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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파편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시흔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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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천 집에서 재택근무 중이다. 현석의 회사는 서울 충무로 골목에 있다. 직원 네 명의 단출한 광고 대행사이니 사실상 자영업자나 다름없다. 그는 아직 스스로를 해고하지 못했다. 어느덧 육십 중반,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일도 푹 줄었다. 사무실에서 빈둥거릴 바에야, 핑계 삼아 재택근무하는 게 속편한 일이다. 어지럽혀진 책상 귀퉁이에서 부-윽 부-윽,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작게 틀어놓은 바렌보임이 연주하는 베토벤 월광소나타 1악장에서 퍼지는 은은한 달빛을 뚫고 연달아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 소리다. 조금 전에도 그러다가 소리가 끊어졌었다. 이번에는 휴대폰을 보니 발신자는 ㅎ노인요양원 김인호 사무국장, 이 전화는 잽싸게 받아야 한다. 요양원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는다. 신경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곤두선다. 요양원에서 오는 전화는 아버지가 정상적이지 않을 때만 오기 때문이다. 5월 19일 화요일 오전, 도대체 무슨 일일까? 휴대폰 진동이 점점 더 커지는 듯했다. 소리에 신경이 쏠리고 심장 박동이 두근두근 빨라졌다.

 

“안녕하세요. 이현석입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사무국장은 준비했을 말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십 분 전에도 전화를 드렸는데 연결되지 않아서 다시 걸었습니다. 이장혁 어르신이 악몽을 꾸셨는지 소리 지르고 그런 신 적은 있었는데, 요즘은 아예 잠을 잘 주무시지 않습니다. 크게 소리 지르시고 어딜 가야 한다고 그래서 같은 방 어르신들이나 근무자분들이 힘들다고 합니다.”
사무국장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벌써 나흘째인데요, 진정이 안 되시면 저희로서는 모시기가 곤란합니다. 아침에 찾아뵈었는데 어르신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아드님을 빨리 만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혹시 바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사무국장의 전화는 이 일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요양원의 야간 평화를 위해서 강제 퇴원 조치도 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이 코로나 시국에 당장 아버지를 옮겨 드릴 요양원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요즘 요양원 면회가 중지되었다는데 면회가 되나요?”
현석의 질문은 코로나를 핑계로 못 간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어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고 오셔도 됩니다. 예외적인 일이니 별실에서 따로 면회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좀 그렇고, 내일 오전에 일찍 내려가겠습니다. 제 부친 때문에 사무국장님에게 곤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 갈 테니 제발 잠 좀 푹 주무시라고 전해주시고요.”

 

현석은 요양원에서 잘 지내지 못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ㅎ요양원은 무려 다섯 달을 대기했다가 힘들게 입소해서 사 년째 계신 곳이다. 그 요양원은 아버지의 고향인 천안 유량리 산자락, 어머니의 묘소로 올라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성묘하러 오가며 들르기에도 더없이 편한 위치였다. 실내 수영장을 리모델링한 건물은 외관도 뛰어났다. 예전에 수영장이었을 넓은 다목적 홀은 둥근 천장이 매우 높았다. 그 천장과 벽 유리창에서 밝은 빛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거쳐 여러 색깔이 뿌려지는 것처럼 화사했다. 그것은 중세 고딕 대성당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스스로 빛나는 벽’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곳 어르신들 표정은 밝아 보였다. 실내 공간도 넉넉해서 요양원에서 으레 나는 퀴퀴한 지린내도 없었다. 허락받고 살펴보러 들어간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아버지를 빨리 이곳으로 옮겨 드리자고 했다. 그러나 대기자가 많아 언제 입소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렵게 입소한 ㅎ요양원에서 계속 계시려면 처신을 잘해야 하시는 것 아닌가? 현석은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싶어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는 올해 아흔두 살, 가벼운 중풍으로 시작한 병시중은 16년째 이어지고 있다. 몸도 성치 않은 늙은 아버지는 편협한 아집만 늘어 갔다. 그동안 수차례 입원에, 아버지의 일방적인 요구로 요양원을 자주 옮겨 다녔다. 코로나 직전인 작년 말에는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으로 응급실로 실려간 일도 있었다. 현석은 장남인 탓에 아버지를 도맡아 돌보고 있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현석도 지쳐 간다.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뒤틀린 원망도 든다.

