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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에 남은 노래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복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8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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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늘 노래하고 있다. 나는 그 노래를 고향의 새벽에서 들었다. 앞산에는 소나무가 가득하고, 서쪽으로 돌아 노송이 빽빽한 뒷산으로 이어진다. 앞마당의 작은 연못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여명의 빛이 그를 두드릴 때 영인산 꼭대기에 붉은 빛이 스며들며 땅의 노래를 지휘한다.
부지런한 텃새들은 여기저기서 교향악에 동참하고, 여명의 빛은 천천히 밝아와 그를 어루만지며 숨을 돌린다. 긴 밤을 지나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생명의 숨결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 순간을 유난히 좋아했다. 새벽녘의 찬 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텃새들의 지저귐과 먼 산 너머 희미한 붉은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장관을 바라보는 일은 내게 하나의 의식과 같았다. 그때마다 그가 간직해 온 태고의 비밀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향의 들판은 낮고 넓게 펼쳐져 있다. 바람이 일렁이면 땅은 신선한 향기를 머금고 숨을 들이쉰다. 그 숨결 속에는 농부의 땀과 개울물의 속삭임, 오랜 시간 쌓인 생명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나 그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래서일까. 맨발로 달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땅과 맞닿아 달릴 때 그 힘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아침 간식으로 갓 낳은 날달걀을 먹고 달리기 훈련을 하던 시절, 코치 선생님의 자전거 뒷자리는 언제나 든든한 동행이었다. 나는 시합에서도 맨발로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고추밭에서 맨발로 고추를 따다가 저녁이 되자 발에서 불이 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땅이 따뜻한 품이면서도 때로는 냉정한 가르침을 주는 존재임을 배웠다.
아침 햇살이 들판 위에 내려앉으면 그는 생명의 노래를 부른다. 벼 이삭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초록빛 물결이 춤을 춘다. 논에는 하늘이 담기고, 밭에서는 작물들이 생명의 기운을 뿜어낸다.
나는 이 들판에서 계절의 흐름을 배웠다. 봄의 초록과 여름의 비, 가을의 황금빛과 겨울의 고요 속에서 땅은 늘 같은 자리에서 생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땅은 단순한 터전이 아니라 내게 삶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기다리는 법을 알려 주었고, 흘러가는 것을 붙잡지 않는 법도 일러 주었다. 나도 인생을 흐름에 맡기는 법을 그에게 배웠다.
저녁 바람을 타고 공세리성당의 종소리가 들판을 건너오면 벼 이삭도 고개를 숙여 흔들어 주고, 나뭇잎들도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흔들어 준다. 낮 동안 햇살을 머금었던 땅은 고마운 바람을 맞으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 낸다.
익숙한 냄새를 품은 저녁 연기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들 속에서, 마음 깊은 곳의 그리움이 조용히 익어 간다. 그것은 그와 함께한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한여름 원두막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똥별이 저리도 많이 떨어지다니. 어떤 별은 밝게 빛나며 달려들다 사라지고, 또 다른 별이 그 뒤를 이어 다가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빛나는 별들은 그를 위한 거름일지도 모른다고. 별빛 아래의 그는 낮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와 밤바람이 그를 감싸고, 그 순간 나는 그와 하나가 된 듯했다.
땅에 남은 노래는 이제 내 고향을 넓힌다. 그 노래를 따라가다 보면 지구도, 우주도 모두 고향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안에서 발을 딛는 모든 곳마다 땅의 노래를 연주한다.
나는 오늘도 그의 노래를 마음에 품는다. 눈을 감아도, 내 안에서 그의 노래는 이렇게 들려온다.

 

바람이 불면/ 땅은 오래된 상처를 펼치고// 비가 내리면/ 땅은 기지개를 편다// 땅, 땅, 땅/ 웃음이 번진다

 

눈을 감는다. 농부가 떠난 빈 땅은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시간을 놓아둔 채, 조용히 그의 노래만이 울려 퍼진다. 그 노래는 별빛과 이슬 속에서 생명의 숨결로 이어지고, 나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아 그 음률을 되뇐다. 그 노래는 농부의 손길이 남긴 시간의 숨결이었고, 상처 위에 자라는 생명의 약속이었다.
“바람이 불면/ 땅은 오래된 상처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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