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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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부터 W(처)가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신신당부한다.
“H(딸)에게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말- 직장의 ‘직’ 자도 꺼내지 말 것.”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부부와 딸이 2박 3일 속초 여행길에 오른다.
W로부터 내게 내려진 행동수칙은 촘촘히 몇 개 더 있다.
“H가 운전할 때 옆에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지 말 것.”
“H가 추천한 식당이나 메뉴가 입에 맞지 않아도 토 달지 말 것.”
“숙소에서는 내복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말 것.” 등등.
어쨌거나, 모처럼 오붓한 가족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H는 큰딸, 미혼이다. 일찌감치 독립해 따로 살고 있다. 직장 일은 항상 열심히 해 온 터라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지만, 소신과 정의감이 강한 성품 탓에 때때로 혼자 힘들어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알고 보니, 요즘 H의 스트레스가 특히 심한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여행을 제안했으니,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에선 정말 잘해줘야지.’
새삼 아비의 어쭙잖은 사명감이 솟구친다. 배낭을 꾸리는데 W가 또 한마디 귀띔을 해준다.
“엊그제 H가 사다 드린 티셔츠 꼭 입어요. 그 야구모자도 함께.”
H의 심기 배려라니, 평소 여행 때의 사파리 모자는 놔두고 그걸로 쓴다.
12년간 6만 km를 달린 H의 차. 조수석을 뒤로 빼고 반쯤 눕듯 앉는다. 뒷자리 왼쪽의 W와 운전석 H의 체중을 합치니 앞뒤 좌우 균형이 맞다. 연식이 있는 만큼 승차감이 좀 떨어진 것 말고는 불편하지도 않다. 20여 년 무사고 경력에다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녀서 그런지, 장거리 고속도로 주행에도 H의 운전 자세는 언제나 곧바르고 늠름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이젠 제 인생을 스스로 잘 이끌어 갈 수 있겠구나’ 내심 대견해한다.
오후 3시. 입실 시각에 맞춰 숙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키오스크 체크인’이라는 안내에 따라 용감하게 흰색 기계 앞에 서본다. 지시대로 눌러 보지만 계속 에러다. 결국 직원이 달려와 해결해 준다.
객실은 방 셋, 욕실 둘에 거실과 식당이 딸린 아파트형 구조. ‘여행 중 잠자리는 일단 쾌적해야 한다’는 ‘가내 준칙’에 따라 찾아낸 숙소다.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세 사람 지내기엔 무난한 편이다.
짐을 풀고, 속초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관광 수산시장’으로 향한다. 길에 익숙한 듯 앞장서 걷는 H를 따라 시장 곳곳을 누빈 후, 저녁은 그냥 숙소에서 먹기로 하고, 회와 초밥, 부식류를 한 아름 사 들고 온다. W도 H도 먹거리에 만족해하는 눈치다. 품질과 가격 모두 괜찮다. 식사를 마치고는 숙소 앞 청초호 둘레길로 산책을 나선다. 잘 정돈된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오니 H의 표정이 서울에서보다 한결 밝아져 있다.
2일 차. 양양 낙산사 행. H가 두 번이나 템플스테이를 다녀온 곳이다. (H는 불자가 아니면서도 사찰의 체험 프로그램을 곧잘 다닌다.)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낙산사 가는 길. 세 사람 마음이 스르르 편해진다. H는 마치 자기 집 보여주듯, 절 이곳저곳을 돌아가며 찬찬히 안내한다. 해수관음상과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장관에 가슴이 탁 트인다. 인증 샷을 찍느라 바다를 등진 W와 H의 얼굴이 더없이 맑고 환하다.
다시 속초로 돌아와 최고의 맛집이라는 물횟집을 찾아갔다. 바글거리는 손님이 말해주듯 양, 질, 맛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아쉬운 점은 몇 사람이 오더라도 후식인 콩떡은 한 종지뿐이라는 것.
영랑호변 어느 호텔의 꼭대기 층에 있는 커피숍. 내리는 비로 주변 시계가 흐리긴 했지만, 전망과 분위기는 더없이 훌륭했다. 새삼 알게 된다. H에게도 이런 멋진 풍경을 즐기는 낭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이른 저녁, 다시 수산시장에 갔다. W와 H는 그곳이 썩 좋단다. 외국인 알바생들이 파는 한과류, 십여 분 줄을 서야 하는 술빵, 꼬마김밥에다 해물 장아찌까지 사 들고 오니, 이날도 숙소에서 성찬이 펼쳐졌다.
3일 차. H가 피곤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본인이 먼저 씩씩하게 나선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화진포. 역시 절경 앞에서 감탄만 나온다.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공연한 꿈도 꾸어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경길에 오르기 전, 또 다른 명소라는 생선구이 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번엔 솔직히 별로였다. 생선도 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맛 평을 내뱉고는 ‘아차’ 했다. 이번 여행의 수칙 중 하나인 ‘H의 선택에 토 달지 않기’를 어긴 것이다. 슬쩍 H의 반응을 살펴본다.
디저트는 생략하고 바로 서울행 출발이다. 왔던 길 그대로. 미시령의 울산바위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한다. 차 안에서 이번 여행 중 갔던 곳, 먹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간간이 웃고 떠들면서 산뜻하게 돌아온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H가 W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 즐겁고 편했던 여행 감사. 걱정 안 하시도록 힘낼게.’
W와 나는 그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가 다녀온 속초는 그저 이름난 항구나 관광도시가 아니었다. 지쳐 있던 H의 마음을 조용히 품어준 고마운 ‘쉘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