 

아버지 재산의 원천은 현석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9월, 서울 청계천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교통사고 보상금이었다. 대위로 제대하고 천안에 귀향한 후 고향 친구들한테 사기를 당했다. 빈털터리가 된 남편 대신 돈 벌겠다고 어머니가 나섰다. 천안시장에서 청과물을 한가득 모아 트럭에 싣고 경동도매시장에 팔았다. 폭우가 내리던 새벽, 어머니가 탄 차는 과속 트럭에 충돌당했고 조수석에서 상처 없이 돌아가셨다. 어머니 형제들이 차주가 사는 대구로 몰려가 험한 다툼 끝에 어렵게 보상금을 받아냈다. 그걸 외가에서 관리하겠다고 했다. 무능한 현석 아비한테 주면 금세 날린다는 것이다. 보상금은 한참 후에 겨우 돌려받았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천안 변두리에 밭 이천 평을 샀다. 세월이 흘러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고 번잡한 동네 3층짜리 작은 건물을 샀다. 그 건물 임대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여유가 생겼다. 군용 지프차를 닮은 기아 록스타를 사서 낚시한다고 돌아다녔다. 소개로 알게 된 둥그스름한 과부를 차에 태우고 열심히 놀러도 다녔다. 그러더니 열 살 아래인 그 여자와 재혼했는데, 따로 사는 딸들이 넷이나 달려 있었다. 딸들은 마치 다시 살아 돌아온 친아버지라도 되는 듯 ‘아버지, 아버지’ 하며 곰살궂게 굴었다.
두 해 후, 아버지는 그 건물을 팔고 너른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아버지한테 중풍이 생기기 직전 일이다. 그런데 주택 명의를 재혼한 여자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30평짜리 아파트를 사서 두 딸 공동명의로 해준다고 했다. 그때 현석은 이혼하면서, 살던 서울 아파트를 아내에게 주고 인천에서 팔 년째 새장같이 작은 전셋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키우던 강아지는 그녀가 데리고 갔다. 유난히 까탈스러운 아이라서 현석은 키울 수도 없었다. 또 손바닥만 한 집에서 키우겠다면 그녀가 절대 허락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바보같이 호기를 부렸든 장남은 집도 없는데 말이다.
“당연히 아버지 명의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버지를 찾아가서 모난 소리를 내뱉었다. 아버지의 대꾸는 ‘내 인생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참견하냐?’ 화를 냈다. 곁에서 그 여자는 당당했다.
“그냥 거저로 내 명의로 해준 게 아녀. 내가 아버지 끝까지 모신다고 혀서 아버지가 해주신 겨. 내가 끝까지 모실겨.”
아버지가 거들었다.
“앞으로도 너희들한테 짐 되기 싫어서 그렇게 한 거다. 그런 줄 알아.” 
이 말에 현석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딸들한테 아파트 사 주신 거는요?”
아버지는 가소롭다는 듯 또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하고 싶어 한 거야. 너희들은 나한테 뭐 잘해준 게 있기나 하냐?”

 

그랬던 그네들은 한꺼번에 배신했다. 아버지를 끝까지 모실 거라던 그 여자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아버지의 병원비, 간병비는 고스란히 아버지 자식들 3남 1녀의 몫이 되었다. 그러더니 그 여자는 무릎 관절염을 핑계로 면회를 오지 않았다. 딸들도 덩달아 오지 않았다. 요양원 전화도 받지 않았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모른 척했다. ㅎ요양원은 더는 돌아갈 곳 없는 아버지의 마지막 집이 돼버렸다. 아버지는 평생, 자식들을 윽박지르며 자신을 우선해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오갈 데 없는 빈털터리에, 거동조차 못하는 늙은 몸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험한 경멸보다는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측은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현석은 아버지한테 차라리 당장 이혼하시라고 쏘아붙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있는지 “이 나이에 무슨 이혼을 하냐. 열 효자보다 악처 한 명이 낫다더라…” 말끝을 흐렸다. 뻔한 결말을 부인하고 싶은 미련은 잔혹한 희망일 뿐이다. 형제들은 장남인 형이 그런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했다. 욱하는 성질이나 얼굴, 몸매가 얼추 비슷하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후 거울 속에서 나를 아버지가 쳐다본다고?’ 끔찍한 일이다. 절대 닮고 싶지 않다.

 

부-윽 부-윽, 또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번에도 ㅎ요양원 김인호 사무국장이었다.
“어르신께 아드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요양원에 내일 말고 모레 오후에 오라고 하십니다. 따로 전해 드릴 것도 있다고 하시네요.”
그 말을 전해 듣자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뭔가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해졌다. 코로나19로 면회, 외출이 전면 중지된 상황인데도, 어떻게든 현석을 불러들이려는 의도였다. 참으로 고약한 노인네다. ‘스스로 빛나는 벽’이 있는 좋은 곳에서 또 누구와 다퉈서 있기 싫으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사 온 사탕을 입에 넣었다.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기 전에 이 달콤한 것으로 달래줘야 한다. 혀로 굴리다가 와삭 깨물었다.

