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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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신호음이 멈추자 돌연 수화기에서 들려온 소리.
“내가 췌장암 말기라 카네.”
분명 송 형의 목소리다. 고유의 높은 언성으로 당혹스러우면서도 크게 절박함은 없는 투다. 뭐라고? 나의 뇌는 정리를 요했다. 그가 오래전부터 허리디스크에 문제가 있어서 근래까지 수술과 치료로 고생한 일은 알고 있었지만, 난데없이 췌장암, 그것도 말기라고.
침묵, 내가 겨우 수술 얘길 꺼냈다. 신촌의 대학병원에서 다음 달 중순이라는 답이었다. 이름난 병원이긴 한데, 수술이 그보다 더 빨라야 하는 건 아닌지 내 마음이 더 급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수술로 괜찮아질 것인가. 워낙 악명 높은 암이라서. 끝내 합리적 의문이 들었다. 어찌 그런 병이 그토록 뒤늦게 발견되었단 말인가. 그는 경제력도 넉넉한데. 이제 와서 그런 것을 캐묻기도 그랬다. 돌연 그에 관한 소소한 일들이 떠올랐고 그것은 곧 나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수술날 오후, 나는 병실을 찾았다. 그런데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할 환자가 퇴원을 서두르고 있는 게 아닌가. 놀라움의 연속이다. 환자의 말인즉 “집도의가 개복을 해보니 암의 진행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손쓸 수가 없다”란다. 일단 항암치료를 한 후에 보자는 결론이었다. 옆에 그의 딸 송 교수는 냉담한 표정으로 퇴원을 서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항암치료가 시작되고 2개월여가 흘렀다. 항암치료를 마친 다음날 그가 복부에 보호대를 한 채로 우린 동네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했다. 없던 통증이 이제야 좀 나타난다고 했다. 주치의가 모든 기록을 미국에 보내 결과를 기다린다고도 했다. 뭔가 희망이 보이는지.
그러나 현상은 냉정했다. 형은 하릴없이 호스피스 병동에 옮겨져 내던져진 모습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우리 둘은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나누었다. 그것이 마지막 대면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음 띤 그의 영정 앞에 섰다. 국화 한 송이를 올려놓고 바라보지만 나의 마음은 왠지 허전했다. 암울한 장례실 분위기에 유족들 사이로 흐르는 냉랭한 느낌은 나만의 과민반응일까. 한 가장이 한 삶을 마감한 현실을 맞아 으레 하듯 담담하게 돌아서고 말 것인가. 뭔가 아쉬웠다.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눈 한 친구로서 그와의 지난날을 반추해 보고 뭐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와 나는 공기업의 한 부서에서 동료로 만났다. 학연, 지연도 없이 금세 가까워졌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말단 노무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긴 세월 독학으로 엄청 힘들다는 몇 단계 관문을 통과하여 대망의 간부가 된 사례로, 내가 높이 산 만큼 그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는 평소 누가 뭐라 하든 옆구리에 영문타임지를 끼고 다녔고, 회의 중엔 영역에 상관없이 과감하게 소신을 개진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양친이 독립유공자라는 긍지 또한 대단했다. 그는 부모님의 활약상과 함께 어린 시절의 빈곤마저 스스럼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그에 관해 무엇보다 잊지 못할 일은 아내와의 사별이다. 고혈압 돌연사. 그녀가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지 몇 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비탄에 잠겨, “불쌍한 사람, 처녀 때는 친정을 위해 온갖 고생 다 했고. 시집와서는 그놈의 전세살이 면하자고 악전고투하더니, 이제 좀 살 만하니까 그냥 가뿌네”라며 눈물을 뿌렸다. 그는 문상객들 앞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천상병, 「귀천」)’라는 시를 떠나는 아내에게 받쳐 애틋함을 표했다.
그는 그답게 금세 원상을 되찾았다. 교우활동과 취미생활도 이전처럼 이어갔다. 그는 이따금 나를 그의 집에 불러 책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다녀온 낯선 나라 여행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밖에서 차를 나누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뭔가를 털어놓는다. “나 집에 밥해줄 사람 하나 데려다 놓았제”라며 웃는다. 어,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데. 나는 놀랐지만 재력이 되니까 자기 생활의 편의 도모 정도로 생각했다. “아이들과 의논은 했소?” 물으니,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의외였다. 어쩌려고!
당연히 그의 생활에 변화가 일었다. 매주 한두 번 아들, 며느리가 반찬을 해 나르던 일, 수시로 있던 아들 딸 손주들의 왕래 등이 사라졌다. 그 외에 주변과의 교류도 서먹해졌다.
한편 그 자신은 전성기라도 맞은 듯 일상이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그는 영어성경반, 건강디스코반, 가요반 따위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대부분 활달한 여자 회원들의 열렬한 성원이 따랐다. 그는 호탕하고 인심 좋은 ‘오빠’를 구가했다. 놀랄 만큼 늘어난 재산과 아내가 남긴 연금, 그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만끽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신분이요 가치로서 자신이 젊은 시절 고난과 역경을 이긴 성공의 결실쯤으로 여겼다. 재산에 관한한 신성불가침, 주변은 전혀 인식하지 않았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누가 알랴. 집 안엔 가족의 온기란 흔적도 없고 오직 비밀스런 사생활. 사라진 대화는 무엇을 초래하는 신호일까. 그 시점 그 몸속에서 그 끔찍한 변화가 일고 있음은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의 “돈이면 다 된다”라는 신조뿐.
그러나 끝내 그의 삶은 속절없이 소멸되어 갔고, 오직 남은 건 주변의 싸늘한 눈길. 자식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먼저 간 엄마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만 더한 것은 아닐까. 그는 마지막까지도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 딸을 불러 철부지처럼 아픔만을 호소했다.
나는 한 가정의 안타까운 변천사를 목격했다. 참으로 덧없고 덧없어라.
무릇 고행과 인고의 학자 사마천의 외침이 떠오른다.
“사람의 가치는 성공이 아니라 끝에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