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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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하나, 만으로는 예순이 되는 생일을 맞아 우리는 길을 떠났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시작점에 선다는 말처럼, 그 나이는 단순한 숫자라기보다 삶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게 하는 조용한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그 경계 위에서 떠난 여행은 일본 후쿠오카라는 낯선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이번 여행은 조금 특별했다. 아이가 항공과 숙박을 모두 준비해 주었고, 나는 소풍날 아침을 맞이하는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그저 따라나선 사람이었다. 그동안 엄마로서 해왔던 익숙한 역할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자리. 그 사실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족함을 채워주고, 내 의견을 다정하게 물어봐 주며, 내가 선택하기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도 하나에 의지해 버스와 전철을 타고 도시를 누볐다.
첫째 날 점심, 몇 개의 메뉴를 알려주며 내 의견을 물어왔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 식사는 조금 특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장어구이 정식을 권했고, 아이는 망설임 없이 좋다고 했다. 찾아간 유명 맛집에서 식사가 나오고 한입 먹는 순간,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서로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세우자 웃음이 터졌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맛이었다.
아이는 그때야 장어구이를 처음 먹어본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내가 먹고 싶다는 말에 제 식성보다 엄마의 기쁨을 먼저 선택해 준 것이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나는 양을 추가하자고 졸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는 그때 내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고 안심했다고 한다. 혹여 길을 헤매거나 식사가 입에 맞지 않을까 봐 내심 마음을 졸였던 아이에게, 나의 웃음은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확신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저 맛있어서 웃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 웃음을 확인하며 비로소 자신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카페에 가고, 쇼핑을 하면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따뜻하고 고마워 나는 매 순간이 벅차올랐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신생아실 창문 너머로 본 첫인상은 너무 작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중에 저 아이가 효도할 거라던 어느 할머니의 위로보다, 저 작고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이 앞섰던 시절이었다. 그 아이는 커가면서 내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자기를 안아 달라고 하며 나를 위로했다. 엄마가 자기를 안으면 힘이 난다던 그 말에 나는 얼마나 자주 울컥하며 다시 일어섰던가. 그 작았던 아이가 이제는 나의 기색을 살피며 낯선 길을 앞장서 걷고 있었다.
식사하기 위해, 혹은 차를 마시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도 있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 시간 자체가 좋았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이 정말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따뜻한 행복이었다.
아이는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더 좋은 것을 보여주고, 더 편하게 해주고, 더 기억에 남는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어느 순간 밀려오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잘 자라준 시간과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진 인연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늦은 밤, 우리는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걸었다. 밝은 거리에서 조금 벗어난 조용한 길,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낮은 음악과 벚꽃이 흐드러진 공원. 낯선 도시였지만 사람 사는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 평범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여행 내내 아이는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때로는 앞서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예전에는 언제나 내가 앞에 서서 길을 찾고, 아이가 넘어질까 봐 먼저 살피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가 조용히 바뀌어 있었다.
아이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라서 따라가다 보면 숨이 조금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걸음 속에는 보이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고 나를 기다려주는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앞서가다가도 어느새 간격을 맞추고, 뒤돌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는 그런 걸음. 가로등 아래로 길게 이어진 두 그림자를 보며 아주 조용히 깨달았다.
아, 이제는 자리가 바뀌었구나.
보호한다는 것과 보호받는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경계는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조금씩, 자연스럽게 서로의 걸음 속에 스며들며 변화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그날 밤, 낯선 도시의 골목길에서 뒤늦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낮게 켜진 가로등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아이와 나는 나란히 그 길 위를 걸었다.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그렇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