 

요양원에서 아버지의 유일한 낙은 자식들 면회였다. 목을 길게 빼고 주말을 기다렸다. 요양원 침실에서 휠체어를 밀고 나서면 요양보호사가 늘 그랬다.
“잘 다녀오세요. 많이 드시지는 마시고요.”
아버지는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한다며 꾸역꾸역 폭식했다. 헐거워진 틀니 사이로 고기, 음식 찌꺼기가 잔뜩 끼어 붙었다. 역하고 흉한 꼴이 되어버린 틀니를 화장실에서 세척해 드리는 게 외출 식사의 끝이었다. 요양보호사들은 이런 아버지 ‘이장혁’의 외출을 눈치가 보이도록 싫어했다. 역한 냄새를 풍겨내는 물렁한 대변을 기저귀가 넘치도록 배출하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가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재앙이다. 더럽혀진 기저귀를 내용물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살살 걷어 내고 노인의 항문과 사타구니, 엉덩이를 뒤탈 나지 않게 물티슈로 잘 닦아줘야 한다. 과식이라는 뻔한 원인으로 생겨난 이 일을 끙끙거리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런 염치없는 늙은이는 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이를 갈지도 모른다. 만약 현석이가 그들이었다면 제발 많이 쳐 먹지 말고 똥도 많이 싸지 말라면서 사타구니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외출이 무기한 중지되고 있으니 기쁘게도 그들의 작은 소망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뜻하지 않게 전파된 코로나19로 모두가 불행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현석은 이틀 후인 5월 21일 목요일 아침 열 시쯤에 ㅎ요양원을 찾아갔다. 인천에서 그 시간에 요양원을 가려면 최소한 일곱 시에는 일어나 준비해야 했다. 요즘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렇게 일찍 일어나 본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혼자 살면서 더 게을러졌음을 실감한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그래도 출근 시간대는 번잡했다. 경부고속도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길이 막혔다. 지금 도착했다고 김인호 사무국장에게 전화하고 요양원 주차장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ㅎ요양원 화단에는 오월의 여왕이라는 장미꽃이 매혹적인 빨간색, 분홍색으로 가득 만발해 있었다. 그곳에서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꽃바람에 천천히 실려 왔다. 장미꽃 향기는, 이 꽃을 좋아했던 최서진의 기억을 뭉클 불러왔다. 서진은 우아한 오드리 헵번 이름을 딴 장미도 있다고 했다. 5월은,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던 그녀와 결혼식을 했던 달이다. 현석은 37살, 서진은 31살로 서로 늦은 나이였다. 서진이 아니었다면 노총각이었던 현석에게 결혼은 꿈도 못 꿨을지도 모른다. 아스라하게 가라앉았던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씩 둥실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사귈 때 내가 빨간 장미꽃 선물했던 거 기억나? 꽃은 남자가 주는 거 아니냐며 당황했었잖아.”
장미꽃 꽃말처럼 서진은 사랑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1년 후 서진은 자신의 소망대로 오월의 여왕이 활짝 웃을 때 현석과 결혼했다. 장미꽃이 가득 핀 정원 앞에서 예쁘게 웃는 웨딩 사진도 찍었다. 그런 오월의 화사함을 담았던 사진들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혼하면 과거의 증거물들은 거추장스러운 폐기물이 될 뿐이다. 가물가물해지고 조각난 기억들로만 남아 있다.
체르니 40번까지 했다는 서진은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서른두 곡을 모두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환상곡 풍인 14번 월광소나타를 애틋하게 좋아했다. 연주자로는 곡 해석과 연주 기량이 중후한 다니엘 바렌보임이 좋다고 했다. 그 연주자가 마흔세 살인 1985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레코드를 소장하고 있었다. 언제든 그 보물 같은 음반을 턴테이블에 얹고 감상했다, 아마도 은백색 달빛이 뿌려지는 1악장에서 폭풍우 몰아치는 듯한 3악장까지 모든 음표를 낱낱이 외우고 있는 듯했다. 레코드판이 돌고 있을 때 그녀는, 위대한 작곡자 베토벤, 연주자 바렌보임과 함께 몽환적인 달빛 속에 잠겨 있었다. 현석도 월광소나타가 점점 좋아졌다.
서진은 어린아이를 좋아했다.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 빙그레 웃으며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결혼하고 3년이 되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의사 말로는 주 2회 정도 부부 관계를 가졌음에도 1년 넘게 아이가 없으면 난임이라고 했다. 검사 결과, 마흔 살이 된 현석의 정자 수 감소와 활동성 저하가 원인이었다. 그녀는 더 기다려 보는 것 외에,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 시술은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진의 보조개 웃음은 점점 사라져 갔다. 월광소나타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예쁜 장미꽃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장미꽃으로 사랑을 알려주었던 그녀는 시들어 갔다. 갈수록 사소한 일로 자주 다퉜다. 화해 없는 다툼의 끝은 헤어짐이었다. 결국 현석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모든 일에 완벽하고 싶었던 최서진의 유일한 실수는 빈틈투성이인 현석을 만난 일이었다. 그것은 외삼촌 말에 의하면, 예쁜 아우라가 넘쳤던 어머니가 육군 소위 이장혁을 객지에서 만난 일과 닮았다. 대찬 성격의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마땅치 않았다. 보잘것없는 놈을 만나 아이부터 덜컥 가졌다고 딸을 모질게 나무라셨다. 두 해가 지난 뒤에야 겨우 허락된 결혼이었지만, 부모가 반대하는 그런 결혼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혼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애들 생각해서 좀 참으라고 했었는데 말리지나 말걸, 그랬으면 서른아홉에 죽지는 않았지….”
외할머니는 그렇게 한탄하셨다.

