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0월 6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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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는 국토 최북단이자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다. 민통선과 DMZ 지역을 품은 접경지역으로 평화·안보, 관광과 더불어 생태 관광지로도 주목받는 곳이다.
60년 전 군인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그곳을 다녀온 추억을 회상하며 양구 나들이에 나섰다. 그때는 서울에서 그곳까지 가는데 비포장 국도 길을 8시간이나 걸려서 도달할 수 있는 먼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도로와 여러 터널을 관통하는 잘 조성된 국도를 이용하면 승용차로 2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양구도 변천하여 여러 명소가 소개되고 있지만 이번 여행길은 동쪽의 펀치볼 지역과 서쪽의 두타연 지역을 방문하기로 했다.
양구읍에서 동북쪽 해안면으로 북상하면 가칠봉을 비롯한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둘러싸며 형성한 분지 형태의 펀치볼(Punch Bowl)이 있다. 이 이름은 6·25전쟁 당시 이 지역의 치열한 전쟁을 취재하던 외국인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노을 진 분지의 지형이 마치 화채(Punch) 그릇(Bowl) 같다고 표현한 기사를 송고한 후 그 이름이 붙여졌다. 펀치볼은 지금도 양구군 해안면 6개 마을 일대를 부르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에 조성된 DMZ 둘레길은 국토 정중앙 최북단이라는 상징성과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테마를 중심으로 산림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숲길로 평화의 길을 비롯한 4개 코스가 있다. 둘레길 안내소에서 신고하고 안내원의 동행하에 평화의 길에 포함된 ‘벙커 길’이라 불리는 10km 남짓한 거리를 4시간가량 걸었다. 길 중간중간에 있는 군사분계선의 상징물인 벙커, 교통호, 월북 방지판, 철책과 지뢰지대 표시판을 접했다. 전쟁의 흔적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둘레길이었다.
이튿날은 해발 1,049m의 가칠봉에 있는 을지전망대를 탐방하는 날이다. 이곳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불과 1km 남쪽에 있는 최전방 지점이다. 전망대 출입 신고소인 양구 통일관에 들러 출입신고서 작성과 신분 확인을 마친 후 인솔자와 군인들 동행하에 탐방할 수 있었다. 탐방객이 자가 승용차로 을지전망대에 오르면 안보교육관부터 들르게 된다. 6·25전쟁 당시 치열했던 펀치볼 전투, 도솔산 전투, 가칠봉 전투 등 양구 지역의 주요 전투와 북측의 주요 고지에 대한 영상을 보고 나면 드리워진 암막 커튼이 열리면서 창 너머로 북쪽 땅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동북쪽에 있는 금강산 능선도 볼 수 있었다. 을지전망대가 위치하는 가칠봉을 차지하기 위해 무수한 군인이 희생되었다는 설명에 탐방객 모두가 숙연해졌다. 실내에 비치된 망원경을 통해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1km 정도 거리에 인공기가 게양된 북한군 초소를 목격할 수 있었다.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실감나게 했다. 언제 터질지도 모를 총성을 숨긴 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진지는 적막 속에 잠겨 있고, 오직 미풍 속에 새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인데 초여름 뜨거운 햇볕은 권태를 느끼도록 휴전선의 공기를 달구고 있었다.
을지전망대에 서면 양구 펀치볼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0만 평으로 조성해 놓은 사과 과수원과 이름난 ‘양구 시래기’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땅을 감싸안은 듯 동그랗게 두른 산 능선들과 하얀 구름 아래 펼쳐진 ‘만대 벌판’과 ‘오류 밭길’엔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펀치볼이 있는 해안면을 벗어나 1시간가량 서쪽의 방산면에 이르면 금강산 가는 길목에 천혜의 비경을 품은 두타연이 있다. 두타연 탐방은 출입 신고소인 ‘두타연 금강산 가는 길 안내소’에서 절차가 진행된다. 하루 전 예약이 기본이고 출입 신고서와 서약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 추적 목걸이까지 착용해야 출입할 수 있다. 탐방객은 ‘금강산 안내소’에서 탐방로가 있는 ‘두타연 관광안내소’까지 차량으로 하차 없이 이동해야 한다. 두타연 관광안내소에서 시작해 위령비를 지나 조각공원을 거쳐서 두타연에 이르는 동선에는 전쟁의 서사가 깃들어 있다.
양구는 6·25전쟁 당시 능선마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격전이 펼쳐졌던 지역이다. 이 지역 능선마다 고지전이 이어졌고 능선 곳곳이 피로 물든 듯 처참한 풍경으로 변해서 외신 종군기자가 이를 보고 ‘Bloody Ridge(피의 능선)’라고 표현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 능선에서 북쪽으로 11km에 걸쳐 줄지어 이어진 능선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데 얼마나 치열했기에 ‘단장(斷腸)의 능선’이란 이름이 붙여졌을까!
조각공원을 지나면 생태탐방로가 이어진다. 좁은 오솔길 양옆으로 지뢰지대를 표시하는 푯말이 줄을 잇는다. 홍수 등으로 유실 지뢰가 있을 수 있어 정해진 탐방로만 통행해야 한다. 전망대에 서면 금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바위 사이를 헤집고 떨어지며 형성하는 폭포와 그 아래 깊고 푸른 에메랄드 색깔의 소(沼), 두타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타연(頭陀淵)은 ‘삶의 걱정을 떨치고 욕심을 버린다’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했다. 부근에 두타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두타연을 사이에 둔 징검다리와 출렁다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원시 비경의 계곡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숲길 사이를 걷다 보면 녹슬고 총구멍 뚫린 철모 전시품이 나무에 걸려 있어 비감을 느끼게 했다. 민통선 안에 둥지를 튼 두타연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런 인위적 기교가 더해지지 않은 태초의 자연, 그것이 두타연이 지닌 최대의 매력이지 싶다.
숨겨졌던 베일을 벗고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한 양구 땅을 방문해 전쟁의 흔적이 남은 접전 지역의 둘레길을 걸어보고 대치된 휴전선의 긴장도 느꼈다.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원시의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며 산림 향기 풍기는 계절 속에 잠기는 시간이었다.
한국 제일의 오지였던 양구 땅을 처음 밟은 후 6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산수(傘壽) 노객의 심사에 어리는 어려웠던 젊은 날의 추억이 이젠 그리움 되어 밀려온다.
내 나라를 보이지 않는 줄로 갈라놓은 현실 앞에서, 사람의 접근을 막은 닫혔던 세월이 이제는 오히려 축복의 비경을 안겨주고 있다.
초여름날, 양구 땅 DMZ길 울창한 산림은 말이 없는데 적막한 능선과 숲길 사이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국토를 지키는 그을린 얼굴의 병사들이 인사를 할 땐 두 손을 모으고 고개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