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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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다. 주는 이의 손끝에서 받는 이의 가슴까지, 그 온기는 식지 않고 자리를 잡는다. 물건의 형상을 빌려 마음이 건너가는 가장 고요한 인사, 그것이 바로 선물이다.
나이테가 선명해진다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하나둘 조용히 내 곁을 떠나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가끔은 뜻밖의 연유로 내민 손길이 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 주기도 한다. 여든 고개의 문턱을 넘던 생일날, 내게 찾아온 어린 손길이 그러했다.
열 살 손자가 내 앞에 묵직한 노트 한 권과 결이 고운 볼펜 한 자루를 내밀었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여기다 글 쓰세요”라며 폴짝 뛰어와 품에 안기던 손자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고, 목소리만큼은 영락없는 아이였다. 그 한마디가 무심히 흘러가던 내 남은 시간 위로 잔잔히 내려앉았다. 깊은 수면으로 떨어진 파동처럼 오래도록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 선물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고른 손자의 영특한 마음을 생각하니, 노년의 무료함에 젖어 있던 나를 책상 앞으로 바투 당겨 앉게 만들었다. 생각할수록 고맙고, 가슴 한구석이 환해지는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처음에는 백지의 침묵이 어색했다. 그러나 펜 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들려오는 사각거림은 마치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잊지 마세요, 이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질 사랑을….”
그날 이후 손자의 마음이 담긴 노트에 나의 소소한 일상과 지나온 세월의 편린들을 한 줄씩 쓰기 시작했다. 잉크가 스며들 때마다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퍼즐처럼 채워졌다.
이 선물은 두 세대를 묶어주는 따뜻한 탯줄이다. 내가 쓰는 문장은 나의 ‘어제’이지만, 훗날 이 노트를 다시 읽게 될 손자에게는 소중한 ‘내일’의 유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손자는 글 쓰는 할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응원하며 건넨 작은 선물은 서로의 영혼을 인정하는 가장 순수한 소통이었다.
노트를 펼칠 때마다 4년 전 그 아이의 맑은 눈망울이 떠오른다. 어느덧 훌쩍 자란 손자는 더 넓은 세상으로 씩씩하게 달려 나가고 있다. 그 성장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든든해진다.
오늘도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손자로부터 선물 받은 펜을 든다. 하얀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펜촉의 진동이 잔잔한 여울처럼 퍼져 나간다. 세월은 쉼 없이 흐르지만, 이 작은 노트 속에 둥지 튼 사랑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언제나 나를 정답게 품고 있다. 그 애틋한 사랑을 머금은 내 마음은 오늘도 고운 무지개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