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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성수

시인·자문위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9월 6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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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금수강산의 이 아름다운 대한민국 땅에서 한평생 시를 쓰는 사나이, 나 정성수(丁成秀)는 여러 천재시인들과 달리 문단 등단이 슬그머니 늦은 편이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시인은 타고나는 것. 주변의 천재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남다른 감성과 이성과 낭만이 넘쳐나고 타고난 인성이 착하고 사려 깊고 시적 재능이 뛰어나다.
초등학교 시절의 꿈은 만화가였다. 서울 노량진초등학교 3∼4학년 시절, 틈만 나면 만화방에 달려가서 만화책을 빌려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비행접시 이야기, 밀림의 왕자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 이야기, 엄마 찾아 3만 리 등을 날마다 재미있게 본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5학년 때부터 중1 때까지 직접 창작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네 칸짜리 단편만화는 물론 반은 그림이고 반은 소설인 장편 만화를 창작해서 우리 반 아이들과 다른 반 아이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중1 때는 내가 그린 만화가 만화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만화가의 꿈은 중2 때 한 친구를 만나면서 어디론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돌이켜보면 일평생 문학의 길을 일찍이 암시해준 것은 나이 여섯 살 때 발발한 그 참혹한 전쟁 6·25였다. 1945년 8·15 후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당시 돈암동 2층집에서 아무 탈 없이 어린이답게 잘 자라고 있었 다. 그러나 다음해 1·4후퇴 때 드디어 파란만장한 생이 시작되었다.
그 추운 1월의 겨울밤, 우리 가족은 짐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우마차가 갑자기 짐과 함께 얼음장 밑으로 마구 빠져들어갔다. 피란민들의 비명 소리, 아우성 소리, 서로 소리쳐 부르는 소리… 그야말로 어둠 속의 난리였다. 어머니는 혼자서 미리 꽁꽁 얼어붙은 곳을 잘 골라 강을 건넌 뒤, 이쪽으로 오라고 우리 가족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악을 썼다. 그날의 상황은 어린 내가 겪은 최초의 지옥이었다.
우리 가족은 겨우 한강을 건너 논으로 밭으로 길 없는 길을 걷고 걸어서 깊은 밤 도로변 작은 마을 쉰배미에 도착했다. 피란 오는 도중에 고장난 소련제 탱크를 본 것 같고 논 속에 처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도 보았다. 하지만 나의 지옥은 바로 그 산 아래 도로 곁이자 작은 개울 곁인 쉰배미 마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대낮에 함께 피란 나온 외사촌누나가 난데없는 비행기의 폭격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비행기 탄환이 솜이불을 뚫지 못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외사촌누나는 그때 두꺼운 솜이불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당가에 서 있던 어머니의 엉덩이 살점이 폭격에 의해 사방으로 파편처럼 튀어나갔다. 내 곁에 누워 있던 두 살짜리 여동생이 폭격의 충격에 기절, 며칠 뒤 말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동생의 시체를 지게에 싣고 집을 나설 때, 나는 방문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누이동생과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어린 시절에 겪은 6·25는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칠 줄 모르는 포성과 폭격 소리와 전투기의 기분 나쁜 쾌속음, 총검을 든 군인들, 탱크, 트럭, 스리쿼터, 짚차, 끝없는 피란민 행렬, 널브러진 시체들, 한강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우마차, 외사촌누나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부상 등등…! 난데없는 남북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어린 나이에 나도 모르게 이미 쓸쓸한 허무주의자, 슬픈 염세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와 함께 냉이를 캐던 기억, 뿌우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미군 스리쿼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쫓아가는 아이들, 그들이 목이 아프게 소리 높여 외치는 ‘껌, 껌! 쪼꼬렛, 쪼꼬렛!’ 소리. 미군이 던지는 껌과 초콜릿을 주우러 마구 다투어 달려가던 아이들. 그들을 멀건히 바라보며 쓸쓸해하던 나. 거지가 생각나서 왠지 자존심에 상처가 나던 기억.
다음해에 우리 가족은 남양으로 이사를 갔다. 내 나이 여덟 살, 남양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산골짜기 오막살이집에서 먼 길을 걸어 다녔다. 학교 운동장에서 예쁜 여선생님으로부터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를 소리쳐 배우던 기억. 나는 남양초등학교에서 1학년, 서탄초등학교에서 2학년, 금각초등학교에서 3학년, 서울 노량진초등학교에서 3∼4학년, 평택 부용초등학교에서 4학년∼6학년을 다녔다. 거의 1년마다 이리저리 전학을 다니는 소년 떠돌이 방랑자가 되었다. 나의 오랜 고독의식, 떠돌이의식, 불안의식은 그때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한 것.
부용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단 앞으로 불러내셨다.
“정성수, 너는 천재다. 국어의 천재다. 열심히 하자.”
나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주셨다. 천재라니? 내가 천재라니? 공부도 싫어하는 내가 천재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었다.
피란 중에 다섯 학교를 전전하면서 낯선 학교에 대한, 학교 공부에 대한, 낯선 아이들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정들만 하면 헤어지고 다시 낯선 환경에 부딪치면서 여러 가지 심리적 상처를 받았다. 낯선 학교 학생들의 웃지 못할 텃세, 쓸데없는 시비, 싸움 걸기와 자주 맞닥뜨려야만 했다. 그게 너무 괴로웠다.
