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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에는 아무래도

한국문인협회 로고 문선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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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향에 간다고 말했다.
“거긴 왜?”
둘째 오빠가 핸드폰 너머에서 물었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써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고향에 묻혀 있는 수많은 이야기의 실체를 또렷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그들은 나를 성장시켰던 장본인들이었다.
“누구하고 가냐?”
“도도 아버지하고.”
“영원한 연인이랑 잘 다녀와.”
“응.”
웃음이 나왔다. 6남매 중 가장 장난을 잘 치는 오빠다. 유년 시절에는 짓궂기만 하던 오빠가 이제는 여동생을 존중해 준다. 오빠는 “초콜릿 여기 있다, 먹어 봐라” 하며 손을 내밀곤 했다. 오빠 손바닥 위에 놓인 아로나민은 영락없는 초콜릿처럼 보였다. 의심 없이 덥석 집어 씹어 먹으면 그것은 달콤한 맛이 아닌 비릿한 맛의 아로나민이었다.
오늘은 “영원한 연인?” 이제 노인이 다 됐네 싶었다. 오빠의 말이 말랑말랑해졌다.

 

6월의 하늘은 맑았다. 그 6월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 옛날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흐르는 형산강을 돌아들면, 나의 꼭꼭 눌러 담아왔던 기억이 울렁울렁 흐르곤 했다.

 

죽도시장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다 냄새가 훅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길 건너편으로는 불종로가 이어져 있었다. 남빈동, 상원동, 대흥동… 그렇게 불리던 이름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정’이라 했던 곳, 지금은 ‘원도심’이라고 한다. 원도심은 어디나 비슷한 풍경이지 싶다. 대형 주차장은 너무 멀고, 상권은 신도시에 밀려 죽어 있었다. 남빈 사거리에서 중심가로 내려오는 길에는 ‘학원사서점’이 지금도 있었다. 서점은 옛 우윳빛 타일 건물이다. 내 유년 시절 자주 들렀던 서점. 다달이 나오는 청소년 문예교양 잡지 『학원』을 사러 드나들던 곳이다. 읽을 거리가 풍성했던 『학원』. 연재만화 ‘코주부’ 아저씨를 만났던 사건은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유년의 옛집 앞이었다. 죽도시장 공영주차장에서부터 줄곧 이어지는 불종로 거리.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상업지구, 유년의 친구들이 살던 자리에는 여전히 상가가 남아 있었지만, 그 시절 친구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했다.
상권은 죽었다고 하지만 ‘시민제과’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성업 중이었다. 가업을 이어받은 아들이 운영하는 집. 순하고 성실했던 주인아저씨를 닮은 아들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또래였던 착한 딸아이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골목 바로 입구에는 고구마를 팔던 할머니가 앉아 계셨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분도 이제는 피안의 세계에 계시겠지. 그때 이미 할머니였으니 살아 계신다면 적어도 백 살은 넘으셨을 것이다. 
국민은행에서 육거리 쪽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동화나라에 있을 법한 구두 수선가게가 있었다. 빨간 지붕, 초록 컨테이너 박스, 노란 창틀로 꾸며진 작은 가게였다. 주인은 고개를 숙인 채 신발을 수선하고 있었다. 어떤 노동도 신성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점심을 어디서 먹지?”
청소년기에는 찐빵이나 짜장면이 최고의 먹거리였다. 영원한 연인과 나는 중앙사거리에 있는 햄버거집을 바라보았다. 햄버거 가게 안은 청소년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울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느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지요.” 
내 말에 남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늘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추억여행을 오자고 하는 일이 남편에게는 미안했다.

 

남편의 아버지는 해방 공간의 극심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북에서 내려온 기독 청년들, 서북청년단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였다.
“당신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게 내 바람이야.”
남편은 때로 차갑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다정스럽다가도 교회라는 말만 나오면 입을 닫게 만들 때면 섭섭했고, 두렵기까지 했다. 신과의 전쟁. 내 삶은 무한히 베풀어주시는 신의 은혜를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그중 가장 큰 축이 결혼과 가정생활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남편은 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우주에 편만한 어떤 신이 아니라, 오직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이다.
나는 대놓고 교회 다닌다는 말도 못한 채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을 해 왔다.