 

최서진과 헤어진 2년 후, 키우던 강아지가 갑자기 무지개를 건넜다고 연락이 왔다. 반려동물 장례식장에서 울먹이던 서진의 얼굴을 봤던 게 끝이었다. 그 뒤 좋은 남자 만나서 재혼을 했다는 풍문을 들었다. 뒤늦게 대학원 수료하고 심리상담사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내년이면 환갑이다. 세월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 버렸다. 아이를 원했었으니 노산을 강행했을까 아니면 입양이라도 했을까? 아이가 있었다면 벌써 대학생일 것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보일까? 궁금하긴 하지만 모두 머릿속 상상으로 그쳐야 한다. 서진과의 추억은 가슴 구석에 담아 놓기에도 버겁다. 장미꽃이 불러온 기억은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을 현석과 잠시 이어주었다. 그 기억은 장미 향처럼 달콤하게 온몸을 감쌌다가 이내 씁쓰름해졌다. 화단 뒤편에는 작은 꽃잎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있는 이팝나무 여러 그루가 있었다. 그 흰 꽃잎들이 장미꽃들과 어우러져 화단이 한층 풍성해 보였다. 아버지는 이팝나무를 잘 아셨다. 작년 어버이날 찾아뵈었을 때, 요양원 화단에 한창 피어 있던 이팝나무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기 있는 게 이팝나무야. 꽃이 흰쌀밥처럼 보이고 연한 단내가 나지. 이른 봄에 저거랑 비슷하게 피는 건 조팝나문데, 좁쌀 튀겨 놓은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더라. 저 이팝나무보다는 훨씬 키가 작지.”
잠깐이지만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얼굴이셨다. 현석에게는 아버지의 기억을 불러오는 이팝나무가 될 것이다.

 

김인호 사무국장 안내를 받아 간 큰 별실에 휠체어를 탄 아버지가 있었다. 예외적으로 특별히 뵙게 하는 것이라 했다. 둘 사이에는 비닐 막도 없다. 아버지의 수척한 얼굴에 마스크 흰빛이 도드라져 보였다. 호흡을 거칠게 했고 가끔 가래를 뱉어내면서도 괜찮다고 하셨다. 긴 탁자에는 대봉투가 올려 있다. 아버지가 열어 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폭삭 내려앉은 공비토벌기장이 있었다. 원래는 녹백이었을 기장 끈은 푸르스름하게 변색이 되었다. 이 공비토벌기장을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대청소를 했는데, 책장 깊숙이 있던 종이 상자를 호기심에 열어 봤다. 그 안에 공비토벌기장과 함께 군 시절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군용 차량 앞에서 멋있게 찍은 중사 계급장의 아버지였다. 그런 건 모두 처음 봤다. 기장은 은동에 니켈 도금된 표면의 한쪽은 날개 편 독수리가 있고 다른 쪽은 소총 맨 군인 두 명의 상반신 아래에 공비토벌기장이라고 양각되어 있었다.
“공비토벌 하셨어요?”
공비토벌기장을 본 현석의 돌발적인 질문에 아버지는 사진을 힐끗 보더니 수송 작전만 했다고 짧게 대답했다. 상자 속 사진에는 자세하게는 몰랐던 아버지의 과거가 담겨 있었다. 부사관 하다가 갑종간부 후보생으로 소위가 됐다고 했다.
그다음 다음 해 추석 때, 유량리 어머니 묘와 근처 산에 흩어져 있는 조상들 성묘 가는 오솔길에서 딱 마주친 아버지의 그 동네 토박이 친구가 있었다. 그분이 반갑다며 너스레를 떨며 그랬다.
“야, 느이 아부지는 말여, 지리산 빨치산 토벌 영웅이었댜. 이 산 저 산 휙휙 날아댕기면서 빨갱이들을 아주 싹 다 때려 잡았다잖어. 그때 포상휴가 받았다고 동네 와 갖구 얼매나 자랑을 하고 댕겼는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가면서 너희 아버지는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는 헛소리한다고 손사래를 치고 서둘러 떠났다. 수송 작전만 했다던 말과 전혀 달랐다. 눈치 보며 슬쩍 더 물어봐도 대답을 피했다. 입을 꾹 닫았다.

