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9월 6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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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철신이와 몇 명의 아이들은 이미 교실에 와 있었다. 헌수는 책가방을 책상 위에 놓고는 철신이 옆으로 가 앉았다. 셜록 홈즈가 나 오는 추리소설이라면 빼놓지 않고 읽었다는 철신이가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대하면서.
“참 편리한 세상이야.”
철신이가 아이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거든.”
철신이가 우쭐대며 말했다. 아이들도 한마디씩 했다.
“니들 옛날 전화기 본 적 있냐? 번호 구멍을 계속 돌려야 해.” “맞아. 우리 할아버지 집에 가면 있어. 하나 가지고 온 가족이 썼대.” “우리 고모님 집에는 전화기가 없어서 공중전화로 했대.”
“옛날에는 사진 찍으면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고 며칠 지나야 볼 수 있었대.”
철신이가 말했다.
“야, 편리한 게 나오면 불편한 건 싹 없어지는데…”하고 철신이가 계 속 말하려는데, 김정연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아이들은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아침 인사를 마치고 물으셨다.
“여러분, 방금 무슨 얘기가 그렇게 진지했어요? ”
“옛날 이야기요. 전화기랑 사진 찾으러 사진관 가는 거요.”
헌수가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은 다 자기 전화기가 있고 사진도 찍어 바로 보고요.” “네! ”
아이들은 다음에도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네!”라고 대답 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분, 또 편리한 게 뭐가 있을까요? 인공지능이라는 로봇도 발명 되었잖아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이들은 앞다투어 말했다. “식당에서는 사람 대신 닭고기를 튀겨요.”
“음악회 지휘도 해요. 얼마 전에 티비에서 봤어요.”
“아침잠도 깨워줘요, 할아버지, 할머니 심부름도 해준대요.”
“택배회사에서는 포장도 척척 한대요.”
선생님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그만. 그래요. 셀 수도 없이 이 세상은 그렇게 편리해졌어요. 그리고 더 편리해져 가고 있고요.”
그날 수업을 마치기 전에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에 놀랐다.
“내일은 특별한 시험이 있어요. 선생님도 학생이 되어 같이 봐요. 아 주 짧은 작문 시험인데요. 제목은 내일 알려줄게요.”
“와아! 선생님이 우리랑 같이 시험을 보신다구요? ”
“네! 그래서 시험 중에는 선생님이 아니라 4학년 1반 친구 김정연이 에요. 알았죠? ”
아이들은 순간 재미있겠다고 책상을 치며 웃어댔다. “또 두 가지가 특별해요. 점수가 없고요. 연필로 안 써요.”
“그럼 뭘로 써요? 볼펜이요? 샤프요? ”
“네, 샤프펜슬로만 씁니다. 여러분, 샤프 다 갖고 있죠? ”
선생님은 몇 번이나 아이들에게 다짐하셨다. 그러자 아이들은 왜 샤 프로만 쓰라는지 모르겠다면서 투덜대며 술렁였다. 조용히 아이들의 불평을 듣고 있던 선생님은 드디어 말씀하셨다.
“혹시 지금 샤프가 없어서 사야 하는 사람 있어요? ”
“아뇨.”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다음날, 오후 수업시간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쪽지를 나누어 주셨 다.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특별한 시험지를 받아든 아이들은 사 뭇 긴장한 모습으로 손에는 샤프를 쥐고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제 목: 편리와 불편>이라고 쓰셨다.
“편리와 불편. 서로 반대말이죠? 이제 자기 생각을 두어 줄로만 짧게 써 보는 거예요. 먼저 번호와 이름을 씁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김정연이 되더니, 결석한 추여정 자리에 가 앉았다. 아이들은 일제히 백지에다 자신의 번호와 이름을 썼다. 그리고 무엇을 쓸까 하고 모두 생각에 잠기려 할 그때였다. 김정연이 샤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하도 부산스러워 아이들은 정연이 만 바라보게 되었다. 정연은 계속 허둥지둥 샤프를 흔들면서 한숨을 쉬 었다.
“왜? ”
옆의 윤주가 표정으로만 물었다.
“심이 없어. 하나만 줄래? ”
정연이 말했다.