 

“왜 하나님은 당신 집안을 망하게 했지?”
남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어려울 때 도와주고, 기도하면 들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던지는 그 질문은 늘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나는 무엇을 결핍으로 느꼈던가.

 

중앙상가 사거리에는 우윳빛 타일 외벽의 신한은행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그 건물은 내 유년 시절 병원이었다. 여섯 살 때였다. 일본뇌염이 유행이었다. 나는 일본뇌염에 걸렸다. 열은 사십 도까지 올랐다. 병원 조수는 모기에 물려 빨갛게 곪아오른 환부를 잘라냈다. 소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의료기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잘못 건드렸던 것은 분명했다.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생명은 위태로워졌다. 나는 혼수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대구 경북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신경외과 수술. 한 달 동안 입원한 뒤 퇴원했다. 그때 내 곁을 경례 언니가 지켜주었다. 경례 언니는 열일곱 살이었다. 시골에서 우리 집으로 엄마 일을 도우러 왔다가 시집간 언니였다. 시공을 초월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너 기억나니?”
“뭘?”
“병원 수세식 변소에서 물 나오니까 앙 울었던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랬어. 언니는 기억나?”
“뭘?”
“언니 시집가고 나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그랬니? 그랬구나….”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경례 언니, 언제부터 우리 집에 있었어?”
“아주 오래됐지.”

 

나는 경례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도 언니도 무명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언니가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일했는지 말해 줄 사람은 이제 없다.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아 내 기억 속에 살아간다. 내 요구를 다 들어주던 경례 언니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시집을 간 뒤에도 가을걷이를 마치면 쌀이며 보리, 사과를 이고 우리 집에 왔다. 엄마는 경례 언니가 가져온 수확물을 몽땅 사주었다.

 

나는 우리 집에 일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살아 있는 삶의 현장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였다. 방 한구석에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그랬다. 내가 우리 집에 딸린 군식구들과 유난히 친했던 까닭은 그들의 일상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유교와 불교가 대부분이던 시절, 외가 친척들은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4형제들 중 맏이였던 외할아버지는 한약방을 하면서도 시인이었다. 둘째 동생만 이북에 남았고, 나머지 세 형제는 포항에 정착해 포항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고 했다. 셋째 남동생은 세탁소를 하면서도 성악을, 막내 남동생은 인쇄소를 하면서도 조각을 했다.
외할머니는 생활력이 강한 분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복막염으로 돌아가신 뒤, 죽도에서 평양약국을 운영했다. 엄마는 딸 다섯, 아들 하나 중 셋째였다. 1921년 평양 출생, 기독교 가정에서 날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며 자랐다. 신학문을 일찍 받아들인 외가는 당시로서는 제법 배운 집안이었던 듯하다.

 

나의 호기심은 나이가 들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하다. 외가는 왜 삼일 만세 운동 이후 월남을 결행했을까. 왜 하필 포항이었을까.

 

나는 막내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버타운에 계신 이모는 잦아든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선이야, 네 외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내가 네 살이었다. 내 아버지가 ‘이리 온’ 하며 손짓했는데, 나는 뒤돌아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었지.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게 아버지와 나 사이 마지막 기억이다.”