 

현석은, 아버지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었다는 것을, 중학교 1학년 늦은 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전방에서 근무했고 현석은 춘천에서 하숙하며 중학교를 다녔다. 그날은 한참 사회 과목 수업 중이었다. 낡은 나무 복도를 쿵, 쿵, 쿵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교실 문 앞에서 뚝 멈췄다. 그 도발적인 큰 소리에 모두들 복도 쪽 유리창을 쳐다봤다. 뜻밖에도 육군 대위 군복 차림의 아버지였다. 수업 중이셨던 최용우 선생님도 같이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어? 어?’ 하며 알아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거침없이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중대장님!” 하더니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붙였다. 최용우 선생님도 빠른 걸음으로 가서 반갑다며 손을 잡았다. 그들은 복도에서 서로 손을 잡은 채 껄껄 웃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가져온 작은 꾸러미를 현석한테 전해주고 또 칼 같은 거수경례를 한 뒤 돌아갔다. 선생님이 다시 교단에 서자 그런 광경에 시끌벅적했던 반 아이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선생님은 저분을 어떻게 아세요?”
선생님은 감격스럽다는 듯 목에 힘을 주셨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중대장이었던 나와 함께 용감하게 싸우셨던 동지셨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현석 아버님 그때 계급은요?”
선생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때 우리 이현석 군의 아버님은…, 씩씩한 육군 소위셨다.” 
멸공통일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시절, 빨치산들을 목숨 걸고 소탕해서 나라를 지킨 일은 존경받을 훌륭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감탄하며 와와~ 환호성을 터뜨렸다. 현석은 잠시 으쓱해졌다. 신나는 빨치산 토벌 무용담을 듣고 싶었던 아이들이 선생님을 졸랐지만 ‘자, 이제 수업하자’ 하면서 끝내 하지 않았다. 소심한 현석은 최용우 선생님을 찾아가서라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서 하셨던 일이 궁금했지만 아버지에게는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용감한 빨치산 토벌대 육군 소위셨다’라고 선생님이 하신 말도 아버지 앞에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직 어렸던 현석이 엄하고 살갑지 않은 아버지한테 말 붙이기가 쉽지 않았었던 까닭이다. 그것을 3년 후, 공비토벌기장을 봤을 때 물어보긴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아버지 군 경력이 있어서 두 달 전에 아버지의 군 경력증명서 발급을 신청했다. 생각만 하고 여태 미뤄두었던 일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인사기록카드를 복사한 넉 장을 우편물로 보내왔다. 깨알 같은 카드 글씨는 흐릿했다. 병사, 부사관 경력도 신청했는데 전쟁통에 유실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신 게 확실했다. 공비토벌기장을 1952. 6. 25.에 받았다. -공비는 빨치산을 폄하하는 명칭이었다.- 그것은 소위 임관인 1953년 11월 이전이다. 아버지의 빨치산 토벌은 ㅊ중학교 최용우 선생님이 말씀했던 ‘씩씩한 육군 소위’ 때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 현석의 체면을 세워주시려고 그랬던 것이다. 아버지 이장혁은 공비토벌기장을 받은 다음 해에 갑종간부 후보생이 되었다. 1953년 8월 19일 보병학교 입교했고 석 달간 교육 후 소위로 임관되었다. 아버지는 6·25전쟁이 시작된 해, 피난길에서 가두집병으로 입대했다고 했다. 그러니 전쟁 중이던 삼 년 만에 중사까지 진급한 것이다. 혹시 빨치산 토벌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워 특진을 거듭하신 건 아닐까? 그래서 부대장의 특별한 추천으로 갑종장교가 되신 건지도 모른다. 어떤 공로가 있었을까, 지리산에서는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렀을까?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는 군 시절 이야기를 자랑 삼아 꺼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양원 면회가 재개되면 아버지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했던 일을 자세하게 여쭤봐야겠다.

