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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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하고 내뱉으면 우주 만물의 에너지가 파도처럼 밀려와 내 안에 꽉 들어찬다. 온통 짙은 녹색으로 절정에 다다른 풀과 나뭇잎은 청량하다. 애벌레는 밤낮 구분 없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고 온전한 모습을 위해서 안간힘을 쏟는다. 미처 증발하지 못한 이슬은 자꾸만 꽃잎 아래로 스며들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기다리는 벌, 나비가 아니기에 매몰차게 거절하는 꽃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꽃이 아니었다면 관심도 없고 언감생심 찬사를 들을 수가 있었을까? 슬픔인지 비애인지 또 다른 정서인지 알 수 없는 순간에 몸이 흔들거린다.
아, 바람….
“여름은 충만하고 넉넉해서 좋다, 좋아, 참 좋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다가가는 바람은 본 것, 들은 것, 생각하는 것이 많을 텐데 여름은 참 매력 있나 보다.
뭐니뭐니해도 배가 불러야 콧노래가 나오고 더위와 습도에 지치지 않는다. 쌀보다 많은 눈곱 같은 좁쌀, 목넘김에 괴로워 울상 짓는 꽁보리, 불청객이 아닌 식구인 양 수굿하게 퍼진 감자가 양푼을 채운다. ‘호박꽃도 꽃이냐’며 고개 돌리던 아버지께서 ‘고놈, 참 맛나것다’며 비릿한 애호박 두 덩어리를 부엌에 던지신다. 어머니는 절반을 뚝 잘라서 된장찌개에 가지런히 넣어 바글바글 끓이고 나머지는 채 썰어서 들기름에 달달 볶아 홀딱 벗은 통깨를 아껴가며 뿌린다. 불볕더위가 들이닥치기 전 평상 위에서 먹는 이른 아침은 찐 호박잎 속에 폭 안겨 아늑하다.
각양각색의 과일은 한 폭의 풍경화이고 사연을 담은 녀석은 찔끔 오줌을 지릴 만큼 재미있기도 하다. 아기가 포만감으로 쓰윽 배꼽을 드러내고 잠을 자는 것 같은 참외는 점점 줄무늬가 또렷해진다. 다 익었을까, 덜 익었을까 통통통 노크하고 조마조마해하는 수박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오빠를 닮았다. 귀신을 쫓아내는 힘을 가진 복숭아는 몰래 제 살을 파먹는 벌레에게 속수무책이지만 밤에 먹다가 ‘으악’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저녁상을 물린 멍석 위에서 농사와 집안일로 종일 분주하던 어머니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눕는다. 내일 날씨를 염려하는 아버지께서 모깃불에 한 움큼 풀을 던지면 매캐한 연기에 콜록 하고 기침이 쏟아졌다. 정작 모기는 앵앵거리며 약을 올리고 이따금 간질거려서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치면 피가 잔뜩 나온다. 북두칠성 이야기,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 어머니께서 전해 들은 전래동화는 재탕에서 삼탕으로 각색되어 나를 만난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핀잔에도 한 대목만 더 해달라고 조르다가 이야기 짓는 사람을 꿈꾸며 까무룩 잠이 든다.
다시 여름이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여름의 기운에 찬사를 보낸다. 100세 인생을 사계절로 구분한다면 나는 늦여름을 막 지나고 초가을에 접어들었다. 이미 여름을 지난 것이 못내 아쉽고 쓸쓸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내 계절인 가을이 어색하며 낯설기만 하다.
몇 년 전 등단하여 올해 7월 첫 시수필집 『위로는 어떻게 선물이 되는가』를 출판할 예정이다. 복잡다단한 생활에서 힘겹게 버티는 독자에게 햇살 한 오라기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정성껏 글을 골라 퇴고했다. 시는 내게 위로가 되었고 다양한 정서의 드나듦은 맛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수필은 일상에서 선물처럼 설렘을 주고 멋있는 사람과 품격 있는 삶에 대해서 성찰케 했다.
여름은 위대한 나날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무더위와 장마와 폭풍우를 묵묵히 견뎌낸 석 달 남짓한 시간의 여정은 보석처럼 찬란하다. 글 쓰는 사람은 여름의 부지런함과 억척스러움을 배워야 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공을 들이고 애를 쓰는 만큼 새로운 발견과 감동을 주는 작품이 탄생한다.
어쩌면 여름은 사계절 중에서 선호도가 가장 낮을지도 모르겠다. 봄의 화려함과 가을의 풍요로움, 겨울의 여유와 운치보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덜해서 그런 것일까? 오래전 여고 시절 앙케트에서 좋아하는 계절을 ‘여름’으로 쓴 단 한 명이었던 나는 여전히 여름을 사랑한다. 크고 작은 생명체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여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하는 경이로움에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고 싶다. 그러면 여름은 “야이야, 니 어데 갔다 인제 왔노?” 하며 두 손 맞잡고 환대하며 선뜻 곁을 내어 줄 것만 같다.
고향에 사는 친구가 벌써부터 여름휴가 때 내려오라고 성화다. 태어나고 자란 집과 부모님의 노고가 서린 논밭은 소유권이 이전되고 심지어 헐리기도 했다. 추억으로 남아 있던 장면이 실체가 사라진 현장에서는 기억마저 의심스럽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에 아이들은 왜 그리 많았던지 지붕과 담을 맞대고 살았던 그 시절은 재현할 수 없다.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맥 빠지고 가슴이 먹먹한 것은 그리움과 애틋함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영글어서일까?
여름은 천둥처럼 깨우쳐 준다.
“고마, 활짝 열고 살그라. 내맨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