 

외할아버지 막냇동생의 딸은 아흔 살이다. 그 이모는 전도사를 마지막으로 하고 시애틀에 사는 딸과 함께 살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사촌이모와 함께 신설동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를 했었는데, 그때 포항제일교회에서 서울로 오신 우영락 목사님이 내게 세례를 주셨다. 나는 시애틀에 사는 그 이모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다.
“왜 평양에서 내려왔냐고? 나도 잘 모른다. 전쟁 전에 왜 남쪽으로 오게 되었는지 들은 적이 없어. 그런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 형제들이 잘 알았겠지만, 다 돌아가셨으니 들을 데가 없구나. 나는 그저 아버지 고향이 평양이었다는 것만 안다.”
“왜 하필 포항이었을까요?”
“글쎄다…. 우리는 다 포항교회에서 자라고 신앙생활했잖니. 그 시절엔 유교와 불교가 대부분이었고, 예수를 믿는다는 건 순교와 다름없던 시절 아니었겠니.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내려왔을 수도 있지. 평양에서 예수 믿고 가정 예배 드리고 신식교육 받았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다 돌아가셔서 물어볼 어른도 없구나. 내 나이도 이제 아흔이야.”

 

나는 포항제일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연혁을 살펴보았다. 1905년 제임스 에드워드 선교사와 김상오의 개척. 그리고 평양 대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의 1907년 부흥사경회 기록. 포항교회에서 시작하여 포항제일교회로, 사실은 똑같은 교회다.
엄마가 다녔던 성결교회 홈페이지에서도 낯익은 이름들을 발견했다. 여섯 살 때 엄마 손잡고 갔던 대흥동 성결교회. 엄마 장례를 집전했던 신일웅 목사님, 그 뒤 새로 부임한 박상영 목사님까지.
교회란 좋은 곳이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은 목사님들이었다. 삶이 바닥까지 추락할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만남들 역시 위로부터 온 사랑이라고 나는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30분 넘는 통화 끝에 시애틀 사촌이모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네 엄마는 맏이가 아닌데도 갈 곳 없는 친정 조카들을 집에 데려다 키우고 시집, 장가까지 다 보냈다. 친정만 그랬나. 너희 아버지 쪽 시조카들도 다 거뒀지. 일오, 이오, 삼오… 그 사람들 말이다. 이북에서 먹고살 길 찾아 포항까지 내려온 사람들이었잖니.”

 

친가는 왜 아버지 9남매 중 세 사람만 남한으로 내려왔을까. 왜 포항이었을까. 아버지는 9남매의 막내였다. 일오 오빠는 이북에 남은 아버지 맏형의 맏아들이고, 이오 오빠는 아버지 누나의 맏아들이다. 삼오 오빠는 아버지 사촌형의 맏아들이다. 이북에서는 죽도록 일해도 먹고살 수 없었기에 아버지는 평안도에서 포항으로 내려왔다. 포항 술도가 친척 밑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며 부유하게 살고 있다는 나의 큰아버지에게 가면 적어도 굶을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실상 큰아버지는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 사업가 밑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고, 다섯 아이를 남기고 죽은 아내를 대신해줄 만한 신부를 맞이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미 이북에서 무작정 살러 온 조카 가족들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엄혹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큰아버지는 소유권이 없는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 밑에서도 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동차를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아버지 손에 들어가면 마음먹은 대로 고쳐졌고,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지프, 트럭, 택시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동안에는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아버지는 훗날에는 시외버스, 관광버스까지 소유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외할머니는 생활력 강하고 현실적인 이 건실한 청년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마음에 들었다. 결국 자신의 딸과 혼인을 주선했다. 현실 인식이 뚜렷한 그 청년의 꿈이 있었다면, 학문의 기회가 없었던 자신과는 달리 자녀들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든 먹고살 수 있도록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1939년 8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교회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스물여덟 살 신랑은 턱시도를 입었고, 열아홉 살 신부는 들꽃 자수가 놓인 흰 한복에 면사포를 썼다. 신부는 신랑 어깨쯤 오는 키에 몹시 가냘픈 몸매였다. 수줍음이 많아 혼례식 내내 눈을 들지 못했다.
“자, 사진 찍습니다. 신랑 신부, 이쪽 보세요!”
1930년대식 입식 사진기 뒤에서 검은 천을 뒤집어쓴 사진사가 외쳤다.
“신부는 고개 들고 이쪽 보세요. 찍습니다아. 하나, 둘, 셋!”
펑! 사진 찍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신부의 눈길은 끝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결혼식날 모습처럼 평생을 수줍게 살아갔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강한 기세에 눌린 채 조용조용 살아간 사람. 내 기억 속 엄마는 활짝 웃는 얼굴보다 고요한 얼굴로 남아 있다.