 

대봉투에는 공비토벌기장과 함께 심하게 낡은 수첩 그리고 오만 원 권이 두툼하게 들어 있는 편지봉투가 있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어눌하게 말했다.
“이걸 내가 말하는 곳에 깊게 묻어주라. 여기 수첩에는 지리산 토벌 때 일이 조금 적혀 있다. 이거하고 수첩 찾고 돈 가져오면 이혼해 준다고 했더니 얼른 가져오더라. 내일 법원 가서 이혼 접수하기로 했다. 얼씨구 좋아하더라. 여기 돈은 오백인데 알아서 써라.”
아버지의 재산은 어머니의 목숨값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건물을 팔고 나서 자식들 모르게 노후자금을 두둑이 챙겨 놓았을 거라 추측은 했었는데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그 여자와 공범인 것이다. 여태 돈 없다고만 했었는데, 또 다른 배신감이 쓰디쓰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거 묻을 곳은 수첩에 적어 놓았다.”
마치 유언처럼 비장했다. 수첩을 펴자 첫 장에 삐뚤삐뚤하게 쓴 큰 글자가 있었다. ‘대성골’이었다. 처음 보는 지명이라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지리산 밑에 있다고 했다. 이걸 왜 묻냐니까 “그냥 그게 싫다 싫어. 그때 일들이 자꾸 꿈에 나온다” 빨리 묻어 달라고 했다. 요양원에서 주무시다가 자주 소리를 지르신 게 그래서였을까. 그랬었다면 부탁하시는 것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ㅎ요양원에서 말썽 없이 오래 계시려면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는 일이다. 심부름값이라기엔 제법 큰 그 돈도 있다. 내일은 오늘처럼 별다른 일정은 없었다. 모레는 토요일이니 오가는 사람들이 뜸할 내일 일찍 출발하겠다고 했다. 숨이 더 가빠진 아버지는 현석의 눈을 쳐다보며 무겁게 말을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고맙다.”
그것은 아버지한테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5월 22일 금요일, 순천완주고속도로를 거쳐 구례화엄사 IC에서 크게 좁은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 나가자, 구례부터는 오른편에 나란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있었다. 상류 쪽인지 강폭은 좁았다. 화개터미널 입구에 다다르니 굽이굽이 돌아 내려온 섬진강의 한가로운 풍경이 눈앞에 크게 펼쳐졌다. 잠시 버스터미널 옆에 주차했다. 차 도착 예정지인 의신마을까지는 20분만 더 가면 된다. 아버지가 알려준 대성골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였고 아버지 말대로 지리산 아래였다. 내비게이션에서 인천에서 대성마을로 가는 출발점인 의신마을까지는 차로 네 시간 걸린다고 했다. 그곳에서 최종 목적지인 대성마을까지는 왕복으로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일곱 시에 집을 떠났으니 의신마을로 되돌아오는 것은 빠르면 오후 두 시쯤이 될 것이다. 편의점에서 도중에 점심을 대체할 간식과 생수를 사서 백팩에 넣었다. 배고프면 이른 시간에 저녁을 사 먹으면 된다. 지도에서 대성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산길, 등산로였다. 오랜만에 잊고 있던 등산화도 챙겨 신었다. 아마도 어렵지 않은 산행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준 수첩의 대부분은 색이 누렇게 변색된 백지였다. 뒷부분에만 빨치산 토벌 메모가 있었다. 잘 정리된 것으로 보면 나중에 옮겨 적은 듯했다.
‘백야전사령부 쥐잡기 작전…, 1952. 1. 17∼18. 대성골, 강추위 대설, 포격 뒤 진격, 빨치산 소탕, 마을 소각, 대성마을 여은숙(17세) 호송, 광주 이송(내 결정 아님).’
그 위아래는 모두 시커멓게 지웠고 그 메모 앞뒤 여러 장도 뜯어진 자국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현석에게 대성골이라는 지명과 여은숙 존재만 알려주고 싶었을까? 지리산 천왕봉 남쪽 아래 큰 골짜기인 대성골에 지리산 빨치산들이 집결했다. 그때는 발이 푹 빠지도록 폭설이 내리고 영하 30도로 혹독하게 추웠다. 그런 정보를 입수한 토벌대가 포위한 후 먼저 집중 포격과 네이팜탄을 투하해서 불바다를 만들었다. 빨치산들 수백 명이 타 죽고 사살되고 생포되었다. 지리산에 은거했던 빨치산들이 대성골에서 대부분 괴멸되었다고 했다. 하사나 중사쯤 됐을 스물네 살 젊은 이장혁은 빛나는 공로를 세우려고 악을 쓰며 선봉에 섰을까? 쥐잡기 작전은 빨치산들이 은거하는 지리산 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토끼몰이식 토벌작전이었다. 마을은 불 질러졌고 지역 주민들은 간혹 빨치산으로 간주되어 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했다. 성격 팔팔한 이장혁도 혹시 그런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을까? 십칠 세 여은숙은 또 누구인가, 거기 살았던 화전민 딸이었을까, 아니면 주민으로 위장한 소녀 빨치산이었을까? 수첩에 있는 ‘광주’는 광주포로수용소였다. 그곳으로 보내놓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던가? 많은 양민들이 수용소에서 추위와 질병으로 반수 이상은 죽었다고 했다. 이제는 구십이 넘어 늙고 심약해진 이장혁의 꿈자리에 그때 일들이 나타나서 괴롭히는가…, 아마도 아버지에게 공비토벌기장은 그때의 기억을 꽉 붙들고 있는 족쇄였을지도 모른다.

