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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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7일, 우리 부부는 특별한 여정에 올랐다. 새로 태어난 셋째손주 ‘유지로’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바탐섬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허리 사고 이후로 거동이 다소 불편한 나를 위해, 아들은 바탐에서 한국까지 직접 우리를 모시러 와 주었다. 아들의 배려 덕분에 인천공항에서부터 휠체어를 이용해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바탐 공항에 도착해 게이트를 나서자, 사돈 내외분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특히 초등학교 2학년인 손녀딸 하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만든 환영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고 기뻤다.
손녀 하이는 미인 중의 미인,
지태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지로(유지로)는 미남 중의 미남,
엄마 아빠는 잉꼬 중의 잉꼬.
—하이 가족 축시
우리 가족은 이 축시를 여행 내내 노래처럼 즐겁게 반복하며 불렀다.
아들 덕분에 우리 부부는 평생 상상도 못했던 수상 리조트의 대형 식당에서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즐겼다. 수상 리조트에서 함께 받은 마사지 이벤트도 참 의미가 있었다. 평소 표현이 적은 집사람이 얼마나 좋았던지 “천국에 다녀온 것처럼 시원하고 좋다”라며 날마다 받고 싶다고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말하는데, 나 역시 깊이 동감했다.
인구 약 150만 명의 인도네시아 바탐섬은 마치 한국의 1970∼80년대 개발 시대를 연상케 했다. 가는 곳마다 활기찬 건축 현장이 눈에 들어왔고, 주택과 호텔이 즐비했다. 시내 가로등은 대개 태양광을 이용해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대로에 신호등이 한국처럼 많지 않은 모습이 무척 이채로웠다. 중앙 경계선에 있는 녹지대를 잘라 만든 임시 유턴 구역에서 자동차들이 자유롭게 차선을 변경하며 회차하곤 했다.
한국 못지않게 많은 자동차와 그보다 더 많은 오토바이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큰 혼란이나 사고 없이 재빠르게 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막내아들은 “이 나라는 무질서 속에서도 그들만의 묘한 질서가 존재한다”라며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바탐은 결코 삶의 질이 떨어지는 빈민국이 아니었다. 배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싱가포르와 가까워서인지 대형 식당이 많았고 메뉴도 다양했다. 다만 부유층이 모여 사는 대단지 입구에는 경비초소가 있어 출입 시 경비원이 일일이 점검하는 등 빈부의 격차는 심해 보였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무척 온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공사장 현장을 지나다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따뜻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심이 더욱 깊어진다’고 하던가. 바탐 시내의 대형 식당과 식자재 마트를 찾았을 때 유독 그랬다. 혹시나 해서 진열대를 둘러보니 한국 식품들이 가득 수입되어 있었다. S라면부터 J라면 등 수십 가지의 한국 라면류는 물론이고, 각종 과자류까지 넘치게 진열되어 있었다. 심지어 심야 전용 한국식품 코너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신기하고 놀라운 마음에 사진으로 그 풍경을 담아두었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도 대여섯 곳이나 있었다. 막내아들이 자주 찾는 가게들이라며 자랑스레 안내한 ‘아리랑’ ‘대장금’ ‘우미정’ 등 세 곳을 찾아가 특식 메뉴를 맛보았다. 타지에서 마주한 한국음식 덕분에 고향의 맛을 느끼며 아주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한국에서는 옛날에 아기를 낳으면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집 대문에 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빨간 고추와 숯을 꽂은 ‘금줄’을 길게 쳐 두곤 했다. 현대에 와서 큰 사고가 난 곳에 치는 폴리스 라인과 유사한 일종의 신성한 보호막이었던 셈이다.
이번에 태어난 셋째손주의 출생 과정에서는 전혀 다른 이국의 흥미로운 산후조리 풍습을 경험했다. 이곳 바탐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전문 보호 도우미가 산모의 식사와 관리를 전담한다고 한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독특한 현지 식자재와 전통 약재(돈태키)를 사용해 산모를 보살폈다. 도우미는 산모 옆에 임시 매트를 깔고 함께 잠을 자며 밤낮으로 아기와 산모를 돌보아 주었다.
막내아들의 말로는 이 전문 도우미의 수고비가 일반 도우미보다 몇 배나 더 비싸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정성껏 보살펴준 덕분인지 산모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일반 도우미 여사는 산모 외의 다른 가족들의 살림을 도맡아주었다. 덕분에 친할머니인 집사람은 산모를 도울 일이 따로 없어 편안하게 쉬며 지낼 수 있었다. 참고로 바탐의 큰 규모의 경제권은 대부분 화교나 이슬람권에서 쥐고 있다고 한다.
나는 비록 몸이 자유롭지 못해 많은 곳을 쏘다니지는 못했으나, 마음만은 호기심 가득한 소년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한 20일을 가득 채우고 돌아왔다. 귀여운 손녀 하이, 든든한 큰손자 지태, 그리고 갓 태어난 서글서글한 유지로까지, 매일매일 눈에 띄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과 재롱을 보느라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다. 아들이 자상하게 챙겨주는 덕분에 우리 부부는 호강을 원 없이 잘 받고 왔고, 바탐의 독특한 문화도 직접 듣고 체험할 수 있었다.
5월 23일, 아쉬운 송별을 뒤로하고 바탐을 출발했다. 시차와 비행 끝에 5월 24일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또 한 번 새로운 감회가 밀려왔다. 입국 절차는 여권을 한 번 찍고 지문을 대조하는 것만으로 신속하게 끝이 났다. 공항을 둘러보니 외국인들이 가득했고, 화물 찾는 곳을 몰라 헤매는 서양인들에게 우리 한국인들이 친절하게 다가가 영어로 말을 듣고 안내해 주는 모습이 보였다.
외국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위상이 부쩍 눈에 띄도록 향상되고 있음을 다시금 절감했다. 세계 속에서 당당히 빛나는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가득 뿌듯함과 흡족함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