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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장수 어머니

한국문인협회 로고 엄해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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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보낸 부고 문자를 받았다.
‘새엄마에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도 모르게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날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그 문자를 보는 순간 마음 한쪽이 눌리는 것 같았다. 친구 엄마인데, 어쩌다 이분과의 정(情)이 이토록 깊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첫아이를 유산하고 친정집에서 몸조리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 엄마가 꽃을 한아름 안고 찾아오셨다. 내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 집이 초행이라 길은 설고 어디에 사는지 집 위치도 몰랐다. 우리 집이 상업고등학교 앞쪽이라는 말만 듣고 무작정 강경으로 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집을 찾았다고 했다. 유산은 아이를 낳은 그것이나 진배없다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따뜻했다. 그날 이후 그분은 나를 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을이 공기를 말리고 추위가 높이를 더해갈 즈음이었다. 민원실에서 친정엄마가 왔다고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민원실로 내려가 보니 새엄마였다. 새엄마는 딸이 보고 싶고, 변변찮지만 주고 싶은 것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보따리를 얼른 들치며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김치, 들기름, 된장이 들어 있었다. 농사지어 자식들 줄 것을 나누면서 내 것은 별도로 챙기셨다고 했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버스 타고 오셨을 것을 생각하니, 거저 받는 것이 미안했다. 오히려 새엄마는 공연히 귀찮게 했다며 주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나는 명절이 다가오면 작은 선물을 사서 새엄마 집에 찾아갔다. 새엄마는 갓 지은 따스한 밥에 표고버섯 듬뿍 넣은 된장국을 끓여 주셨다. 우리 둘이 밥상에 앉아 있으면 정말 모녀인 것 같았다. 새엄마는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새엄마는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남매를 키웠다. 그분은 남편이 남긴 농지만으로 자식들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도토리묵 장사였다. 좋은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고 견디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듯, 도토리묵 만드는 것도 그랬다.
도토리를 삶아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들었다. 그 가루를 큰 대야에 담고 물을 채웠다. 그리고 맑은 물이 될 때까지 깨끗한 물을 며칠씩 갈아 주어야 떫은맛이 빠진 좋은 앙금을 얻을 수 있었다. 앙금과 물을 큰 솥에 넣고 끓이면 도토리묵이 쑤어졌다. 도토리묵을 쑬 때는 솥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긴 주걱으로 쉬지 않고 계속 저어야 했다.
어쩌다 별미로 도토리묵을 만드는 것이야 고된 일이 아닐 수 있으나 생업은 달랐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면 몸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삭신은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도 공부 잘하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어렵게 만든 도토리묵을 파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장 골목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토리묵을 팔았다. 어느 날은 어두울 때까지 도토리묵을 다 팔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밤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니 단골도 있고 장사 수완도 생겼다. 맛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도토리묵 장사가 곧잘 되었다. 자연스레 여러 가게에서 도토리묵을 공급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때부터는 조금 편하게 장사할 수 있었다. 새엄마의 뒷바라지로 자녀들은 잘 성장하여 취업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새엄마는 도토리묵 만드는 일을 그만두었다.
새엄마 병은 빈혈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진료도 받았으나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연세가 높아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친구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었다. 그사이 새엄마는 부쩍 야위어 있었다. 누군가 부축해 주면 화장실만 겨우 다닐 정도였다. 새엄마는 친구의 도움으로 침대에 기대앉으셨다.
“해경이 된장 다 먹었을 거야. 된장 좀 줘라.”
친구에게 말했다.
“지난번 주신 된장 아직 남아 있어요.”
“내가 주는 마지막 된장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꼭 가지고 가”라고 말하며 친구를 향해 손짓하셨다. 친구가 뒷마당으로 나가 된장독 뚜껑을 열었다. 구수한 된장 냄새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친구는 주걱으로 된장을 떠서 동그란 통에 담아 방으로 가져왔다. 새엄마는 통에 가득 찬 된장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셨는지 미소를 지으셨다. 얼른 나으셔서 사무실 한 번 더 오시라고 했더니 그러고 싶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새엄마를 마지막 만났을 때는 병세가 더 깊어 있었다. 친구가 해경이 왔다고 말했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친구의 말에 잠시 감았던 눈을 떠 허공을 바라보다 금세 잠이 드셨다. 이불 틈으로 나와 있는 새엄마 손을 살포시 잡았다.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손이 낯설었다. 새엄마는 도토리묵처럼 탱탱하게 잡고 있던 삶의 끈을 서서히 풀어 놓는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여니 새엄마가 줬던 된장이 보인다. 그 어디서도 살 수 없는 된장이라 조금씩 아껴 먹어도 양이 줄어만 간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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