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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숨결을 위하여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득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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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과 옥수수밭이 이어지는 들녘 사이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며 반갑게 맞아 주는 연초였다. 5월 중순 손녀 둘을 데리고 옥천으로 주말 나들이를 나갔다. 논에는 벌써 어린 벼가 파릇파릇 숨결을 내밀며 작은 희망을 속삭인다.
옥천은 금강이 아이처럼 뛰놀 듯 돌고 도는 푸른 들판의 고장이다. 봄이면 강가에 연둣빛이 번지고 햇살 머금은 물결은 은빛 비늘처럼 반짝인다. 그 가운데 대청호는 옥천의 자랑이다. 호수를 끼고 농부들의 손길이 닿은 논밭은 늘 풍요롭고 그 속에서 삶은 든든히 이어진다. 아침이면 호수 위로 안개가 피어올라 세상을 고요히 감싸고, 저녁이면 붉은 노을이 호수를 물들이며 하루를 따뜻하게 덮는다. 깨끗한 자연과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도 맑고 따뜻하다.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정이 있어 옥천은 단순히 살기 좋은 곳을 넘어 마음이 쉬어가는 고향이 된다.
연초는 담배를 만드는 식물이다. 차를 타고 가다 연초밭이 눈에 들어오면 남들은 무심히 지나치겠지만 오래된 인연이라 반갑기 그지없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다섯 살에 담배회사에 입사해 36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묘판을 짜고, 종자를 뿌리고, 이식과 수확, 건조까지 해 왔으니, 아이를 키운 부모처럼 정이 든 것이다. 고물장수 눈에는 고물만 보인다는 말처럼 내 눈에는 언제나 들판의 연초가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 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 본다.
시골에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입사한 담배회사에서 산전수전 겪어 보고 어렵다는 정년퇴직까지 했으니, 내 인생은 누가 뭐라 해도 담배 냄새 속에 절어 있다. 사람들은 담배가 해롭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 말을 좋든 싫든 수없이 들어 왔다. 그러나 내게 담배는 젊은 날 의식주를 해결해 준 고마운 작물이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고 따뜻한 햇볕과 사랑을 배웠으며 함께하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 남들처럼 연초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첫사랑처럼 세월이 흘러도 소중하고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친구들도 대부분 담배회사에서 만난 인연들이다.
1978년 입사해 2014년 퇴직하기까지 나는 늘 잎담배 생산 현장에 있었다. 그러기에 그때 함께 땀 흘리던 사람들이 지금도 보고 싶고 건강하게 잘 살아 있는지 늘 안부가 궁금하다. 자그마치 서른여섯 번의 농사를 지켜본 셈이다. 어느 해는 가뭄으로, 어느 해는 병충해로, 한 해도 그냥 수월하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농민들의 피땀 어린 수고가 곧 내 삶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 밑거름을 먹고 줄기와 잎을 키웠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일이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담배씨는 배추씨보다 작지만 심으면 2m까지 자라는 큰 초본성 식물이 되고 니코틴을 함유한다. 잎은 최대 75cm까지 자라며 여름철에는 복숭앗빛 분홍 꽃을 피운다. 연초 농사는 벼농사 이상으로 손이 많이 갈 뿐만 아니라 대부분 수작업을 해야 한다.
1970년대 담배산업은 우리나라 수출 효자 상품이었다. 섬유·광물과 함께 국가 재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1978년에는 연초 수출량이 4만 9천 톤에 달해 대표적 외화 획득 품목이었다. 반도체나 자동차가 많지 않던 시절 연초 농사는 농민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원이었으며 국가에는 전략 사업이 되었다. 전매청을 통해 국가가 생산을 주도했고, 농민들은 계약 재배한 연초를 가을에 전량 수매 받았다. 정부는 자재와 보조금을 지원하며 연초 농사를 장려했고, 농민들은 경쟁적으로 재배에 뛰어들었다. 농촌 인구도 많았고 농산물 가격도 불안정했던 시절 영세한 농민들에게 연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덩달아 우리 직업도 인기가 있었으며 연초 주산지에서 담배회사 직원은 일등 신랑감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담배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어두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담배가 내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작물이었음을 기억하면서도 다음 세대에게는 해롭지 않은 길을 열어주고 싶다. 그것이 담배 인생을 살아온 내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전 직장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을지언정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금연하고 건강하게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다. 청소년들을 붙잡고 진즉 말을 못 해준 게 미안하다.
연초밭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잎을 바라보던 그 시절의 기억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는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맑은 숨결로 미래를 열어가기를. 담배가 내 삶을 지탱해 준 작물이었음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의 삶에는 다시는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기를. 언젠가 담배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만 남고 세상은 더 맑고 건강한 숨결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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