 위해 쓰는 것이리라. 멀리 떨어져 있던 시절에도 아내를 향해 편지를 쓰던 이중섭처럼, 나는 답장도, 받을 수 없는 지아비에게 조용히 편지를 썼었다.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물러 슬픔을 이겨내면서 살게 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한 장의 편지를 쓰는 동안에 다시 삶에 용기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움의 세월을 글로 쓰고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기도 하면서, 이중섭이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그리워하면서 쓴 따뜻한 글만큼이나, 진한 그리움의 마음을 써내려갔다.
아까시나무 꽃향기 진동하는 아름다운 5월에 지아비에게 그리움을 전하던 글들을 모아서 『나는 또 하나의 별이 되고 싶다』라는 초가집 같은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움의 마음은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이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게 만드는 삶의 불씨 같은 것이라고 적었다. 형태가 바뀌어 삶 속에 머물러 어떤 날에는 눈물이 되고, 어떤 날에는 기도가 되며, 또 어떤 날에는 이렇게 한 줄의 글이 기록으로 남겨져 그리운 마음의 책이 되었다.
화가는 그리운 마음을 그림으로 달래고 시인의 마음은 시어로 묘사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쓰는 글은 어쩌면, 누군가의 가슴속에 아직 남아 있는 또 다른 그리움을 향한 외로운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랑의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험난한 세상에 용기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어느 철학자는 그리움은 부재가 남긴 사랑의 흔적이라 하였는데, 사랑은 인내의 이름으로 피어나 겨우내 품은 생명으로 산허리를 붉게 적시는 봄날 두견화의 눈물이 아닌가 한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