 

엄마는 2∼3년 터울로 일곱 아이를 낳았다. 그중 한 아이는 돌도 되기 전에 홍역으로 잃었다. 나는 엄마와 단둘이 깊은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가족들은 눈이 크다며 나를 ‘눈글땡이’라고 불렀다. 눈이 큰 만큼 겁도 많았다. 다섯 살 무렵, 나는 입학하는 나이가 아닌데도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아버지 버스회사 차고지에서 엄마는 작은 보퉁이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넌 영천 둑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다. 이제 진짜 네 엄마한테 가자.” 
나는 텅 빈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겁먹은 얼굴로 작은 보퉁이를 꼭 안고 있었다.
“자, 이제 네 엄마한테 간다.”
일오 오빠는 운전기사였다. 오빠는 부릉부릉 짧게 액셀을 밟아댔다. 나는 정말 떠나는 줄 알았다.
“이제 출발!”
그 순간 나는 참았던 울음을 와락 터뜨렸다. 곧이어 터져 나온 커다란 웃음소리. 엄마, 오빠들, 언니가 하나둘 나타났다. 넓은 차고지는 마치 연극 무대 같았다.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
“에고, 넌 너무 어리숙한 게 탈이다.”
마음이 무너진 내게 엄마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늘 군식구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죽도시장에서 장을 봐올 때면, 음식 재료를 가득 지고 엄마 뒤를 따라오던 지게꾼이 “음식점 하능교?” 하고 물을 정도였다. 엄마는 피붙이라곤 자기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잘 알았다. 친정 조카들, 시댁 조카들을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우고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까지 보냈다. 집안일을 도우러 온 아이들, 버스 안내양들, 그들이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도록 언덕이 되어 주었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약국을 접고 외삼촌 집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게 되자 우리 집이 편한지 자주 머물렀다. 아버지는 장가 들고 보니 “형부요” 하는 처제가 셋이나 있더라고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처제들이 팬티만 입고 방방 뛰어다녔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외할머니 막내딸과 엄마의 첫아들 큰오빠의 나이 차이가 고작 네 살이었으니까.
큰오빠는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에 정이 유독 많았다. 고독한 유목민들 가슴을 다독여주는 따스함이 있었다. 우물가 커다란 오동나무에서 보랏빛 꽃이 피어나던 늦봄의 어느 날, 고모 딸 정순이가 소리를 질렀다. 충청도로 시집간 아버지의 누나는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자, 우리 집에 딸을 맡겼다. 정순이는 내내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사람 살려유우! 사람 살려유!”
두레박을 내리꽂다 우물에 빠져버린 정순이의 손을 있는 힘껏 맞잡고, 큰오빠는 정순이를 우물 밖으로 꺼내주었다. 새파란 입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정순이를 따뜻한 물로 씻겨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친애하는 경례 언니였다.

 

엄마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사람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말없이 보여준 사람이었다. 내 유년의 학교에서는 기성회장을 맡아 온갖 잔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골 출신의 담임선생님이 자취하던 셋방에 김치보시기를 갖다 주라고 나를 자주 심부름 보냈다. 앳된 처녀 선생님이 셋방으로 살던 초가집 마당에는 여름이면 채송화와 빨간 다알리아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콩주머니로 만든 오재미 놀이를 재미있게 했다.

