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1
0
들녘 가득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클로버가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입니다. 시인의 방을 장식할 만큼 화려하지도, 화병에 꽂아두고 감상할 만큼 고고하지도 않지만, 가녀린 꽃줄기 끝에 매달린 작은 꽃송이들은 언제 보아도 정겨움을 줍니다. 한때 <꽃반지 끼고>라는 노래가 유행하며 수많은 연인의 사랑을 이어주는 오작교 역할을 했던 이 꽃, 유럽이 원산지인 귀화식물 토끼풀에는 우리 부부만의 눈물겨운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못다 한 공부를 하겠다며 서울로 유학을 떠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황망히 낙향했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주저앉아버린 것이 당시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운명처럼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라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열었고, 덜컥 살림을 차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내의 나이 겨우 스물. 아무것도 모르는 꽃다운 나이에 가진 것 없는 나를 따라와 소꿉놀이 같은 살림을 시작하면서도 우리는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안타까워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을 장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려는 듯 우리는 서로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합니까. 덜컥 아이가 들어섰고, 우리는 그것이 쌍둥이인지도 모른 채 불러오는 배를 안고 물려받은 몇 마지기 논을 일구어야 했습니다.
결혼식은커녕 임부복 한 벌 해줄 수 없었던 가난한 살림이었습니다. 제가 공사판을 전전하는 동안, 만삭의 아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에 올라 땔감을 구하고 불을 지펴 밥을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랑만 먹고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철없는 청춘이었습니다.
어느 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는 바쁜 농번기였습니다. 물려받은 다랑이논을 묵힐 수 없어 농사를 짓는데, 높은 곳에 있는 논이라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논둑에 흙을 덧발라주어야 했습니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논둑을 다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린 아내가 집 사방에 있는 푸성귀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어 식을세라 정성스레 챙겨 머리에 이고 나타났습니다. 제게 아내는 영락없는 ‘우렁각시’였습니다. 얼른 받아 든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내와 같이 논둑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아내는 뙤약볕 아래 고생하는 남편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밥숟가락 위에 김치 가닥을 찢어 올려주었습니다. 그 밥이 얼마나 꿀맛이던지요. 식사를 마치자 아내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키더니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땀범벅이 된 남편이 안쓰러워 자신이 거들 심산이었습니다. 두 무릎을 꿇고 논둑을 다지기 시작하는 아내를 보며 저는 기겁을 하고 말렸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아내의 작은 손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그만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흙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때, 우리 주위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클로버 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굵고 탐스러운 꽃 두 송이를 엮어 꽃반지를 만들었습니다. 흙 묻은 아내의 손을 논물에 씻어주고선 손가락에 살며시 꽃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처럼 행복해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울며 아내에게 맹세했습니다.
“우리 아이 태어나고 정식으로 결혼식 올릴 때, 내가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이만한 금반지 꼭 해줄게. 이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반지로 꼭 해줄게.”
그 후 몇 해가 흘러 쌍둥이가 자라자, 양가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우리는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예식장을 무료로 빌려주는 농협 회의실에서 식을 치렀지만, 하얀 면사포를 쓴 아내는 그 누구보다 예뻤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논둑에서 약속했던 ‘꽃반지만 한 금반지’는 끝내 해주지 못했습니다. 처가에서 보태준 돈으로 마련한 작고 초라한 합금반지로 우리는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때도 아내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믿으니 언젠가는 그 약속을 지켜주리라 믿는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며칠 전, 우리는 모처럼 차를 타고 둘만의 드라이브를 나섰습니다. 농사일을 놓은 지 오래라 계절 가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차창 밖 시골 풍경은 여전히 정겨웠습니다. 모내기가 한창인 논길을 지나다 보니 클로버 꽃이 논둑 가득 피어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옛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핑계로 잊고 살았던 그날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한 움큼 꽃을 따와 예전만 못한 솜씨지만 정성을 다해 꽃반지를 만들었습니다. 아내의 손에는 여전히 가벼운 결혼반지가 전부였기에 꽃반지가 들어갈 자리는 넉넉했습니다. 거친 아내의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워주면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지난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아마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겠지요.
아이들 키우느라, 먹고 사느라 지키지 못했던 약속. 우연히 마주친 클로버 꽃 덕분에 다시금 떠올린 그 약속. 비록 늦었지만, 그리고 언제 다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오늘 이 글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우렁각시에게 다시 한번 사랑의 꽃반지를 바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 앞에서 공표하고 싶습니다. 아내에게 했던 그 약속,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반드시 지키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