 

산자락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한가한 도로를 달려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뒤편 산밑에는 지리산역사관이 있었다. 화전민과 빨치산 자료를 전시한다는데 오늘 온 목적이 아니므로 지나쳤다. 차는 의신마을 길가에 대충 주차했다. 300미터쯤 걷다가 원통암 가는 왼편 길로 들어가서 주욱 더 올라가면 좁은 산길이 계속하여 이어졌다. 오월 중순의 숲길은 짙은 초록이 더해져서 향기를 뿜으며 찬란했다.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앞쪽에서 뻐꾸기가 뻐꾹뻐꾹 청량하게 울었다. 아까시나무는 하얀 꽃차례가 주렁주렁 매달려 흐드러졌고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일러주셨던 이팝나무는 꽃잎을 눈처럼 떨어뜨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찔레꽃, 제비꽃 너머 지리산 능선에는 철쭉이 벌겋게 피고 있을 것이다. 68년 전, 스물네 살의 청년 이장혁이 숨죽인 채 쌓인 눈을 밟으며 올랐을 이 오솔길을, 오늘은 나이 든 아들 현석이 따라 걷는다. 한참 더 올라가자, 오른편에서 흐르는 대성계곡과 만나는 지점에 대성마을쯤 되는 곳이 나왔다. 옆으로 갈라진 길 끝에 집이 두 채 있었다. 다가가 보니 작은 식당이었다. 여태 보이지 않았던 등산객들 열두어 명이 마루에 앉아 왁자지껄 식사 중이었다. 식당에서 거리 두기 하라는 코로나19 수칙은 이 산중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털털한 중년 사내가 현석을 맞았다.
아이고 우짤꼬, 죄송심더. 지금 단체 손님이 많애가꼬 점심식사가 안 되겠는데예…, 밥 먹으러 온 것은 아니었으니 궁금한 거나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가 예전에 빨치산 토벌했다는 대성골, 대성마을 맞나요? 주인은 손을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여는 아이라예, 옛날에 대성마을 살던 주민들은 울진 삼척 공비들 왔을 적에 다 이짝으로 강제로 옮기 왔고예, 시방은 그 옛날 대성마을을 원대성이라 안 카나예, 손님이 찾는 그 대성골은 원대성 그짝 아래 골짝일 깁니더. 현석은 당황해졌다. 그럼 그 원대성이라는 곳은 어디에 있나요? 멀지 않아예, 저 우짝으로는 한 시간쫌 더 올라가면 나옵니대. 멀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현석은 내친김에 더 물어봤다. 혹시 옛날 대성골에서 살았던 여은숙이라는 분을 아실까요? 흔하지 않은 성씨고 지금 나이는 팔십오 세쯤 되셨을 텐데요. 주인은 난감해했다. 모르지예, 원대성 살던 분들도 이주당할 적에 뿔뿔이 헤어져 삐고, 저도 여서 삼대째 살고는 있슴다마는 옛날 어른들 일은 알 길이 없네예…, 고맙다고 인사하고 등을 돌리자 주인이 외쳤다. 이따 내려갈 적에 함 들르이소, 도토리묵 한 사발하고 가시라예, 그라고 이짝 지리산에는 고로쇠나무가 천지라예, 봄철에 수액 채취 항께 그때도 꼭 오시고예, 몸에 그리 좋다는 고로쇠요.