평택중학교에 입학, 1학년 2학기 때부터 무덕관 도장에 나가 태권도 (당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노란띠, 파란띠, 빨간띠가 되면서 시비를 거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나는 가느다란 몸매에 살결이 뽀오얀 미남소년이었다. 서울에서 전차를 타고 삼선고등학교를 다닐 때, 낯선 여고생들이 수없이 따라다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중2 때 드디어 운명적인 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김상욱, 오랫동안 고아원에서 생활하다가 나중에 어머니를 만난,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씩씩한 문학소년이었다. 우연히 그와 친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그동안 내가 창작한 만화를 빌려주고 그는 나에게 자신이 쓴 시와 수필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나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만화에 묻혀 사는데, 그는 이미 수준 높고 품위 있게 문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 심한 부끄러움에 휘말려서 곧바로 만화가의 꿈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리고는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비롯해서 여러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김래성의 탐정소설 『마인』 『청춘극장』 5권, 심훈의 『상록수』, 정비석의 『여성의 적』, 이광수의 『단종애사』 등 마구잡이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러면서 중학교 2학년 내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탐정소설 「복수 뒤의 복수」, 순정소설, 명랑소설 등 총 6편의 중편소설을 미친 듯이 써 나갔다. 대학노트 한 권에 중편소설 한 편씩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 소설공책들을 북북 찢어서 부엌 아궁이에 집어던지셨다. 소설을 쓰면 가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조선일보 지국장 겸 기자였다. 아버지가 나가신 뒤, 아궁이 속에 처박혀 있는 찢어진 소설공책들을 꺼내어 바늘로 꿰매면서 서럽게 울었다. 그후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는 우선 행의 길이가 짧아서 아버지의 눈을 속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소설가 지망생)이 시 숙제를 내주었는데, 그 시간에 국어책 위에 즉흥시 「가을」을 썼다. 그 시는 그후 국어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그 반면에 나의 문학친구는 별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 대단히 고무되었다. 평소에 내가 존경하는 친구의 시보다 나의 시가 뜻밖에도 큰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 강렬한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뒤 하루에 서너 편씩 열정적으로 시를 써서 마침내 중3 때 첫 시집 『개척자』를 내게 되었다. 중2 때 쓴 시 「가을」은 처녀작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집 『개척자』에 수록돼 있다.
평택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서울의 신설 공립학교인 삼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1 때 등사판 시집 『투쟁』을 내고 고2, 고3 때 당시의 학생잡지 『학원』에 소설 「편지」 「식모」 「제로」와 시 「시신에게 붙이는 엽서」 「치아의 서」 등을 발표했다. 졸업식 때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기도 했다.
그런 나의 뜨거운 학창 시절은 일단 여기서 끝나게 된다. 등록금 문제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 그 당시 어머니께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대학 등록금을 위해 오랫동안 부으신 계가 어느 날 느닷없이 깨져버렸기 때문. 그 바람에 대학 등록금은커녕 돈 한 푼도 건져내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의 쓰라린 심정이 오죽했으랴.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나의 가슴팍이 쓰라리다.
다음해 다행히도 경희대 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1학년 때 시 전문지 『시문학』에 시 「나의 깃발처럼」을 발표했다. 대학 2학년 때 단편소설 「사내 내음새」를 대학주보에 연재하고 개교기념 축시를 쓰고 시 「내 조그만 그림자 속」 등을 발표했다. 3학년 때 단편소설 「마지막 술잔」으로 ‘경희대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문단 등단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나는 여러 번 소설 등단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 36개월 후 만기제대를 했다. 4학년에 복학, 졸업 후 월간잡지 『학원』 기자, 국어선생 등으로 전전하다가 지난 1979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 마침내 대한민국 한 사람의 시인이 되었다.
나는 발명왕 에디슨의 말을 믿는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나는 또한 대기만성(大器晩成)을 믿는다. 아직 천재가 아닌 이 땅의 시인들이시여, 지구의 마지막 천재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땀을 흘리시라. 마침내 그대는 저 눈부신 천재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 참고로 등단시를 소개한다.

 


여보게,
오늘 나는 서른다섯 해의 눈을 열고 
처음 보았네.

 

창밖으로 쏟아져내리는 어둠의 
소나기 속,
온 하늘이 걸어내려와
땅의 가랭이 사이로 숨어드는 것을.

 

달아오른 알몸들이 퉁겨내는 음악,
한 치씩 푸른 숨소리들 떠올라
빈 나뭇가지마다 싱싱한 잎사귀
깃발처럼 흔들리는 걸 보았네.

 

숨소리는 다시 벌판 위를 기어가다가 
한 떨기씩 꽃으로 벙글고,
바다 속으로 뛰어내려
칼날처럼 번득이는 은빛 지느러미 떼.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해가 두드리는 원시의 북소리 울리고 
숲속을 행군하는 녹색의 군대,
벌판에 자욱한 꽃향기
잠든 바람을 흔들어 깨우고,
수평선 끝에서 하늘 속으로 뛰어오르는 
흰 말들의 말발굽 소리.

 

내 가슴속, 한 무더기씩 내려와서 
황홀한 속살로 번득이는 걸
보았네.
—「하늘이 걸어내려와」〔『월간문학』(197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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