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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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햇빛에 눈이 부시다. 감나무잎 사이로 출렁이며 비껴 들어오는 햇살이 가슴을 파고든다. 예년만 못하지만, 주황색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유년 시절 도시로 이사 왔을 때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은 감나무를 처음 보았다.
5월이 시작되면 연두색 싱싱한 감잎이 달린 가지 사이로 노르스름한 감꽃들이 빼곡히 피어났다. 자고 일어나면 나무 밑에는 떨어진 감꽃들이 사방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감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작은 감들이 들어차 있다. 새끼감들이 강풍과 폭우의 시절을 무사히 견뎌내고 여름이 익어 가면서 어른 주먹만 한 감들로 변한다.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까지 버텨내면 우리가 ‘중앙동 감’이라고 부르는 크고 꿀처럼 단 홍시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더 나은 곳을 찾아서 하나씩 떠났다. 빈집이 되자 처마 밑의 합판은 축 처져 입을 벌렸다. 유리가 깨진 미닫이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졌다. 을씨년스럽게 변한 폐가에서 한때 칠 남매들이 북적거리고 학교를 마쳤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그래도 감나무는 변하지 않고 텅 빈 마당 한편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가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을 내고 꽃을 피운다. 되풀이되는 여름 장마철 비바람과 태풍을 버텨내고, 땡감으로 다 떨어지는가 싶어질 정도로 낙과가 많아도, 가을이 되면 달콤한 대봉시를 맺어 주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감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노화가 심해졌다. 젊은 날의 풍상고초를 겪어내고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느라 힘들어하고 있다. 이삼 년 전부터 대부분 감들이 깍지벌레에 잠식되어 시달리더니, 감 크기도 작아졌다. 태풍이 지나고 난 뒤에는 약한 가지들이 우수수 부러지고, 한 뼘 두께의 굵은 둥치도 부러져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나무껍질을 만져보니 비바람에 거칠어져 마치 죽은 나무와 같았다. 대부분 감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말없이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감망을 들고 본가로 가서 함께 감을 따곤 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젖혀 내가 움직이는 망을 쳐다보았고, 실수로 잘 익은 홍시라도 하나 땅에 떨어지면 안타까움에 야단법석을 피웠다. 아이들은 얼굴 전체에 주황빛 감물을 묻혀가며 환희 속에서 꿀맛으로 농익은 홍시를 맛보곤 했다.
아이들이 다 떠났고, 이제는 아내와 단둘이 감을 딸 수밖에 없다. 올해도 빈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마당이 맞이한다. 버티지 못한 못난이 홍시들이 곳곳에 떨어져서 뒹굴고 있다. 대문 위로 올라가 긴 감망으로 두세 개씩 따서 내려주면, 아이들처럼 고개를 젖혀 바라보던 아내가 감들을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거칠어진 껍질을 칙칙하게 두르고 있는 늙은 감나무는 지쳐 보였다. 가지가 부러진 상처들도 나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조금만 세게 잡아당겨도 죽은 가지들이 투두둑 하고 부러져 내려왔다. 처마 아래 응달에서는 아이들이 지르던 환호성이 그리운 듯 잠자코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적막 속에서 말없이 감을 땄다. 가을 햇살이 뉘엿뉘엿 질 때쯤에는 따 모은 감들이 제법 몇 상자 되었다.
대문 위에서 내려다보니 작아지고 야윈 아내가 감나무처럼 서 있었다. 학창 시절 아내는 배구부에서 활동할 정도로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았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하나둘씩 낳으면서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나고 늙은 감나무처럼 거칠고 투박한 모습으로 쭈그러들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고 다섯 아이를 키워 온 어머니에게 할당된 삶의 여유는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볼 시간도 없이 감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족의 충실한 집사로 살아왔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청소하고 가족의 끼니를 챙기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과 씨름하면서도 자식들이 하루하루 커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가족이 이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을 때, 큰아이들을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입학시켜야 했다. 그때 막내는 여전히 젖병을 빨고 있었다. 새 직장으로 출근해야 했던 나는 아이들을 챙길 수가 없었다. 그녀 혼자서 유모차를 끌고 학교를 뛰어다니며 입학 절차를 모두 처리하였다. 그날 저녁 퇴근 후에 아내가 한 일을 듣고 미안한 마음과 경이로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남편이나 시가나 친정,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몸이 두세 개라도 힘겨운 일들을 혼자서 해결했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연연으로 입학하고 졸업할 때마다 그녀의 홍시가 주렁주렁 열렸다.
아이들이 유학하러 갔을 때 아내는 언어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외국인 학생을 보조하는 자원봉사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 학교로 매일 출근을 하였다. 당신의 봉사가 아이들의 이국생활에 조금이라도 적응이 된다면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 덕분에 이국의 또래들에 부대끼던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아이들의 사춘기 방황을 오롯이 감당하였다. 다섯 놈의 사춘기 아이들이 차례대로 퍼부어 대는 반항과 분노로 가슴을 새까맣게 태웠을 것이다. 원망스럽기만 한 남편도 그녀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무수히 남겼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이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연로한 시부모가 자꾸 걸리는 그녀는 시간을 쪼개어 반찬이나 사골국 같은 음식을 준비했다. 시부모를 모시는 것은 시댁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부모를 비롯한 네 분의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치러야 했다. 무슨 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하는 성격이어서 행사가 끝나고 나면 늘 끙끙 앓았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한다’고 위로를 해주었지만, 육신의 고달픔까지 덜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없이 감망에서 감을 받아내는 아내의 작아진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늙은 감나무처럼 희끗희끗 눈꽃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아내의 머리가 가을바람에 쓸쓸히 나부꼈다. 오래전 환희 속에서 감을 따던 아이들의 볼처럼 그녀의 양 볼에도 고운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빨간 감잎 한 장이 아내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