 

그 배경에는 아버지의 경제력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감히 아버지 의견에 반대하며 살 수 없었다.
“엄마하고 아버지는 잘 안 맞았던 거지.”
언니와 오빠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차이였어?”
내 질문에 형제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삶의 방식 자체가 달랐어.”
아버지는 교육이란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엄마는 어릴 때부터 감성을 길러줘야 사람이 행복해진다고 믿었다. 엄마는 큰딸을 아버지 몰래 무용학원에 보냈고, 막내딸은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피아노를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거절당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실용주의는 엄마에게 대화의 기회를 앗아갔지만, 생활의 윤기를 포기하지는 않으셨다. 엄마도 때론 빈틈을 노리는 대담함도 있었다. 엄마는 며칠 동안 아버지가 출타한 사이에 전축을 안방에 들여놓았다. 우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LP판으로 들으면서 풍족한 문화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전축 사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셨다.

 

우리 엄마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은 아버지를 살게 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일을 마치고 아버지는 저녁 무렵이 되면 집에 오셨다. 엄마는 뜨거운 물 한 바가지와 우물물 한 바가지를 세숫대야에 부어 적당한 온도가 될 수 있도록 골고루 휘저었다. 대야에 담긴 고단한 발을 엄마는 단정히 앉아 묵묵히 씻겨 주었다. 그러고는 잘 우려낸 멸치육수에 삶은 소면을 넣고 시금치를 고명으로 얹은 물국수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따뜻한 물과 물국수로 하루의 피곤을 푸시곤 했다.

 

1971년 8월 19일, 한여름 무더운 날이었다. 그저 평범한 하루가 될 줄 알았다. 늘 그랬듯 새벽부터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운전수와 차장은 작업복 차림으로 밥을 먹으러 왔다. 부엌 가마솥에는 소뼈를 푹 고아낸 곰국이 설설 끓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모두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무언극 배우들처럼 침통한 얼굴이었다. 식솔들이 분주하게 마당을 오갔다.
“이제 곧 도착이라네.”
쌀가마니와 잡곡 자루, 잡동사니로 가득하던 창고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창고 바닥에 엄마가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칠성판이라고 했다. 죽은 사람이 누울 널빤지였다. 그 곁에는 시신을 가릴 병풍도 세워두었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감당하기에 벅찬 일들, 과로로 말미암아 쓰러진 결과였다.
“영구차가 곧 도착할 거라.”
조문객을 맞을 준비로 분주하던 일오 오빠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오 오빠와 삼오 오빠는 우리 형제들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작은오마니 너무 빨리 가셨구먼. 아이고, 오마니, 오마니….” 
정작 우리 6남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장례는 창고에서 치러졌다. 누군가 말했다.
“객사한 사람은 집 안으로 들이면 안 된다네.”
나는 물었다.
“왜 안 돼요?”
“밖에서 죽은 사람을 집 안에 들이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들 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경북대학교 병실에서 숨을 거두셨다. 병실도 건물 안인데 왜 엄마는 안방이 아니라 창고에 있어야 하는 걸까.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를 가르는 것은 병풍 하나뿐이었다. 병풍 앞면에는 십장생 그림이 있었고, 뒷면에는 뜻 모를 한문이 빼곡했다. 그 뜻을 모르는 한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흘 내내 억울하고 서러웠다. 문상객이 모두 돌아간 어느 순간 창고 안은 고요해졌다.

 

