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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문학지의 생명력과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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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8월 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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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문학』의 발행인인 김윤호 친구가 2024년 1월 15일 갑작스럽게 별세했다는 소식이 답지되어 깜짝 놀랐다. 다음 날 서울 태릉에 있는 장례식장에 바로 갔는데, 부인께서 알아 보고는, 독감과 폐렴이 겹친 게 직접 사망원인이었다고 얘기 해줬다. 그간 코로나 바이러스도 두 번 확진되었었다고 했다.
떠날 때는 말이 없다지만, 2023년 11월∼12월에만 해도 여 러 차례 컴퓨터 메일로, 제47회 백두산문학 문학 강연 및 시 낭송회, 제41회 백두산문학 신인문학상 시상식, 제11회 백 두산문학상 시상식을, 12월 17일 서울 노원구청 소강당에서 그들먹하게 한다고 알려와 전화 통화도 몇 차례 했는데 그 뒤 말없이 떠났다.
사단법인 한국문협이 주관하는 여러 행사에도 함께 많이 참석해왔고, 2022년 11월 1∼2일, 제42차 전국지도자대회가 열린 부여에서도 1박2일 함께 했다. 같이 한 산책도 커피집 에서 여러 참석자들과 나눈 환담들도 살아올라왔다. 그때 2021년엔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으로 꽤 고생했고, 그 전 젊었을 때 폐렴을 한번 앓아 더욱 조심한다고는 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022년 12월 7일에 고창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는 소식도 알 려줘 칭찬해줬다.
아마 김윤호 친구가 쓴 마지막 글이었을「계묘년 한해가 저물고 동 튼 갑진년에는」이 실린 2024년 1월 12일자 영광신문이, 이 친구 장례 식 후인 1월 19일에, 내가 사는 집에 도착되어 읽게 되니 이 친구의 돈 키호테같고,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이었던 인생행로가 파노라마처럼 떠올라왔다.
이 친구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살던 가족들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사 왔었기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 교로 전학 와서 나와 같은 반 친구가 되었다.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영 광읍에 소재한 중학교에도 3년간 같이 다녔다. 걸어다니던 나로서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 집과 이 친구 집이 멀지 않아 자주 오가곤 했다. 이 친구 집에 가면, 부모님께서 항상 따뜻이 대해주셨고 집이 꽤 크고 마당과 뒤뜰도 넓었다. 누나들과 여동 생이 많았지만 독자아들인 이 친구 덕분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같이 먹 곤 했다. 이 친구 부친께선 소가 아플 때 침을 줘서 낫게 해주시는 소위 시골수의사격인‘소침 주시는 분’으로 통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여고생들과 시낭송회나 문학의 밤 행사에 참여 하곤 하더니, 법과대학 다닐 때는 전국불교학생회 활동에 심취하였다. 고시공부를 하면서는 엉뚱하게도 단식에 심취하여 단식도장을 열기도 했다. 내가 대학졸업 후 고시공부 해보려던 1974년 2월엔 엉뚱하게도 687쪽에 이르는『불교성전』책을 보내왔다. 응원을 하려던 것이었던지 고시를 포기하고 취업하라는 암시였었던지 궁금했지만 덕분에 심취해 서 모두 숙독했다.
이 친구가 나보다 2년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집에 내려와 있을 때는 자주 놀러가서 대화도 많이 했고 친구가 보유하고 있던 법정스님 의 책 및 문학서적 들을 많이 빌려서 탐독했다.
이후 이 친구는 다시 서울에 올라가 계속 대학원 공부를 해서, 행정학 박사학위도 땄고, 정치권도 많이 기웃거렸다. 경제적으로는 안정이 조 금 안 되었었던지 박사학위 마칠 즈음엔 며칠 간격으로 급한 전화를 다 섯 번이나 해와 웃으면서 급전 수요를 충족해 준 적도 있다.
그러다가 이 친구, 엉뚱하게도 1991년『현대문학』을통해시로등단 했고, 용감하게 1994년 6월 11일엔 백두산문인협회를 창립했다. 1995 ∼6년경엔 이 친구의 장모님과 처남을, 어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 는데, 이 친구의 처남이 농촌에서 수문용접 일을 해온 경험자여서, 내 가 대형조선소에 취업시켜주는 중간역할을 했었다. 역으로 세계 5위 규모 조선소를 건설하여 가동을 준비하던 조선소에선 기능인력 모집이 절실하던 때라 서로 좋은 결과가 되었고, 이 친구가 사위·남편·매형 역할을 잘 한 셈이 되었다.
1999년 3∼4월에 엉뚱하게도 이 친구가 서울신문과 공동주최로 시 인, 화가 등 예술인 1백여 명씩의 금강산 뱃길문화체험을 몇 차 주도했 다. 이 친구의 이런 활동을 응원하시는 분도 계셨던지 첫 시집『화산』5 천 권을 펴냈고, 이 친구의 어머니까지 모시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 기념회를 갖기도 했다.
2000년 7월에 종합문예지『백두산문학』창간호를 발행하였다기에, 대학 다닐 때 대학신문, 취업 후 회사 사보에 글을 지속 투고해오던 나 도 이 친구 통해, 2002년『백두산문학』2호에서 수필로, 2003년『백두 산문학』4호에서 시로 등단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친구는 계속, 2004년 6월 대북 인도적 물자지원 단장으로 북한의 진남포와 평양을 방문하더니, 2006∼7년엔 남북공동나무심기 행사로 개성에 가서 평화통일의 숲 가꾸기를 주관했는데 나도 개성에 같이 가서 은행나무 20여 주를 심었고 내 명찰도 달아놨었다.
2016년 10월엔, 이 친구 또 국회출입기자포럼을 출범시키더니 2023 년까지 통일정책토론회를 여의도에서 국회의원들 및 교수들 참여하에 5회나 가졌다.
통일을 염원하고 체험한다는, 고구려 옛터 및 백두산역사문화탐방을 20회나 주선하기도 했는데, 2023년 9월에도 주선한다기에 지인을 합류 하게도 했다.
『백두산문학』은 2023년 말에 41호를 발간했고『백두산문학』을통해 등단한 인원은 25년간 약 350명에 이른다.
한 개인이 주도하여 발행하는 문학지의 생명력은 얼마나 될까? 개인 이 주도하는 문학지가 문단의 민주화에 기여하여 오고, 글 쓰는 이들을 많이 발굴하고 글쓰기 생활화의 지평을 넓혀 오는 데에 기여한 바는 크 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발행인 별세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오래 지속 되지 못하는 단점을 극복하기 또한 쉽지 않은 듯하다. 사단법인 한국문 협에 가입하기 위해, 내가 2008년 수필로 재등단했던『문예한국』도어 느 사이 중단되어 안타까웠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오면서 41호 를 넘긴『백두산문학』이 출신 작가 350명이나 김윤호 친구의 지인들에 의해 지속 발행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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