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가을호 2026년 9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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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은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입추가 지났지만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사람도 계절도 지쳐 가던 어느 날, 친구가 말없이 휴양림을 예약하고 숲으로 초대했다.
숲속을 거닐며 마음껏 날숨 좀 쉬어 보라며 조건 하나를 덧붙였다. 이번엔 무조건 하루 언니가 될 예정이니 철없는 동생 역할에 빠져 보라며 웃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부근이라고 했지만 휴양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조건 없이 받아주는 자연이라 해도 사람들이 오가며 울려대는 엔진 소리가 반갑지는 않을 터다. 그래도 품 안에 들어오는 우리들을 새소리가 먼저 반겨주었다. 숲치유센터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정작 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조금씩 조용해졌다.
산그늘이라는 뜻의 ‘산음’ 지명이 붙을 만큼 한 줌의 햇빛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다. 잣나무와 전나무에서 스며 나온 피톤치드 향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숙소로 향하고 있는데 청설모 한 마리가 잣나무 곁에서 몸을 굽힌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람 소리에 놀라지도 않는 걸 보니 마치 그들이 쉬고 있는 집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처럼 미안해진다. 청설모의 삶인데 잠시 그들의 시간을 빌려 바라보는 것으로도 한결 느슨해졌다.
올라가는 길 옆에 늘어선 숙소 이름이 재미있다. 고라니, 너구리, 다람쥐, 산까지, 소쩍새…. 우리는 그 이름에서 한참 멀어진 황토방에 짐을 풀었다. 나를 생각해서 친구가 선택한 방이란다. 그녀가 짐을 풀고 배낭을 열자 과일이며 반찬이며 하나씩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데리고 방으로 끌다시피 데려갔다. 이부자리를 펴더니 무조건 누우란다. 그리고 열린 창문 틈으로 보이는 숲을 가리켰다.
창문 앞으로 층층나무 가지가 바싹 다가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가 흔들렸다. 그 사이로 햇살이 숨바꼭질하듯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계곡 물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자연이 마련한 숲속 음악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스르르 눈이 감겨 왔다. 주방에서 들리는 친구의 도마질 소리가 자장가처럼 다독여준다. 모처럼 느껴보는 노곤함,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낮잠은 거의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일 속에 묻혀 있던 내가 깊은 단잠에서 깨어나던 순간, 친구가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동안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녀는 좀 더 자라며 틀어져 있던 베개를 내 목덜미 밑으로 다시 밀어 넣어주었다. 엄마를 닮은 그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잇달아 떠나보냈다. 평생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신 어머니를 보내드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사십 년 마음을 나누던 친구도 긴 투병 끝에 먼길을 떠났다. 함께 나누던 계절들이 거리 어디에서나 되살아나 혼잣말로 그리움을 삼키곤 했다.
“강한 척하며 살 일이 아니야.”
엄마 밥상처럼 익숙한 반찬들로 준비한 상차림 앞에서 언니처럼 건네는 묵직한 친구의 말, 무언가 목울대가 차올랐지만 오랜만에 밥 한 공기를 비우고 산책길에 나섰다.
친구에게 고백성사를 하듯이 나를 털어냈다. 어느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숲속 길로 들어섰을 때, 리기다소나무 몸통에 붙어 자라는 작은 솔잎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 가지 하나 없이도 몸을 의지한 채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자유롭게 흔들리지 못해도 그 자리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힘, 문득 살아낸다는 것도 그런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나무를 시작으로 이름을 단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혼자 서 있어도 한 그루의 나무이고, 함께 서면 숲이 되는 나무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각자 다른 존재로 태어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며 어우러진 인연들을 생각한다. 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쯤 찾고 싶은 숲, 어떤 숲은 나무보다 먼저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에 돌탑이 여러 개 모여 있었다. 이끌리듯 앞에 서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간절함마저 특권처럼 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너를 위해서만 돌을 얹고 싶다.”
먼 길을 달려 나를 휴양림에 데려온 친구는 그렇게 소원을 올려놓았다.
벌레 소리만이 또렷해진 밤, 우리는 ‘일 년 뒤 나에게’ 편지를 썼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문장을 썼는지 희미해져도 그날 우리를 감쌌던 공기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다음에 그곳을 찾게 된다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은 아닐 것이다. 그 숲에는 여전히 한 사람이 서 있을 테고 그 사람 덕분에 나 역시 또 하나의 숲으로 기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