산소에서도 가장 서럽게 울던 사람은 종손 일오 오빠였다. 엄마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일오 오빠, 큰오빠, 언니, 세 사람이었다. 일오 오빠는 경북대학병원에서의 엄마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해주었다.
“선이야, 작은아버지가 병실로 들어오시자마자 ‘이 사람아, 왜 이렇게 누워 있어. 빨리 일어나’ 그러셨다. 그런데 작은어머니는 바로 직전에 숨을 거두셨어.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 가슴에 귀를 대고 한참을 꼼짝도 안 하셨지. 눈물만 흘리시더라.”
일오 오빠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장례식 때 포항 사람들이 모두 온 것 같았다. 네 어머니가 모든 사람 어머니였으니까. 우리도 그랬다. 이북에서 내려와 얼마나 서러운 일이 많았겠나. 네 어머니가 우리 마음을 참 잘 알아주셨다.”
일오 오빠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 모르겠다. 아직 부고가 들리지 않은 걸 보면 어딘가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로 이사 갔다는 일오 오빠는 젊은 시절 오토바이 사고 후유증이 늙어서 나타났다고 했다. 허리와 다리 통증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고 했다. 지금의 일오 오빠라면 평안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아흔두 살 노인의 기억이 얼마나 또렷할지는 알 수 없지만.
큰오빠는 울고 있는 내게 다가와 자기 옷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라.”
큰오빠의 낮은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성결교회 신일웅 목사님은 엄마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잠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엄마의 삼일장을 마친 날 밤, 나는 환상인지 현실인지 몰라서 희붐한 새벽이 온 줄 알았다. 우윳빛처럼 부드러운 빛 같은 꿈속에서 엄마는 평소에 가장 아끼는 뉴똥 저고리를 입고 내 앞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우아하게. 나는 엄마가 천국에 갔음을 확신했고, 엄마를 다시 만나려면 교회를 어떤 경우이든지 꼭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회사의 운전수들, 차장들, 함께 일하던 사람들, 남한으로 이주해 포항에 정착했던 친척들. 고단한 삶을 버텨냈던 그들은 이제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뿌리였던 아버지는 살아 계셨다면 백열다섯 살, 어머니는 백여섯 살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살았던 집, 골목 끝 막다른 집, 늘 대문이 열려 있던 그 집은 지금 굳게 닫혀 있었다. 이제는 골목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나무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나무문 틈 사이로 핸드폰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어 어렵게 집 정면 사진을 찍었다. 형제들 단톡방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넓던 땅은 나무 한 그루 심을 자리 없이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삭막한 풍경이었다.
어쩌다 공공의 땅이 되었을까 의아했다. 시청 주택과 직원은 전화 너머로 그 골목 땅은 주민 민원으로 기획재정부가 사용하도록 내준 땅이라고 설명했다. 아하, 이해할 수 있었다. 10미터 남짓한 막다른 골목은 한때 영화를 보러 나온 해병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아마 정부에서 빌려왔을 당시만 해도 이곳 상권은 꽤 번성했을 것이다. 지금은 상가마다 오래 붙어 있었는지 잉크까지 바랜 ‘임대’ 안내문만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원래 집 대문은 이쪽이 아니었다. 백 년 넘게 성업 중인 시민제과 맞은편 쪽이 본래 대문이었다. 지금 골목 쪽 대문은 원래 뒷문이었다. 언제부턴가 골목 안이 정문이 되었고, 원래 대문 자리에는 상가 두 칸이 들어섰다. 그 옆에는 작은 쪽문이 새로 생겼다. 그제야 뒤늦은 생각이 밀려왔다. 어쩌면 대문의 위치를 바꾸던 그때부터, 어린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어떤 사정이 집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먹장구름은 이미 천천히 집 안을 뒤덮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송도해수욕장 송림 부근에 살았던 홍 영감은 낮은 양철지붕 집에 살았다. 어두운 방 안, 그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주역을 펼쳐두고 사주풀이를 했다. 어느 날, 어린 나는 엄마를 따라 그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교회에 쌀가마니를 갖다 주던 우리 엄마는 얼마나 답답했으면 홍 영감까지 찾아갔던 것일까. 그런 엄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무너지고, 우리의 재산과 집과 찾아오던 사람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중앙사거리 불종로. 유년의 골목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그 골목은 내게 자꾸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오늘의 고향 여행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골목을 돌아 나오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대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빈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쌓였던 명성과 부는 모래알처럼 흩어졌고, 사람들은 떠났고, 나 또한 늙어 갔다. 그런데도 누군가를 먹이고 품어주던 마음만은 아직 그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해 여름에는 아무래도, 나는 고향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오래 잊고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속을 천천히 걸어 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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