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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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연꽃을 심던 들녘이었고 우측은 꽃무릇이 무성하 게 피어 있는 숲이었다.
그 가운데로 난 길에서 나는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나뭇 가지가 길게 늘어진 길에 사람이 걷는 모습을 넣어 찍으면 그냥 꽃무릇과 숲만 찍는 것보다 한층 사진의 완성도가 높아 해마다 한 자리를 고정해 삼각대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상림숲을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림숲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내가 사진 찍는 길을 택해 내려오는 일정 한 방향성을 가진다. 그래서 나의 사진에는 사람들의 뒷모 습만 주로 담기는데 그 이유는 초상권 침해 논란 때문이었 다. 가끔 앞 모습을 찍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찍어도 되는지 정중하게 묻지만, 열에 여덟아홉은 거절한다.
2020년 9월 18일 오전 여덟 시가 지나면서 이 일이 생겼 다. 처음 꽃무릇을 본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뒷모 습이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 지나간 후 많이 멀어져 찍어도 누군지 모를 때쯤 집중해서 사진을 찍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내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살살 어루만지다가 손가락에 힘주어 주 물럭거 렸다.
사진은 깊이 몰입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 순간에는 온 정신을 집중하 고 호흡까지 멈춘다. 누군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함양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라 친구 중 누군가가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장난치나 보다 신경 쓰지 않 고 촬영을 끝낸 후 돌아보다 말고 깜짝 놀랐다. 전혀 모르는 미모의 여 인이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십대 어린 시절부터 사진을 찍었다. 이후 한결같이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십대의 몇 년과 삼십대의 몇 년, 마침내 사십대 초 반부터는 전력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사계를 간절히 기다렸다. 봄에는 새롭게 피어 나는 야생화를 기다렸고, 여름에는 연꽃을, 구월에는 꽃무릇을 기다렸 다. 가을이 깊으면 단풍을 기다렸고, 낙엽을 기다렸다. 그리고 겨울에 는 하얗게 내리는 눈을 기다렸다. 비 오는 날은 내리는 비를 기다려 사 진을 찍었으니 어느 하루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은 적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 년 전인 2000년대 중반에 전남 영광군 불갑면 에 있는 불갑사에서 처음 꽃무릇을 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충격이었다. 는개 내리는 날에 들녘 가득히 펼쳐진 붉음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심장. 돌이켜보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다. 이후 9월이면 십 년 넘게 불갑사와 용천사, 선운사로 꽃무릇을 찍으러 다녔 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곳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세 시간. 그러나 조금만 늦으면 주차할 곳이 없으므로 늦어도 새벽 한 시에는 출발했다.
2010년도 초부터 경남 함양군 함양읍의 상림숲에 꽃무릇이 피기 시 작했지만, 꽃이 너무 듬성듬성 피어 사진이 되지 않다가 2010년도 후반 부터 공원 가득히 밀도 있게 피어, 그때부터는 주로 상림으로 꽃무릇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상림숲에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질펀하게 깔려 있어 내 발길을 끌었을 것이다.
그때는 코로나가 왕성하던 시기여서 사람들은 많지 않아 사진 찍기 에는 더 좋은 시기였다. 사진은 여러 사람이 들어가면 관광 사진은 되 지만 작품 사진은 되지 않는다. 가끔 한 명씩 지나가야 주위와 조화를 이룬다.
2020년 9월 18일 오전 여덟 시에 뒷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이 한 명 지 나갔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서 뒷모습만으로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 을 때쯤 그 여인을 꽃과 함께 찍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도 하지 않고 엉 덩이를 만지는 것은 이상했지만, 내게는 그 순간 사진이 더 중요했고, 당연히 친구일 거로 생각했다.
뒷모습의 여인이 화각 밖으로 걸어 나갈 때쯤 사진 찍는 것을 멈추고 돌아보게 되었는데, 아아 돌아보게 되었는데 충격이었다. 모르는 여인 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랐고, 여인은 나보다 더 놀랐다.
여인은 아마 나를 자기 남편이거나, 애인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모르는 남자의 엉덩이를 그렇게 희롱하지 않았을 것이 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는데 나는 큰일 났다 싶었다. 그 녀가 수치심에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왜 남의 거를 만지냐고 따지지도 못하고 먼저 달랬다. 실제로 닿지는 않았 지만, 어깨를 쓰다듬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나조차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 뒤태가 워낙 예뻐 다른 사람들도 평소에 나 를 많이 만져요. 그러니 부끄럽다고 어디 가서 뛰어내리거나, 나무를 들이받아 자신을 해치지 마세요. 지금까지 나를 만진 사람 중에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은 없어요.”
내가 워낙 이상한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자 그녀는 충격이 좀 가셨는지 당황한 중에서도 킥 웃으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빠르게 걸어갔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길을 노리는 사진작가. 그녀의 뒷모습까지도 찍고 말았다.
이틀 뒤, 나는 역광으로 꽃무릇을 찍기 위해 다시 상림숲을 찾아 사진 을 찍고 여인이 내려갔던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길 끄트머리쯤에서 웬 여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누군지 몰라 가만히 보니 내 엉덩이를 만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디 높은 데서 뛰어내리거나 나무를 들이받아 자 신을 나무라지 않고 생생한 모습으로 다시 상림을 걷고 있었다.
몹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