 

옛 대성마을인 원대성을 향해서 휘돌아 올라가는 산길 오른편에는 대성계곡이 소리 지르며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대성계곡은 세석평전의 영신봉, 칠선봉 등 큰 산마루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내린다. 계곡 왼쪽 위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자 철거된 마을 흔적들이 나타났다. 원대성까지는 식당 주인 말대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살고 있는 집인지 모를 허름한 한 채가 저쪽에 구붓하게 있었다. 밭터나 집터에는 잡풀이 자라 올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수첩에 쓰여 있는 여은숙도 이 마을 어딘가에서 단란하게 살았을까? 마을 입구에는 새벽에 잠깐 내렸던 빗물이 고여 있는 돌절구통이 푹 박혀 있다. 저 절구로 곡식을 찧던 가족들은 모두들 어디로 떠났을지 씁쓸해진다. 아버지가 1952년 1월에 봤던 원대성 풍경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마을 위 산자락 등선뿐일 것이다.
빨치산들이 토벌대에 몰살당한 곳은 ‘세석평전에서 대성리 쪽으로 흘러가는 대성골 골짜기’라고 했다. 이 원대성 마을 아래 계곡이 그 불바다의 현장이었다. 지금 대성골 그곳에는 울부짖는 아우성이나 총소리는 없었다. 계곡에는 모서리가 둥글게 닳은 커다란 바위들이 무더기로 엉켜 있고, 그 사이로 장쾌한 물줄기만 콸콸 소리치며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려갔다. 계곡 비탈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나중에 큰비가 와도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을 위쪽에, 가져온 모종삽으로 깊게 구멍을 팠다. 백팩에서 슬라이드 지퍼백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공비토벌기장과 함께 현석이 마분지에 쓴 메모지도 있다.
‘이장혁 1928년생, 1952년 1월 대성골에 있었다. 본인 부탁으로 아들이 2020년 5월에 묻는다.’
구멍 안에 봉투를 밀어 넣고 흙을 채운 후 땅을 밟아 단단하게 다졌다.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지리산과 함께 묻혀 있기를…, 그때 여기서 빨치산 토벌작전에 동원됐던 24살 청년 이장혁에게 유탄처럼 박힌 기억의 파편들이 기장과 함께 꽁꽁 묻히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옛 기억에서 비명 소리는 사라지고 5월의 푸른 나무들로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

 

의신마을로 되돌아오니 오후 네 시가 넘었다. 마을은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한층 더 한적해져 있었다. 요양원 사무국장이 퇴근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했다.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 아버지와 연결되었다. 감기라도 걸리셨나? 약은 드셨나? 아버지 부탁대로 공비토벌기장을 대성골에 잘 묻었다고 했다. 미리 사무국장한테 보낸 카톡을 열어봐 달라고 했다. 오늘의 일정을 증명할 사진들이다. 마을 이정표들과 그때도 있었을 언덕에 높게 솟은 늙은 소나무, 원대성 가는 좁은 길, 옛 대성마을 터, 대성골 계곡, 공비토벌기장을 대성골 언덕에 묻는 사진, 그리고 현석은 착한 거짓말 하나를 보탰다.
“제가 대성동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주민한테 혹시 여은숙 씨 아시냐고 물어봤더니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했어요. 아버지 수첩에 있는 여은숙 씨요.”
아버지는 잠시 큭큭 숨을 고르더니 힘들게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연락 오면 알려 주고, 오늘 법원에 가서 신청했다…, 고맙다, 고마워.”
아버지는 또 고마워했다.

 

섬진강변 식당에서 이른 저녁으로 재첩국을 먹고 일어서는데 새벽에 잠깐 왔던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진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교체할 시기를 넘긴 와이퍼는 끼륵끼륵 신경 긁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유리창을 훑었다. 오후 여섯 시 반쯤, 임실IC 부근을 천천히 지나고 있는데 천안에서 사는 막내여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고 있었다.
“오빠, 아버지가 갑자기 호흡곤란이 심해져서 의식까지 잃으셨대요. 요양원에서 전화 와서 지금 119구급차에 같이 타고 응급실 가는 중인데, 코로나 때문에 호흡기 환자가 다 찼다고 받아주지 않는데요. 구급대원이 여기저기 알아봐도 모두 거절이고…, 작년에 입원하셨던 폐부종이 재발한 것 같다는데 그럼 큰일 아닌가요? 숨 쉬는 것도 겨우 하시고, 아직 의식 없으시고, 말 시켜도 반응도 없으시고…, 아,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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