윤주는 얼른 자기 샤프심 통에서 두 개를 뽑아주었다. 정연은 한숨을 돌리는 듯 보였다. 심을 넣고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심은 나오지 않았다. 정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샤프 뚜껑을 다시 열고 심을 확인하고 다시 샤프를 돌렸다. 또 심은 안 나왔다. 윤주는 자기 샤프심의 굵기가 정연의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아채고 물었다.
“선생님, 아, 아니 김정연, 그 샤프는 몇이야? ”
“0.9미리.”
정연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내 껀 0.7이거든.”
윤주가 말했다.
정연은 이제 헌수에게 다가갔다.
“넌 몇이니? ”
“0.5.”
헌수는 샤프에 적힌 숫자를 보며 대답했다. 정연의 눈길은 벌써 헌수 옆의 이주에게 가 있었다.
“난 0.7.”
이주가 재빨리 알려주었다.
“이건 0.38인데.”
지애가 이어서 속삭였다.
정연은 나머지 열댓 명의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누구 0.9 없니? ”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정연은 제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얘들아, 미안해. 난 시험 못 쳐. 맞는 심이 없거든.”
아이들은 생각을 가다듬어 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정연의 방해를 받았다. 김정연은 학생에서 다시 선생님으로 돌아갔다.
“여러분, 방금 본 샤프 사건을 놓고, 편리와 불편에 대한 생각을 짧게 써 보기로 합니다.”
다음날, 선생님은 밝은 표정으로 아이들과 인사한 다음 전날 본 시험지를 아이들에게 다시 나눠 주셨다.
“이제 한 사람씩 발표하겠어요. 먼저, 신헌수부터.”
그러자 헌수가 읽었다.
“샤프는 편리. 그런데 오늘은 샤프가 불편하다.”
“이윤주.”
윤주가 읽었다.
“샤프가 불편한 건 처음이다. 샤프심이 여러 가지라는 걸 알았다. 빌 려줄 수 없어 불편했다.”
“오도희.”
도희는 읽었다.
“오늘 김정연은 연필보다 편리한 샤프를 연필보다 불편하게 만들었 다. 와, 대박이다.”
“박철신.”
철신이는 읽었다.
“김정연은 샤프심 0.9를 가지고 연극을 했다. 편리와 불편을 다 가진 샤프, 너, 멋지다.”
“민예빈.”
예빈이는 읽었다.
“나는 편리와 불편을 다 좋아한다. 세상에는 편리도 있고 불편도 있다.” “다음은 이지애.”
지애는 읽었다.
“편리와 불편은 늘 붙어다닌다. 좋다가도 짜증 날 때가 있다.” “김이주.”
이주는 읽었다.
“편리와 불편은 특별한 시험을 치르게 한다.” “그게무슨말이야?”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내내 웃지 않던 추여정이 손을 들었다.
“네, 말해 봐요. 추여정은 어제 결석했죠? ”
선생님이 확인하셨다. 결석대장 추여정은 늘 그렇듯이 사뭇 당당하 게 나왔다.
“저는요, 편리는 미래. 불편은 현재. 왜냐면 지금은 불편해도 편리하 려고 학교에 와요.”
교실은 여정이의 말을 듣고는 잠깐 움찔하며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이어서 나머지 아이들도 각자 자기 것을 읽었다. 교실은 내내 웃음 소리 와 침묵, 놀라는 감탄 소리로 가득 찼다. 이윽고 선생님이 입을 떼셨다.
“듣다 보니 여러분은 모두 멋진 시인이네요. 탐정도 있고요.” “네! ”
아이들은 철신이를 쳐다보며 신이 나서 선생님 말씀에 찬성했다. 갑 자기 지애가 당차게 물었다.
“선생님, 아니, 참, 김정연은 어떤 생각을 했어? ”
선생님과 아이들은 지애의 반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잠깐 머뭇거리시다가, 곧 앳된 소녀 목소리를 내셨다.
“아무리 편리한 것이라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어. 김정연이 이모저모로 준비를 잘했더라면 시험을 잘 보았을 거야.”
순간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아이들은 전날의 그 갈팡질팡 하던 학생 김정연을 떠올리며 선생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요? 여러분. 열 달 후쯤, 우리 5학년 올라가기 전에 특별 시험 한 번 더 쳐볼까요? ”
“네! ”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갈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들을 한껏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