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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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은 늘 무미건조하다. 가끔 여행하는 일 빼고는 거 의 매일 집 안에서 지낸다. 그럴 수밖에. 백수 무직인데, 취 미는 백치라 뭐든 할 줄 아는 게 없다. 운동신경이 둔해 스포 츠 활동도 젬병이다. 유일한 취미생활은 집 주변이나 공원 산책로를 걷는 일. 즐기던 그 일마저 요즘 들어 시들해졌다. 게다가 나이마저 칠순을 넘기다 보니 하나둘 옛친구들은 떠 나고, 새 친구 사귀기도 여의찮고…. 한동안 글공부합네 하 며 이곳저곳 문학 강의실 기웃거리던 일도 아내와 영별하고 서는 다 접었다.
이런 생활이 어느덧 2년째다. 이대로 쭉 지내야 하나. 홀 로 사는 여생이 얼마나 될까. 그걸 셈하기 전에 먼저 깨달아 야 할 것은, 나는 아직 살아 있고, 앞으로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부하긴 한데 젊었을 때 되뇌던 인생 명언, ‘내 일 지구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는 말을 떠올려 본다. 그렇다. 내일은 내일이고, 나 오늘 여 기에 이렇게 살아 있으니 사는 동안은 삶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오늘도 나는 머저리처럼 방 안에 처박혀 지내며 시간 대부분을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로 메 웠다. 어쭙잖은 이런 일상, 도리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탓하기보 다는즐기는게좋을듯도하다.
내 일상은 이러하다. 원주 기업도시의 한 아파트 4층에 산다. 이웃 마 을 문막읍에 살다가 이리로 옮겼다. 중소도시에서는 꽤 큰 규모로 780 여 세대 아파트다. 단지 배치가 조화롭고, 조경이 아름다운 널찍한 단 지가 맘에 든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단지 후방 좌측면에 다른 동과 좀 떨어져 자리 잡았다. 앞뒤로 시야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없어 좋다. 거 실에 앉아 앞산인 영산과 시가지 모습을 바로 조망할 수 있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나지막이 병풍처럼 둘러친 영산이 그림 같고, 도시 한가운데로는 실개천이 동서로 가로질러 흐른다. 거실 의자에 앉 아 바라보면 눈높이 시각으로‘영산’8부 능선이 마주 보인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4차선 도로가 남북축으로 반원을 그리며 뻗어 있다. 그 도로 옆 아파트 건물 사이로 치악산 능선이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오뚝하게 솟은 비로봉과 양옆으로 가로누운 능선 모습이 마치 솥뚜껑 을 엎어 놓은 듯하다. 달리 보면 그 능선이 젖무덤, 비로봉이 젖꼭지 같 아 보인다.
나는 이런 풍광을 매일 마주하면서 갖은 상념에 젖는다. 저 아스라한 치악산 너머가 내 고향 평창 땅이라는 생각이 밀려든다. 동창 친구들, 옛 직장 선후배들, 여러 지인 모습이 그려진다. 고향 옛집이 떠오른다. 분홍빛 개량기와 벽돌집. 집 뒤꼍 장독대 앞에서 이맘때면 한껏 맵시를 자랑하던 꽃양귀비가 아른거린다. 아담한 정원에서 곱게 피던 진달래, 잎 지고 꽃 피던 상사화, 남색 물망초, 담장 밑에 똬리 튼 채송화 등등, 어느 것 하나도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한데, 그 옛집이 헐렸다. 농협 창고 주차장으로 바뀐 집터에 내 살던 자취는 흔적조차 없다.
인제는 그만, 고향 생각은 떨쳐 버리자. 그러고는 마주하는 풍광에 시선을 주며 괜한 푸념을 옹알거린다. 6층 상가 건물 두 동, 한 건물은 ‘노블레스타워’이고 한 건물은‘스타세븐’이다. 건물 이름과 그 건물에 붙은‘미니교회’‘원탑M학원’‘BURGERKING’따위 업소 간판이 비 위를 상하게 한다. 꼭 이렇게 국적 불명 외국어로 이름을 지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이 도시의 아파트가 모두 이런 투의 이름이다. ‘유보라’ ‘이지더원’‘롯데케슬’‘호반베르디움’‘라온프라이빗’등…. 제 나랏 글을 푸대접하는 백성이 어찌 잘살겠냐는 생각이 오락가락하는데, 또 다른 상념이 꼬리 물며 부아를 돋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게 뭐 이것뿐이더냐. 죄지은 사람이 되레 큰소 리 뻥뻥 쳐대고, 대통령병이 걸려 설쳐대는 세상이니 더 말해 뭣하랴. ‘특(特)’자는 왜 그리 좋아하는지, 툭하면 특검인가 뭔가를 한다고 서 슬이 퍼렇고, ‘특’자를 붙인다고 뭐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겠건만, 내 가 사는 강원도 이름을‘강원특별자치도’로 바꿨다. 여생을‘특별자치 도’의 도민으로 살게 되었으니 감지덕지해야겠지만 언짢다.
시선을 돌려 4차선 도로에서 꼬리 물며 내달리는 자동차 행렬을 멍하 니 바라본다. 누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떤 목적에서든 저처럼 움직이 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지금 나는 왜 저 행렬에 끼이지 못하는 걸까. 한때 나도 저랬었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생업이었던 공직 생활이 눈에 선하다. 참으로 열심히 일했었지. 새마을운동, 화전정리 등 여러 사업 현장을 누비며, 쥐꼬리 녹봉에도 야근을 밥 먹듯 해대면 서 오직 멸사봉공한다는 긍지와 보람 하나로….
이 같은 잡념으로 범벅되는 부질없는 일상, 무료하다. 어쩌자고 이러 나. 옛일을 자꾸 들춰내며 가슴을 쥐어뜯어 본들 누가 알아준다고. 내 가 낄 자리가 없다고 체념할 게 아니라, 그런 자리가 있는지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닌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더냐. 그렇다. 옛일은 흘러갔고, 돌이킬 수 없다. 내일은 내일이 오면 생각하자.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백세시대라지, 내 나이 일흔이긴 해도 아직 남 은 세월이 많다고. 30년이나 된다고.’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 어느 글에서 본 선현들의 인생삼락을 곱씹어 본다. 공맹이 가르치는 삼락(三樂)은 나 같은 속인에겐 좀 버겁다. 김정 희 선생은 일독(一讀), 이색(二色), 삼주(三酒)라 했다. 신흠 선생은 문을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을 열면 마음에 드는 손님을 맞으며, 문을 나서면 산천경개를 찾아가는 것이라 했다. 정약용 선생은 어렸을 적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다시 가기, 곤궁했을 때 지나온 곳을 성공 하여 찾기, 홀로 외롭게 지내던 곳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찾기라 고 하였다. 나는 이 가운데 추사의 인생삼락이 마음에 든다. 한데 첫 번 째가 독(讀)인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독보다 주가 더 자신만만해서일 게다. 아무렴 어떠냐. 인제부터 내 여생의 삼락을‘1주(一酒), 2색(二色), 3독(三讀)’으로 삼으련다. 그리하여 따분한 일상에서 탈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